답사와 여행(국내)/서울특별시

정동역사탐방/서울(2018,10,03)

케인스 2018. 10. 23. 20:03



              정동역사탐방 / 서울 (2018.10.03)              

 

 

 

☞ 서울특별시(서울特別市)  중구(中區) 정동(貞洞)

 


중구 정동 위치 <참고자료>

 

 역사 탐방 지점 위치도  <참고자료>


 역사 탐방 지도 <google 참고사진>




정동역사탐방



11:11 / 출발지점



                          출발지점 지도 <참고사진>



▶ ① 선원전터(璿源殿址)



선원전터 입구 [옛 경기여자고등학교 부지]



 선원전터: 덕수궁 선원전 복원 관련 문화재 발굴 조사 중.


선원전 영역은 조선시대 왕의 초상인 어진(왕의 초상화)을 봉안하던 선원전을 비롯해 흥덕전, 흥복전 등 부속건물이 있었지만,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난 뒤 1920년대 전후로 일제에 의해 훼손되었습니다. 광복 뒤에는 경기여고 부지로 쓰였다가 학교가 이전한 후 주한 미국대사관에 양도되었는데 2011년 국방부 소유의 용산 미군기지 내 캠프 코이너 터와 교환하기로 합의하면서 그동안 발굴조사와 복원 연구용역이 진행돼 왔습니다. 2013년 4월부터 8월까지의 발굴조사에서는 궁내 전각인 흥덕전과 흥복전의 기초 흔적이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문화재 발굴 조사 중인 덕수궁 선원전(璿源殿) 터<참고사진>


한때 주차장으로 쓰였던 덕수궁 선원전(璿源殿) 터에서 궁궐 전각인 흥덕전(興德殿)과 흥복전(興福殿)의 흔적이 발견됐다. 문화재청은 덕수궁 원형 복원 계획에 따라 서울 중구 정동 1-8번지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이같이 확인했다고 29일 밝혔다. 발굴 조사를 맡은 동양문물연구원에 따르면 흥덕전 터는 옛 경기여고 운동장 부지에서, 흥복전 터는 옛 경기여고 본관 건물 아래에서 각각 발견됐다. 흥덕전 터에선 배수로인 암거 시설과 석렬 1기, 나무기둥 기초다짐인 적심 19기, 기와와 깬돌을 활용한 다짐층 등이 발굴됐다. 또 경기여고 본관 신축 과정에서 많이 훼손된 흥복전 터에선 기단 석렬을 포함해 초석과 행각터, 문터 등이 확인됐다.  [서울신문/2013-08-30]


  덕수궁복원정비조감도 <참고자료>


  선원전권역복원조감도 <참고자료>


                                      

                           덕수궁, 제 모습 찾기  <참고자료>


덕수궁 선원전은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기 전 가장 먼저 신축했던 중요한 건물이었으나 1900년 10월 화재로 불타게 되자, 당시 미국공사관 북쪽 수어청자리(정동부지, 옛 경기여고 터)로 옮겨 1901년 7월 11에 복원되었습니다. 그러다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한 후에는 모두 없어져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가 해체되는 과정을 겪어왔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경기여고 용지로 쓰이다가 주한미국대사관에 양도되었습니다. 2003년 6월 미국대사관 기숙사 건립을 위한 문화재 지표조사 중에 덕수궁 선원전 터가 확인되면서 용산 미군기지 내 부지와 맞교환하기로 합의되어 2011년 우리나라에 다시 소유권이 넘어왔습니다. 선원전 권역인 정동부지는 2011년까지는 미국대사관, 경기여고 등의 부지로 사용되었으며, 이후 교환된 부지 사이에 경계벽이 설치되고 아관파천 당시 고종이 걸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의 길’이 지난해 말 완공되면서 복원이 시작되었습니다.


문화재청은 2038년까지 3단계에 걸쳐 진전(眞殿)인 선원전(璿源殿), 빈전(殯殿)으로 사용되던 흥덕전, 혼전(魂殿)인 흥복전 등 주요 전각과 부속건물(54동), 배후림(상림원), 궁장(宮牆) 등을 복원해 나갈 예정입니다.
     * 진전(眞殿): 역대 왕의 御眞(어진:초상화)을 봉안한 건물
     * 빈전(殯殿): 왕이나 왕후 승하 후 그 시신을 모셔둔 곳
     * 혼전(魂殿): 발인 후 부묘(祔廟, 종묘에 신주를 옮기기) 전까지 신주(神主)를 모셔둔 곳


올해는 선원전 지역의 발굴조사를 위하여 미 대사관에서 사용하던 조선저축은행 사택, 미부대사관 관저 등 건물 9동과 시설물들을 철거할 계획입니다. 철거 전 작년에 완공된 ‘고종의 길’과 철거 건물들도 개방할 것인데, 선원전이 해체된 후 여러 용도로 사용되던 역사적 장소를 국민이 둘러볼 수 있도록 일정 기간 공개하기로 하였습니다. 문화재청은 이번 기공식 이후 ‘덕수궁의 제 모습 찾기’를 진행하면서, 일제에 의해 훼철되고 변형․왜곡된 궁궐의 위상을 회복하고 대한제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2018, 문화재청 자료> 


 선원전터  수령300년 회화나무

    

선원전터에 세워졌던 옛 경기여고 교사 모습

(수령300년 회화나무 모습은 그대로 입니다.)

                               정동교사(1945~1965): 1945년 광복후 경기여고 정동교사. 불타기 전까지의 모습 <참고사진>


                               정동교사(1965~1987): 화재이후 새로 지어진 본관 건물(1969) <참고사진>


선원전터와 그 일대 모습 <참고사진>



덕수초등학교



서울덕수초등학교 운동장, 서울덕수초등학교병설유치원 정문


서울덕수초등학교


서울덕수초등학교는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있는 공립 초등학교로서 1912년 4월 개교한 이래 현재 초등학교 23학급과 유치원 4학급의 학생들이 100여년의 역사와 명문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서울덕수초등학교 정문  <참고사진> 



② 구세군역사박물관(救世軍歷史博物館), 옛 구세군중앙회관(救世軍中央會館)



                                                        구세군역사박물관 위치 <네이버지도참고>



 ☞ 구세군 역사박물관



한국구세군 역사박물관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0호] 


구세군 역사박물관 건물은 1928년 완공하여 「구세군사관학교」로 사용되었으며, 후에 「구세군 중앙회관」을 거쳐  2003년 10월 구세군 한국 선교 95주년을 맞아 「구세군역사박물관」으로 개관하였으며, 2011년 봄, 1층과 2층으로 새롭게 확장 개관하였습니다.


 


                  


구세군 역사박물관[중앙회관] 건물은 근세건축물 문화재로서 한국 기독교의 뿌리와 문화 그리고 신앙의 전통과 역사를 증언하는 귀한 기독교 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근대 건축물로서 좌우 대칭의 안정된 외관이 잘 보존되어 있어 건축 인테리어 도시공학 분야의 견학과 연구현장으로서도 커다란 의미를 갖고 있는 서울시의 명소이기도 합니다.



                       중앙 상부의 삼각형 박공(牔栱, pediment) <참고사진> 

 

맞배지붕의 측면에 人자형으로 붙인 건축 부재(部材)로서 처마에서 뾰족한 지붕 끝까지 뻗어 있으며, 고대 그리스 신전에서 박공을 페디먼트라고 불렀습니다.


                      2층의 헤머빔(Hammer Beam) 지붕틀 구조 <참고사진> 


                                         

                                          현관 기둥 <참고사진> 


4개의 큰 기둥이 있는 현관은 덕수궁 석조전이나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 19세기 말 영국에서 유행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 형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캐노피(canopy) <참고사진> 


                       건축에서 제단, 옥좌 등의 위에 기둥으로 받치거나 매달아놓은 덮개를 일컫습니다.


                         

  한국구세군 역사박물관  <참고사진>


구세군 역사박물관 건물은 1908년 구세군이 한국에서 선교 시작한지 20년이 지나 정착할 무렵 부람웰 부스(Bramwell Booth) 세계구세군 제2대장의 방문을 기념하여 1926년 착공, 1928년에 완공된 동시대 서울장안의 10대 서양건물 중의 하나로서 구세군의 상징성을 지닌 대표적인 건축물입니다. 영국 런던의 크랍톤 콩그레스홀(Clapton Congress Hall)이라는 구세군교회를 모델로 설계하였고, 당시 건축비는 부람웰 부스의 칠순 기념으로 미국과 캐나다의 구세군인들이 보내온 후원모금으로 조달하였습니다. <구세군자료>



구세군 역사박물관


한 세기 동안 산재해 있던 구세군 선교문화유산 및 기독교적인 자료들이 과천 구세군 사관학교 캠퍼스의 역사자료실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 자료와 물품 등을 중심으로 유서 깊은 정동 중앙회관(舊 구세군사관 학교 건물) 1층 내부에 전시실을 마련하여 설치보존하게 된 것입니다. <구세군자료>




                     구세군 역사박물관 내부 <참고사진>


                     구세군 역사박물관 내부 <참고사진>


                     구세군 역사박물관 내부 <참고사진>




☞ 구세군 교회




  구세군 교회 정문 <참고사진>


구세군 서울제일교회 <참고사진>


구세군 교회 정문 옆 구세군영(救世軍營) 표석 <참고사진>





                                           





덕수궁돌담길(일부개방구간)


 

                                                덕수궁 돌담길 일부 개방구간 위치 <다음지도참고>


구세군 중앙회관을 지나 언덕을 오르면 언덕 정상부분 왼쪽에 덕수궁 돌담길이 있습니다. <참고사진>

                                 

                                  일부 개방된 곳으로 가봅니다. <참고사진>






  

     개방되기 전에 철문으로 닫혀있던 부분이 아래 사진 지점입니다. <참고사진>


위 사진의 철문 부분에서 안쪽으로 개방된 길입니다.


개방 지점에서 돌담길 입구쪽으로 바라본 사진


 개방된 돌담길 


                     <참고사진>


                       <참고사진>


덕수궁 담장 기초석


 덕수궁돌담길 파노라마 사진 - 독일공사관, 배재학당 서쪽문



 덕수궁돌담길 파노라마 사진 - 프랑스공사관, 이화학당









개방된 돌담길 끝지점의 영국대사관 철대문과 오른쪽 덕수궁으로 통하는 문 <참고사진>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가기위해 덕수궁돌담길을 따라 진행합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위치 <다음지도참고>






 서울시립미술관[舊 대법원청사]




 

서울시립미술관 로비


서울시립미술관 로비에서 장애여성공감 극단의 <춤추는 허리>라는 퍼포먼스 공연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진행


서울시립미술관 주차장 입구 건너편에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위치 <다음지도참고>


 배재학당역사박물관[동관 동쪽면]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서울시기념물 제16호]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서울시기념물 제16호]


배재학당역사박물관[동관 서쪽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내부 전시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홈페이지 참고사진>


 신교육 발상지 표지석과 배재중,고등학교 배지(badge)


배재빌딩이 있는 이곳은 옛 배재학당 터입니다.



                         독립신문사터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입구의 고목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동쪽에 자리한 고목


옛 배재학당 운동장 동쪽에 있었던 아름드리 고목


                        배재공원




신아빌딩




                                              신아빌딩 위치 <google 참고사진>


신아빌딩 [담쟁이덩굴이 어울리는 빌딩] 


신아(新亞)빌딩


이 건물은 창문 위 상인방 양쪽 끝부분에 붉은색 벽돌과 대비되는 흰색의 석재가 눈길을 끕니다. 1981년 4월에 준공되었지만 꽤 오래된 건물의 느낌을 주는데 머릿돌에 쓰여있듯이 건물에 쓰인 벽돌을 1904년 영등포 기관고(機關庫: 기관차를 넣어 두는 차고)에서 가져와 세웠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신아빌딩 머릿돌 <참고사진> 


머릿돌에 신아일보사(新亞日報社)라고 씌어있는 것으로 보아도 알 수 있지만, 이 빌딩은 정동길을 따라가다 보면 만날 수 있는 '신아일보별관'이라 불리는 4층 높이의 붉은색 벽돌건물과 연관성이 있습니다. 언론인 장기봉씨에 의해 1965년 창간된 신아일보사의 사옥으로 사용하기위해 지어졌던 것으로 보이나 1980년 언론기관 통폐합조처에 따라 신아일보는 경향신문(京鄕新聞)에 흡수, 통합되어 11월 25일에 종간되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직 신아(新亞)라는 빌딩 이름으로만 그 흔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신아빌딩 <참고사진>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 위치  <다음지도참고>

 정동제일교회(貞洞第一敎會): 사적 제256호


정동제일교회는 기독교 대한감리회 소속으로 한국 최초의 감리회 교회로서 1885년 10월11일 미국의 선교사 H.G. 아펜젤러가 창립했습니다. 1977년 사적 제256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는 1887년 한옥을 구입하여 예배처소로 삼았으나, 교인수가 늘어나게 되자 1897년 12월 26일 고딕 양식의 붉은 벽돌로 예배당을 신축했습니다. 1918년에는 한국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을 설치했습니다. 개화운동부터 반일 민족독립운동을 병행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으며, 3·1운동 이후부터는 야간학교를 설치하는 등 선교 사업에 힘썼습니다. 6·25전쟁 때는 예배당 일부와 파이프오르간이 파괴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습니다. <다음백과자료>



 

  정동제일감리교회 처음 모습 <참고사진>


1895년 8월 착공하여 이듬해 헌당식을 거행하고 1897년 10월쯤 준공된 고딕풍의 붉은 벽돌 교회 건축물입니다. 왼쪽 사진은 현재의 정동제일교회의 전경입니다.



 정동제일교회


정동제일교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회로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의 신앙정신이 담겨있는 영국 빅토리아풍 고딕식 붉은벽돌 건물로 예수그리스도의 성전을 최초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길이 77척 너비 40척 높이 25척으로 회당안에 좌우로 좁은 방 하나씩, 그 길이는 28척 너비는 14척 11평으로 설계되어 1895년 8월 7일에 착공된 후 그해에 기초공사를 끝냈고, 1896년에는 지붕을 얹었습니다.

이 교회는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당시 최대 건물이었으나 1914년 대부흥운동으로 교인수가 2천명 이상으로 늘어나자 1926년 모퉁이 주춧돌을 종각 남쪽 모퉁이 서편으로 옮겨놓고 동으로 10자, 남으로 14자, 합 60평형을 증축하여 175평 건물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정동제일교회100주년 기념탑  <참고사진>



                                        <참고사진>


                  교회 내부 <참고사진>


                  교회 내부 <참고사진>


                                         사회교육관 <참고사진>


                             감리교회 조선선교 50주년 기념비 <참고사진>


조선 감리교회는 1935년 4월 부활절을 기해 감리교회 조선선교 50주년 행사를 기념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기념비에 사용된 돌은 이끼가 끼지 않고 견고하고 화려하기로 이름난 보령 염포오석으로 비석전면에는 "감리교회 조선선교 50주년기념비, 기독교조선감리회교우일동건립", 후면엔 "부활주일에 조선과 만주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기념헌금한 것과 유지들의 기부로 1936년 4월 12일 부활주일에 이를 건립하였다"고 쓰여있습니다.


정동제일교회 뒷면



▶ ⑥ 정동극장




                                   정동극장 위치 <네이버지도참고


 정동극장(貞洞劇場)


정동극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원각사(圓覺社)를 복원한다는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탄생한 극장으로, 전통예술의 발전과 보급, 생활 속의 문화운동 전개, 청소년 문화의 육성이라는 세 가지 지표를 목적으로 1995년에 건립되었습니다. 개관 당시에는 국립극장 분관으로 출발했다가, 1996년 과도기 운영체제인 사단법인체로 변경하였으며, 1997년 재단법인으로 완전한 독립법인체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정동극장(貞洞劇場)


이 극장은 신극과 판소리 전문 공연장으로 1908년에 문을 열었던 원각사(圓覺社)의 복원을 이념으로 하고 있으며, 460여평의 대지 위에 지상 2층과 지하 3층의 철골 트러스(truss) 구조로 만들어졌습니다.


 정동극장(貞洞劇場) 야외공연장


정동극장 무대와 객석 <참고사진>


266석의 객석 <참고사진>


야외마당 <참고사진>



▶ ⑦ 덕수궁 중명전


                                             

                                              중명전(重明殿) 위치 <다음지도참고>


덕수궁 돌담길을 거쳐 로타리를 지나 정동길로 조금 진행하면 우측에 정동극장이 있고,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중명전'이 있습니다.


덕수궁(德壽宮) 중명전(重明殿)

 

중명전은 1901년 지어진 황실도서관으로 처음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습니다. 1904년 덕수궁이 불타자 고종의 집무실인 편전이면서 외국사절 알현실로 사용되었습니다. 1906년에 황태자(순종)와 윤비(尹妃)와의 가례(嘉禮)가 여기에서 거행되었으며,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그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바로 중명전입니다. 중명전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뒤 다시 재건하여 1960년대까지 경성구락부(Seoul Union)로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지만,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습니다.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고, 그 후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2005년에는 문화재청이 매입하고 관리 전환하여, 2007년 2월 7일 사적 제124호로 덕수궁에 편입되었습니다. 2007 ~ 2009년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습니다. <백과사전 참고>



중명전(重明殿): 사적 제124호 <안내판사진>


                                  




중명전(重眀殿)


중명전(重眀殿)은 덕수궁이 아직 경운궁(慶運宮)일 당시, 우리나라에 궁중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식 건물 중 하나입니다. 대지 2,399㎡(727평), 건축면적 877.8㎡(236평)의 양식(洋式) 2층 벽돌집으로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I. Sabatin)이 하였습니다. <백과사전 참고>


                       

                        중명전 정면 입구


                                             

                                              중명전 현판 <참고사진>


중명전(重眀殿)에서의 '중명(重眀)'은 주역(周易) 리(離)괘에 나오는 용어로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모두 밝아짐을 의미합니다.

중명전 동쪽면


 중명전 동쪽과 북쪽면




 중명전 북쪽면과 서쪽면


중명전 서쪽면


복원 전의 중명전<참고사진>


                                        과거의 중명전 사진 <참고사진>                                        



☞ 중명전 내부 전시실




 덕수궁의 역사

 

대한제국 고종 '황재어새'(보물 제1618호) 복제품


                       일본에 의해 을사늑약이 강제 체결되자 수교국들에 발송한 고종의 친서


 좌로부터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이완용, 하야시곤스케, 이토히로부미, 박제순,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





만희당지(晩喜堂址)



                              만희당지(晩喜堂址) 위치 <다음지도참고>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했던 만희당(晩喜堂)은 중명전 북쪽에 있었습니다.


 만희당지(晩喜堂址): 중명전 북쪽 지역



중명전[동쪽면]과 만희당 <참고사진> 




구 신아일보사 별관



                                                       구 신아일보 별관 위치 <다음지도참고>


                       

                      舊(구) 신아일보사 별관: 등록문화재 402호


1930년대에 지하1층 지상2층으로 건축된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미국기업인 싱거미싱회사(Singer Sewing Machine Company) 한국지부 등으로 사용되다, 1969년 신아일보사로 매각되어 1975년 사세확장에 따라 3·4층을 증축하고, 1980년 언론기관통폐합으로 경향신문에 흡수·통합되기 전 까지 신아일보사 별관으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민간건물 건축기법으로 거의 채택되지 않았던 철근콘크리트조로 건축된 건물로 일방향 장선 슬라브(One-way Joist Slab) 구조 및 원형철근 사용 등 일제 당시 건축구법·구조 등이 잘 남아있어 근대건축기술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1980년 신군부 언론통폐합 조치로 폐간되어 언론수난사 현장을 대변하는 등 근현대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은 건물이다. <문화재청자료>




                        

                         구 신아일보사 별관 <참고사진>



적산(敵産)이란 1948년 9월 11일 대한민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에 체결된 재정 및 재산에 관한 최초 협정에 의하여 대한민국 정부에 넘겨진, 광복 이전 일본인 소유였던 재산을 말합니다.


                  출입구 [1층은 좌우의 계단을 이용하고, 정면의 홍예 형식의 문으로 들어가면 지하 공간입니다] <참고사진>


                             지하 출입구 <참고사진> 





                       증축 전(2층)의 건물 모습                           <참고사진>                         증축 후(4층)의 건물 모습

                          


1963년  한국일보 편집국장이던 장기봉씨가 Singer Sewing Machin사로부터 이 건물을 사들이고 1975년 4층으로 증축합니다. 2년여의 준비 끝에 1965년 신아일보를 창간하고 이 건물에 편집국을 두었으며, 인쇄공장은 신아빌딩 자리에 있었습니다. 신문인쇄시설은 1964년 3월5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 있는 Advertiser라는 출판회사로 부터 장기봉씨가 기증받아 신아일보 창간에 박차를 가합니다. 신아일보는  창간 당시 편집국 인원은 18명에 지나지 않았으며, 이들만으로 매일 8면의 지면을 제작하여 신문계에서 ‘기적의 신문’이라는 평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신문은 1980년 언론기관 통폐합조처에 따라 『경향신문(京鄕新聞)』에 흡수, 통합되어 11월 25일에 폐간되었습니다.



▶ ⑧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심슨기념관 위치 <다음지도참고>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현재 이화박물관]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 옆면 <중구청 사진자료>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 (서울 梨花女子高等學敎 Simpson紀念館)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은 1915년에 준공된 옛 이화학당의 교사(校舍)로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3호 정동 이화여고심슨기념관으로 지정 되었으나, 2013년 10월 30일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으로 등록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이화여고 심슨기념관 <이화여고사진자료>


심슨기념관은 미국 컬럼비아 리버 지회의 홀부룩이 희사한 기금으로 1914년에 기공하여 1915년 3월에 건물을 준공하였습니다. 홀부룩의 기부금은 그의 동생 새라 심슨(Sarah J. Simpson)이 세상을 떠날 때 위탁한 것이어서 건물 이름을 심슨기념관으로 명명하였습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로 6.25전쟁 때 붕괴되었다가 1960년대 초 복구하였는데, 남쪽 건물의 외관은 처음 건축할 때의 모습으로 복원하였으며, 뒷부분은 현대적인 외관으로 처리하였습니다. 외벽을 붉은 벽돌로 지은 철근콘크리트 구조의 근대 건물로 학교건축의 초창기 서양 건축양식을 도입하였고 현재는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심슨기념관/이화박물관


심슨기념관은 1915년 완공 후 1922년에 증축한 현재 이화 캠퍼스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고딕풍의 3층 벽돌조 건물로 창문 아치 중앙과 모서리를 흰 화강암으로 장식하여 벽면에 붉은 벽돌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화여고 옛 정문 [정문 앞 하마비(下馬碑)가 이채롭습니다]



정동공원



                                                    정동공원 위치 <다음지도참고>


                        한국카톨릭수도원 자리 표지석




정동공원(貞洞公圓)


정동공원은 구 러시아공사관 주변을 정비한 후 공원으로 조성하여 시민들에게 개방한 곳으로 르네상스 건축양식의 구 러시아공사관 탑과 조화를 이루도록 시공되었다고 합니다.



서양식 육각정


정동공원 중앙에 있는 육각정 역시 구 러시아공사관의 색갈과 어울리게 하얀색으로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 ⑨ 구 러시아공사관


                                           구 러시아공사관 위치 <다음지도참고>


                        구 러시아공사관 3층 전망탑


구 러시아공사관 [사적 제235호 / 시대: 1890년(고종27)]

 

이 건물은 1890년(고종27)에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틴(A.I.Scredin Sabatine)이 설계한 르네상스식 건물로 러시아공사관으로 사용됐다. 벽돌조 2층의 본관은 한국전쟁 때 대부분 파괴되었고, 현재는 3층 규모의 탑만이 남아있다. 탑의 1층은 본관과 이이어졌고, 2층에는 창을 하나만 내어 단순하게 만들었다. 3층에는 네 면에 반원 아치형의 창을 냈고, 지붕은 삼각형 페디먼트(Pediment, 牔栱)로 구성했다. 현재 탑의 동북쪽에 있던지하 밀실(密室)의 일부가 발굴되었는데, 지하 밀실은 비밀통로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까지 연결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공사관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1896년(건양1) 2월1일부터 고종이 세자(순종)과 함께 약 1년간 머물렀던 곳이다, 이곳에는 당시 국제정세에 휩쓸려 자주 정변을 겪어야 했던 조선의 현실이 드러나 있다. <안내판>





파괴되기 전 러시아공사관 <참고사진자료>


                                            



                

               구 러시아공사관 모형 <역사박물관 전시물>



 구 러시아공사관 배치도 [현재까지 남아있는 3층전망탑 과 지하통로  부분]


                         3층전망탑 남쪽


                        3층전망탑 서쪽


                             3층전망탑 북쪽


                                 3층전망탑 내부<경향신문 참고사진>


이 건물의 지하에는 밀실(密室)과 비밀통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밀실과 공사관 탑은 비밀통로로 이어져 있는데, 그 폭은 45cm, 길이 20.3m이다. 통로 중간지점은 폭 50cm. 길이 5m로 확장되어 있는데, 이는 통행인이 급히 왕래할 때에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안내판 참고자료>



                                               아관파천 당시 고종(잘못) → 돈덕전에 머물던 고종(수정) <참고사진>


아래의 글은 2019.03.02 올리신 'ㄱ나'님의 위 사진[아관파천 당시 고종]에 대한 댓글입니다.


"아관파천 당시의 고종이라는 제목으로 달린 사진은 꽤 오랜동안 아관인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모습이라고 알려져있었고, 국사교과서에도 아관파천 당시의 고종이라고 게제되었으나!! 지금은 돈덕전이 복원되고 학계의 연구가 심도있게 이뤄어져서!! 돈덕전에 머물던 고종의 모습의 판명되었으니 내용을 수정하셔야 합니다."


위 댓글에 공감하며 '돈덕전에 머물던 고종'으로 사진의 제목을 수정합니다. 지적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므로 이 사진의 위치도 이곳이 적당한 위치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아래의 사진 및 글은 찾아본 관련 내용의 사진과 기사 내용입니다.


                              

                                   덕수궁 돈덕전(惇德殿) 모습을 담은 사진이 처음으로 발견됐다.


▲사진 ①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무늬가 기둥과 난간 등에 장식된 덕수궁 돈덕전. ③덕수궁 돈덕전에서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며 무력 시위하는 일본군. 1907년 7월 22일 고종을 위한 친위 쿠데타를 시도하려던 대한제국 시위대를 제압한 뒤의 모습으로 추정된다.  



                                     


[새로 밝혀진 역사현장] '아관파천' 사진은 덕수궁 돈덕전이었다

서울대 이진태 교수 발굴… 일군, 고종퇴위 강요 무력시위 모습 생생
1907년 日軍 덕수궁 난입, 환관 내세워 황제 양위식
‘러시아 공사관 피신(1896년)모습’은 잘못 알려진것

이 사진을 통해 그간 아관파천(1896년) 당시 고종이 평복에 갓을 쓰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을 때(사진 2) 일본군이 고종의 뒤를 쫓아 무력 시위하는 것(사진 3)으로 알려졌던 사진의 배경이 러시아공사관이 아니라 돈덕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따라서 시기도 1896년이 아니라 1907년 7월이며, 일제가 고종에게 황제 양위를 요구하며 궁궐 안마당까지 군사력을 동원, 무력 시위를 벌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이 사진은 서울대 이태진(李泰鎭·근대사) 교수가 일본 가쿠쇼인(學習院)대학에 소장된 ‘한국사진첩’(1910년 통감부 발행)에서 발견, 21일 본지에 공개했다.

돈덕전은 1900년대 초반에 지은 서양식 건물로 덕수궁 석조전 뒤편 현 포덕문 북동쪽에 있었다. 순종이 이곳에서 즉위(1907년)했으며 1920년대 초반에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사진에서 돈덕전이 확인됨에 따라 이 건물에 대한제국의 상징이었던 오얏꽃 무늬가 기둥과 난간에 새겨져 있는 것 등을 알 수 있게 됐다.

이태진 교수는 아관파천 때 사진으로 알려졌던 사진 2, 3의 날짜를 1907년 7월 22일로 추정했다. 당시 일제는 고종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1907년 6월)에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3인을 특사로 보내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을 호소하려 한 것을 빌미로 황제 퇴위를 강요했다. 7월 22일 새벽 덕수궁을 지키던 시위대 일부 병력이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지만 이완용 등 친일 대신들이 이를 먼저 감지해 일본군 1개 대대가 시위대를 진압하고 돈덕전 앞에서 고종의 황제 퇴위를 요구하는 무력 시위를 벌였다.

당시 사건을 현장 취재했던 오사카 매일신문 나라사키(楢崎桂園)기자는 ‘한국정미정변사(韓國丁未政變史)’라는 책에서, 이날(7월 22일) 일제는 황제 양위에 응하지 않는 고종과 황태자(순종)를 대신해 환관 2명을 대역(代役)으로 내세워 황제 양위식을 치렀다고 기록했다.

대한제국 군대도 그해 8월 1일 해산됐다. 무장 해제된 대한제국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 무장 항쟁을 벌였다.

조선일보 2005.3.22


           탑의 동북쪽에 있던 지하 비밀통로 입구 <참고사진>


                                                                          폭 45cm, 길이 20.3m <참고사진>




정동역사탐방 / 서울 (2018.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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