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테마투어 / 강화(江華)
■ 강화(江華) 역사테마 투어 [강화시티투어버스 이용]
주요 지점 위치도 <google 참고사진>
★ 강화시티투어버스
- 운영요일: 매주 토요일(1회), 사전 예약 필수
- 탑승장소: 검암역 1번출구 광장 앞 우측 시티투어 버스정류장 (10:00 출발),
강화여객 자동차터미널 맞은편 시티투어 버스정류장 (10:50)
- 운영코스: 역사테마 코스
★ 역사테마 코스
역사테마 코스도 <강화군자료>
▶ ① 검암역(黔岩驛)
<강화군자료>
09:33 / 검암역(黔岩驛)
검암역은 인천광역시 서구 검암동에 있는 공항철도와 한국철도공사, 그리고 인천교통공사의 역으로, 인천국제공항철도와 인천 도시철도 2호선이 운행됩니다.
강화 시티투어 버스정류장 <다음지도사진>
강화 시티투어 버스. 10:00시 출발[지정좌석은 없으며 탑승순서대로 자리를 잡습니다]
패찰 [버스 승차시 착용]
▶ ② 대한성공회 강화성당(大韓聖公會 江華聖堂) / 용흥궁
☞ 대한성공회 강화성당(大韓聖公會 江華聖堂)
<강화군 자료>
강화성당의 설립 과정
1893년 갑곶이나루터(성 니콜라 학당)에서 선교를 시작한 강화성당은 1897년 조선왕실 해군사관학교(통제영학당)의 영국인 교관(Callwell대위)으로 부터 관사와 대지 3000여평을 매입하여 성바우로회당이라 축복함으로서 선교본부를 강화 성내로 이전하였습니다. 이를 계기로 조마가(제3대주교; M.N.Trollope)신부와 김희준(초대 한인 사제)교우 등은 선교본부라는 이름에 걸맞는 성당을 건축하고, 이를 고요한(초대주교 C.J.Corfe)주교가 1900년 11월 15일 성베드로와 바우로의 성당으로 축성하였습니다. <강화성당 안내자료>
배의 형국을 한 구릉(丘陵) 위에 선 강화성당 <강화군사진자료>
강화읍 내 성공회(聖公會) 강화성당 터는 ‘구원의 방주’ 형국으로 한옥 건물은 자연스럽게 배의 선실이 됩니다. 개화기 때 성공회 초기 선교사들이 강화도에 한옥 성당을 세운 건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이오나(Iona) 섬처럼 신앙의 교두보로 삼으려는 뜻에서였습니다.
<다음백과 >
10:59 /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大韓聖公會江華聖堂)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424호)인 성공회 강화성당은 외부는 전통 한옥 양식으로 내부는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진 서구 기독교의 토착화 산물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성당이며 지금까지 매 주일 예배가 진행되고 있다.
외삼문(外三門)
언덕으로 오르는 서남쪽 초입, 뱃머리쯤 해당되는 곳에 한국 전통 건축양식의 외삼문인 솟을대문이 서 있습니다. 사찰의 일주문(一柱門)에 해당합니다. <다음백과>
복원된 철재 난간
이 철재 난간은 1943년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공출해갔던 것을 2010년 일본성공회 측에서 한일 양국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 봉헌했다고 합니다.
외삼문(外三門) 대문 중앙 <참고사진>
성공회강화성당(聖公會江華聖堂)이란 현판 밑에 태극문양을 배경으로 십자가가 그려져 있습니다.
내삼문(內三門) <참고사진>
외삼문을 지나면 내삼문이 나타납니다. 사찰의 천왕문(天王門)에 해당하는데 종루(鐘樓)를 겸했습니다.
내삼문(內三門) 교회종(敎會鐘)
내삼문의 교회종은 원래 1914년 영국에서 강화성당에 기증한 것이었으나, 1944년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가 정문 계단 철재 난간과 함께 징발해갔습니다. 현재의 종은 1989년 교우들의 봉헌으로 제작하였습니다. <안내자료>
당좌(撞座)에 새겨진 십자가 문양 <참고사진>
내삼문의 교회종(敎會鐘)은 사찰의 범종(梵鍾)과 흡사합니다. 당좌(撞座, 종을 치는 부위)의 돋을새김 십자가 문양이 다를 뿐입니다.
종에 새긴 켈트십자가 문양 <참고사진>
켈트십자가는 기원전 영국과 켈트지방에 쓰였던 고대십자가 문양인데 현대에서는 백인우월주의자를 이 상징물로 새기면서 정치적 색채를 띠었고 나치에서 이를 상징물로 여겨 일부 국가에서는 사용을 금지한 문양입니다. <참고사항>
본당(本堂):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제424호
본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 2층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한국성공회 제3대 주교 트롤럽(Mark Trollope)이 설계하고 감독했습니다. 백두산 원시림에서 적송을 뗏목으로 엮어 운반해와 지었습니다. 고려 때는 궁궐 터였고 1894년 한국 최초의 해군사관학교인 통제영 학당 군사교관 콜웰(W. H. Callwell) 대위의 관사가 있었던 땅입니다. <다음백과>
<참고사진>
본당 지붕 끝에 세워있는 십자가는 1984년 보수 당시 교체된 것이지만 성당 초창기의 십자가 모양과 같은 것입니다.
뒷쪽에서 보는 본당(本堂) <참고사진>
아치형 출입문
건물 측면 각 1개, 뒷면 2개소의 아치형 출입문 4개는 영국에서 가지고 왔습니다.
본당(本堂) <강화군사진>
<참고사진>
본당 2층 지붕 밑에는 ‘천주성전(天主聖殿)’ 현판이 걸려있으며, 정면 기둥에는 5개의 주련(柱聯)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유교 경전에서 따와 조합해낸 글귀입니다.
현관 기둥의 5매 주련(柱聯) <참고사진>
無始無終先作形聲眞主宰 [처음도 끝도 없으니 형태와 소리를 처음 지으신 분이 진정한 주재자시다]
(무시무종선작형성진주재)
宣仁宣義聿昭拯濟大權衡 [인을 선포하고 의를 선포하여 드디어 구원을 밝히시니 큰 저울이시다]
(선인선의율조증제대권형)
三位一體天主萬有之眞原 [삼위일체 하나님은 만물을 주관하시니 참 근본이되신다]
(삼위일체천주만유지진원)
神化主流有庶物同胞之樂 [하느님의 가르침이 두루 흐르는 것이 만물과 동포의 즐거움이로다]
(신화주류유서물동포지락)
福音宣播啓衆民永世之方 [복음이 널리전파되어 세상 사람들이 깨달으니 영생의 길을 가트치도다]
(복음선파계중민영생지방)
토요예배
본당(本堂) 내부 4m 이상의 높이를 가진 20개의 기둥, 대들보, 마루는 트롤로프 신부가 직접 신의주까지 가서 뗏목으로 운반한 백두산 적송입니다. 성당내부는 자연 채광을 받을 수 있도록 유리창이 중층구조 상단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바실리카 양식 내부구조
성당 안에는 중앙부가 높은 천장과 양쪽으로 날개가 달린 바실리카 양식으로 되어있습니다. 바실리카 양식이란 고대 로마의 법정 건물에서 유래한 특수한 건축 양식으로 연극, 재판, 토론 등을 위해 내부를 텅 비우고 기둥과 지붕으로만 꾸민 단순한 건물을 뜻합니다.
성당내부 <참고사진>
회중석(會衆席) 뒤쪽 중앙에는 1900년 건축 당시 강화도 지역의 화강암을 재료로 제작된 세례대(洗禮臺)가 있습니다. 세례대(洗禮臺)는 세례를 받는 곳으로 화강암으로 제작하였으며 바탕은 8각, 받침돌은 4각, 다섯기둥이 받치고 있습니다.
세례대(洗禮臺) 또는 성수대(聖水臺) <참고사진>
세례대(洗禮臺) 앞, 뒷면에는「수기, 세심, 거악, 작선(修己,洗心,去惡,作善: 자기를 수양하고 마음을 닦고 악을 멀리하며 선을 행하라)」 , 「중생지천(重生之泉: 거듭나는 샘물)」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어 교인이 세례 받을 때의 마음가짐을 표현하였으며, 이는 개신교의 한국 토착화 사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성소(至聖所)와 제단(祭檀) <참고사진>
성당 내부 정면 기둥 안쪽을 '지성소'라 부르고 기둥이 있는 중앙 부분을 '영광문'이라 부릅니다. 지성소 안에는 '제단'이 있습니다.
제단(祭檀) <참고사진>
만유진원(萬有眞原) 현판 <참고사진>
제단 위로 ‘만유진원(萬有眞原: 만물의 참된 근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하느님을 뜻합니다.
주지언어 족전지등(主之言語 足前之燈) <참고사진>
독서대 앞에 ‘주지언어 족전지등(主之言語 足前之燈)’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시편 119편 105절 “주님의 말씀은 내 발 앞의 등불이다.”고 다윗이 읊은 시입니다. <다음백과>
강화성당 교회기 <참고사진>
1900년 축성식 순행 당시에 사용했던 깃발로 강화성당 수호성인이신 베드로의 천국의 열쇠와 바우로의 성령의 검을 비단에 수놓아 제작 하였습니다. 양 옆으로 「행집성신지검(行執聖神之劍), 사이천국지약(賜爾天國之蘥)」이라는 구절을 세로로 수놓았습니다. “성령의 검, 곧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라.” (에베소서 6장 17절), “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리니” (마태복음 16장 19절)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입니다. <다음백과>
강화성당 수호성인 바우로상(좌) 과 베드로상(우) <참고사진>
사제관(司祭館)
사제관은 배의 뒤쪽 부분을 의미하는 고물 부위에 위치해 있습니다. 한옥으로 지어진 사제관은 성당과 함께 세워졌는데 1985년 화재로 소실되어 당시 재건축하였습니다. 희준교육관 신축이후 사무실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희준교육관 <참고사진>
사제관 뒷쪽에 위치하며 소성당, 사제관, 교육관, 식당 등이 있습니다.
강화성당 우측 담장에 설치된 출입문인 중문 <참고사진>
영국 알마(S. Alma) 수녀 기념비 <참고사진>
알마수녀는 1896년 우리나라에 와서 강화 온수리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다 1906년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은 여선교사였습니다.
강화성당 후문
주교기념비 및 성당축성백주년기념비 <참고사진>
3개의 주교기념비는 제1대 고요한(C.J.Corfe) 주교, 제2대 단아덕(A.B.Truner) 주교, 제3대 조마가(M.N.Trollope) 주교의 기념비입니다.
축성백주년기념비(祝聖百週年紀念碑) <참고사진>
강화성당 축성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배모양의 기단석 위에 비석을 세우고, 강화출신 김성수, 정철범 주교가 제막하였습니다.
보리수 나무
● 강화성당의 옛사진
1900년건축당시강화성당(해외엽서) <참고사진>
1906년 고려궁지 쪽에서 바라본 성당 모습 <참고사진>
1900년대 강화성당 및 강화읍 전경 <참고사진>
1906년 강화성당 <참고사진>
1900년 준공당시 성당 내부 모습 <참고사진>
☞ 용흥궁(龍興宮)
<강화군 자료>
용흥궁(龍興宮) 전경 <참고사진>
용흥궁(龍興宮)은 조선왕조 제25대 철종(哲宗, 1831∼1863년)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0호입니다. 강화 도령으로 알려진 철종은 어렸을 때 이름이 원범(元範)이고, 정조의 아우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입니다. 이 집은 노인들 사이에 ‘원범이네 집’으로 불리었습니다. 이 집은 본래 초가집이었으나 그가 왕위에 오르자 철종4년(1853)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기와집을 짓고 용흥궁(龍興宮)이라 하였는데, 왕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 뒤 1903년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습니다.
<참고사진>
조선왕조 제25대 왕 철종(哲宗) <참고사진>
조선 말기 안동 김씨의 세도가 한창일 때 24대 헌종이 자손을 남기지 못한 채 세상을 뜨자 대신들은 똑똑치 못한 왕족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여 정사를 손아귀에 쥐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1844년(헌종 10) 회평군(懷平君)의 옥사에 연루되어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농부로 살고 있던 이원범이 지목되었습니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 헌종과 원범 두 사람뿐이었는데 1849년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의 명으로 19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용흥궁관람안내도 <참고사진>
11:18 / 용흥궁(龍興宮) 입구 <참고사진>
<참고사진>
용흥궁 대문과 송덕비(頌德碑)
용흥궁 대문 <참고사진>
용흥궁 현판 <참고사진>
송덕비(頌德碑)
대문 옆에는 송덕비 2기가 있는데 하나는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새로지은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의 것이고, 하나는 정기세의 아들 정원용(鄭元容)의 것입니다. 정원용은 강화도령을 왕으로 모시는 봉영의식(奉迎儀式)을 맡은바 있습니다.
대문과 안채의 경계
안채 출입문
내전(內殿)/안채 [정면 7칸, 맞배지붕 ㄱ자형 건물로 건평은 90㎡] <참고사진>
외전(外殿)/사랑채 [정면 6칸, 측면 2칸, ㄱ자형 팔작지붕 건물로 건평 95㎡] <참고사진>
외전(外殿)/사랑채 <참고사진>
외전(外殿) <참고사진>
비각(碑閣) 출입문
철종잠저구기비각(哲宗潛邸舊基碑閣) <참고사진>
비각은 정방형으로 정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입니다.
哲宗朝潛邸舊基(철종조잠저구기) <참고사진>
철종 임금이 즉위하기 전에 거주하던 사저(私邸)임을 알리는 비(碑)
별전(別殿)/행랑채 <참고사진>
하인들이 머무는 작은 방과 마루 그리고 창고로 이루어져 있으며 행랑채와 붙여 외부로 출입하는 후문(後門)이 있습니다.
별전(別殿)/행랑채 뒷면과 후문(後門) <참고사진>
우물[사랑채 옆] <참고사진>
우물[안채 옆, 후문 앞] <참고사진>
▶ ③ 강화제적봉평화전망대
<강화군자료>
12:00 /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江華制赤峰平和展望臺)
'강화평화전망대'는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었던 양사면 철산리 민통선 북방지역 제적봉(制赤峰: 118m) 위에 지하1층 지상4층 규모로 2008년 9월 5일 개관하였습니다. 2011년 4월에는 '강화평화전망대'에서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 로 새단장 하였으며 남한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일명 758 OP라고 불리는 곳이기도 합니다.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 <참고사진>
강화 제적봉 평화전망대
평화전망대 관광안내도 <참고사진>
평화전망대 앞뜰 무궁화공원
제적봉(制赤峰) 비(碑)
<참고사진>
<참고사진>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와 애사 편강열 의사 추모비(愛史 片康烈 義士追慕碑) <참고사진>
평화전망대 앞뜰에는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와 의사 편강열(義士 片康烈)의 추모비(追慕碑)가 나란히 세워져있습니다. 원래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00여 명의 의병을 모아서 조정으로부터 초토사(招討使)로 임명된 이정암(李廷馣)이 1,000여 명의 일본군을 맞아 이곳에서 연안대첩(延安大捷)을 거두었습니다. 이를 기려 1608년 현재 북한지역인 황해도 연백군 모정리에 세웠는데, 실향민이 양사면 인화리(망향단)에 재건했고 이를 2009년 이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연성대첩비(延城大捷碑) 옆에는 구한말 일제에 항거하다가 순직한 애사 편강열 의사 추모비(愛史 片康烈 義士追慕碑)가 있습니다.
<참고사진>
시비(詩碑) <참고사진>
평화전망대 앞뜰에는 1974년 이곳에 근무하던 해병장교가 쓴 피한(彼恨) 시비가 있습니다.
상륙돌격장갑차
<참고사진>
☞ 1층
통일염원소(統一念願所)
이산가족의 한을 달래고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디지털나무를 설치하였으며 관광객의 소망을 이곳에 적어 뜻을 기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안내문>
☞ 2층
전망대(展望臺) <참고사진>
관광객이 북한땅과 주민생활 모습을 직접 조망할 수 있도록 고성능 망원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전시실(展示室) <참고사진>
전시실에는 국방체험과 북한의 도발,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 등의 자료와 한국전쟁과 관련한 영상시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강화의 전쟁사와 군사유적지 등을 설명 <참고사진>
북한의 개혁 개방과 남북한의 군사력 비교 등을 설명 <참고사진>
북한의 분야별 현황과 통일 이후 비전 제시 <참고사진>
끝나지 않은 전쟁 <참고사진>
☞ 3층
북한땅 조망실 <참고사진>
전망대에서 조망되는 북한 지형을 모형으로 제작하여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며 관광객에게 북한의 현황을 설명하는 공간입니다.
<참고사진>
전방 약2.3㎞ 해안을 건너 예성강이 흐르고, 좌측으로는 황해도 연안군 및 백천군으로 넓게 펼쳐진 연백평야가 있고 우측은 개풍군으로 북한주민의 생활모습과 선전용 위장마을, 개성송수신 탑, 송악산 등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남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한 2m 높이의 석축제방
전시관 내부 벽에 붙인 사진
☞ 옥외 시설
옥외전망대 <참고사진>
망배단(望拜壇)과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망배단(望拜壇) <참고사진>
북한에 고향을 둔 이산가족들이 고향을 바라보며 조상들에게 제를 올릴 수 있는 곳입니다.
망배단 뒤편 북한땅 조망
그리운 금강산 노래비
<참고사진>
옥외 조망
▶ ④ 교동 대룡시장
<강화군자료>
교동도 위치도 <참고자료>
교동도 안내도 <참고자료>
대룡시장 안내도 <참고자료>
13:15 / 어서오시겨 대룡시장
300m가 채 안되는 짧은 골목으로 6,70년대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교동도에서 가장 큰 시장입니다. "어서오시겨" 는 '어서오세요'의 강화도 사투리입니다.
대룡시장 안내도
청춘부라보
교동시장 안에 위치한 “청춘부라보”는 실향민 어르신들의 사랑방이자 마을과 고장을 위해 교동면을 소개하고 교동시장을 알려주는 안내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는 각종 나물을 판매하는 간이판매대가 있습니다.
제일다방
쌍화차 <참고사진>
황세환 시계방
찻집 수지큐~우
동산약방
오래된 약 진열장
제비헤어샵
▶ ⑤ 강화지석묘/역사박물관/자연사박물관
<강화군자료>
☞ 강화고인돌 유적
참고사항: 우리나라 고인돌의 3가지 종류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참고자료>
강화도에 분포한 고인돌의 특징 5가지
첫째, 고려산, 별립산, 봉천산 등 산지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하는데 특히 고려산 일대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합니다. 고려산을 중심으로 90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고, 가장 북쪽의 별립산과 봉천산 일대에 32기가 분포하는 등 강화의 북쪽에 집중적으로 분포합니다.
둘째, 여러 기의 고인돌이 한 곳에 떼를 이루고 있습니다. 10여 곳이 넘는 지역에 150여 기가 분포하는데 한 유적에 평균 14기에 가까운 고인돌이 군집을 이루어 분포합니다.
셋째, 산의 경사면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는데, 이는 지금의 평지인 곳이 당시에는 바닷가나 갯벌로 되어 있던 지역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정됩니다.
넷째, 탁자식 고인돌 비중이 가장 높습니다. 탁자식 고인돌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북한 지역보다도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다섯째, 성혈(星穴: 별자리 바위구멍)이 만들어져 있는 고인돌의 수가 적다는 점입니다. 총 150여 기의 고인돌 중 성혈이 만들어진 고인돌이 3기(삼거리고인돌 등)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혈은 대개 개석식(蓋石式)에서 발견되는데 강화는 대다수가 탁자식이기 때문에 그 수가 적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어 놓고 고임돌[支石] 없이 바로 덮개돌[上石]을 얹은 형태입니다.
세계유산 강화 부근리 고인돌군 탐방로 안내 <강화군자료>
☞ 강화지석묘(江華支石墓)
<강화군자료>
14:54 / 강화 부근리 지석묘(江華富近里支石墓)
강화 부근리 지석묘(江華富近里支石墓)
강화 부근리 지석묘는 지금까지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 가운데 대형에 속하는 것으로 받침돌[支石]은 두개의 긴 고임돌만 있는데 방향은 대략 남북입니다.
고인돌의 축조과정
고인돌의 기능
선사시대 장례절차와 고인돌의 축조
<강화군자료>
<강화군자료>
☞ 강화 역사/자연사 박물관
<강화군자료>
★ 강화역사박물관
강화역사 박물관
강화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선사시대부터 근 현대까지 강화도의 역사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전시, 보존, 연구하고 있고, 강화의 유물과 민족사를 볼 수 있는 전시장입니다
● 1F [로비, 고려강화, 조선.근대 강화, 삶과 민속품]
강화동종(江華銅鐘)/보물 제11-8호 [조선시대 숙종 때 승려 사인비구가 만든 청동범종]
용뉴(龍鈕) <참고사진>
동종 꼭대기에 두마리의 용이 몸이 서로 얽히고 얼굴을 좌우로 향하여 종을 메달기 위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명문(銘文) [종의 하단에 양각되어 있습니다] <참고사진>
강화동종 명문(銘文) <참고사진>
선두포축언시말비(船頭浦築堰始末碑) [조선시대, 선두포 제방공사(1706년) 과정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 <참고사진>
선두포축언시말비(船頭浦築堰始末碑)
어재연(魚在淵) 초상(肖像) [← 표]
어재연(魚在淵, 1823-1871)은 조선조 말기의 무장으로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로즈 함대로부터 광성보를 지켜냈고, 1871년 신미양요 때에도 미군에 맞서 광성보 수비의 임무를 맡았습니다. 하지만 우세한 무기를 지닌 미군에 패해 동생 어재순(魚在淳, 1826-1871)과 함께 미군의 총검에 찔려 전사했습니다. 미군은 전리품으로 군기(軍旗)를 빼앗은 뒤 돌아갔습니다.
어재연초상 <참고사진> 어재순 초상
신미양요(1871) 광성보 전투 모형
<문화재청자료>
신미양요(1871) 광성보 전투 모형
고려시대 강화 <참고사진>
<참고사진>
몽고의 침입로와 삼별초의 이동로
강화의 고려왕릉
● 2F [강화의 선시시대, 기증.기탁실, 강화의 열린 바닷길 이야기]
강화 오상리 고인돌군의 마을을 재현한 청동기 마을
마니산 참성대 모형
참성단은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입니다. 거친돌을 다듬어 하단은 하늘을 나타내는 원모양을, 상단은 땅을 나타내는 사각형으로 천원지방 사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매년 전국 체전 때가 되면 참성단에서 강화 칠선녀에 의해 채화된 성화가 불을 밝힙니다.
고인돌 축조과정 모형
청화백자
백자술동이(白磁犧樽/백자희준) [소 모양으로 조선 전기 공공 제사에서 봄과 여름철에 사용하던 제기의 일종]
1866년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이 측량한 강화부 지도
1871년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작성한 뱃길 지도
★ 강화자연사박물관
강화자연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은 지구 탄생에서 현재까지의 자연사에 대한 자료를 전시하고 있으며 특히 2009년 강화 불음도 해변에서 발견된 길이 14m의 향고래 골격 표본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향유고래 골격 표본 <참고사진>
1층 로비에는 2009년 1월 강화 서도면 볼음도에서 사체로 발견된 길이 14.5m, 무게 20톤 국내 최대 규모의 향유고래 골격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대형고래는 서해안에서 발견된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에 고래 생태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발견 당시 향유고래 <국립수산과학원자료>
⊙ 기획전시
<참고사진>
강화출신 故 박제원(1965~2005) 선생이 기증한 국내·외 1,500여점의 다양한 곤충표본을 입체적으로 전시하여 강화뿐만 아니라 국내·외 곤충까지 비교하며 관람할 수 있어 생태계의 가장 큰 분류군인 곤충의 다양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참고사진>
⊙ 상설전시
광물
자수정
메소사우르스 글로소프테리스
종유석
▶ ⑥ 강화 광성보 (江華 廣城堡)
<강화군자료>
광성보 안내판
강화 광성보 약도 <참고사진>
<참고자료>
16:24 / 강화 광성보 (江華 廣城堡)
▶ 광성돈대(廣城墩臺)
광성돈대입구
강화도는 고려 때 몽골항쟁부터 구한말의 신미양요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략요충지였습니다. 그런 이유로 고려 때는 해안을 따라 10리에 하나씩 진(鎭)을 두었으며, 진과 진 사이에는 보(堡)를 두고, 진과 보 사이에는 돈대(墩臺)를 설치하였습니다. 이후 조선 숙종 때에 이르러, 5개의 진과 7개의 보를 합친 12진보를 두어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그 아래에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였습니다.
광성돈대(廣城墩臺) <참고사진>
광성돈대는 광성보에 소속된 3개 돈대중 하나로서 숙종 5년(1679)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의 승군 8,000명과 어영군 4,300명이 40일만에 완공하였다고 합니다. 1977년 포좌 4개소와 포 3문이 복원 설치되었습니다. <안내문>
광성돈대에서 사용했던 대포, 소포, 불랑기 <참고사진>
대포(大砲)는 홍이포(紅夷砲)라고도 하며 사정거리 700m로서 포알은 화약의 폭발하는 힘으로 날아가나 포알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은 약하며, 병자호란 때에도 사용하였다고 전합니다. 소포(小砲)는 사정거리 300m로서 포알은 대포와 같은데, 대포는 조준이 안되나 소포는 조준이 됩니다. 작은 것은 불랑기(佛狼機)라 하며 프랑스군이 쓰던 것이라 합니다. <안내문>
▶ 안해루(按海樓)
안해루(按海樓)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광성나루(廣城鎭)에 있던 성보(城堡)입니다. 고려가 몽골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도로 천도 한 후에 돌과 흙을 섞어 쌓은 성입니다. 영조 21년(1745)에 성벽을 돌로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按海樓)'라 하였습니다. 안해루는 '바다를 순찰하는 망루' 즉 바다를 지킨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안해루(按海樓) 성곽 <참고사진>
안해루(按海樓)는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문의 누각과 성가퀴[女墻: 성 위의 낮은 담]가 파괴되었는데, 1976년 다시 복원하였습니다.
안해루(按海樓) 안쪽 풍경
▶ 우물[조선군사용]
조선시대 군사들이 이용했던 우물 <참고사진>
파고라 → 퍼골라(pergola)
파고라는 마당이나 평평한 지붕 위에다 나무를 가로와 세로로 얽어 세워서 등나무나 담쟁이, 덩굴장미 따위의 덩굴성 식물을 올려 그늘을 만든 정자, 테라스, 산책길 또는 그 시렁 구조물을 말합니다. 이 단어는 라틴어: pergula 페르굴라로 부터 이탈리아어 '뻬르골라(pergola)'를 거쳐 영어의 '퍼골라(pergola)'로 부르든 것을 일본에서 그들의 발음으로 '파고라(パ-ゴラ)'로 읽은 것을 우리나라에서도 그대로 쓰고 있는 단어인데 백과사전에는 영어식으로 읽은 '퍼골라(pergola)'로 나와 있습니다.
▶ 무명용사비(無名勇士碑)
수자기(帥字旗) 게양대, 무명용사비(無名勇士碑)와 쌍충비각(雙忠碑閣)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辛未洋擾殉國無名勇士碑)
비문 뒷면에 한글로 기록한 신미양요가 일어났던 당시 우리 수비군의 활약상 <참고사진>
신미양요 순국 무명 용사비
19세기 구미 열강은 우리 나라를 약소 국가로만 생각하고 선교사나 탐험대를 내세워 무단 입국을 기도하는가 하면 해군 함대를 출동시켜 문호 개방을 강요하다가 이에 불응하면 수도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의 연안 포구에 함포 사격을 가하기를 예사로 하였으니 병인, 신미 두 양요와 운양호 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력 도발을 받을 때마다 애국심에 불타는 강화도 수성군은 물론 이려니와 멀리는 강계포수 팔백여명까지도 참전하여 온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국난 극복에 앞장서 싸웠다.
그 모습이 얼마나 치열하고도 장절했던가!
가장 으뜸가는 싸움터를 찾아보면 서기 1871년(고종 8년) 4월 21일 미국 함대의 침공을 알았을 때 우리 장병들이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면서도 이 해안 요새인 광성진을 사수하기 위해 자주 독립의 민족 정기와 임전무퇴의 호국 정신을 유감없이 발휘한 신미양요의 전역을 손꼽게된다. 당시의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 제독은 5척 함대에 8문의 대포와 1천2백여명의 정예병력을 싣고 우리 강화 해협을 침입하여 이곳 광성진을 수륙 양면으로 기습 침공해 왔으며 우리 수성군은 어재연 장군의 지휘 통솔 아래 철통같이 단결하여 일보도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이곳을 사수하였다.
그 후 미국 해군의 전사 기록을 보면 이 광성진 전투를 가리켜 미국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48시간의 짧은 전쟁이었다고 전제하고 비록 승리했다고 할 수는 있을지라도 이를 자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뉘우쳤다.
이러했기에 뒷날의 한 미 교섭은 무력 행사를 배제하고 평화적인 상담으로 오늘에 이르는 평등의 우호 동맹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일찌기 몽고군에 대한 항전에서부터 번번히 이어오는 이곳 강화도 전적지에 깃들어 있는 호국 정신을 민족사에 길이 남기기 위해 이곳을 국방 사적으로 정화토록 지시하시고 서기 1977년 10월28일 그 준공 현지를 돌아보신 뒤 당시 장군의 묘비는 남아 있으니 용감히 분전 순사한 병졸들은 이름마저도 전하지 않는 것을 애석히 생각하시고 이곳에 신미양요 순국 무명 용사비를 세우도록 분부하셨다.
지나간 역사의 전사 기록은 지휘관을 중심으로 한 전황과 전공의 기록이며 병사들의 전공은 남아 전해오는 예가 드문 것을 상기할 때 박 정희 대통령의 이 분부는 참다운 민주적 평등 사상에서 우러난 배려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문화공보부와 경기도는 그 높으신 뜻을 받들어 이곳 광성진 전적지에 신미양요 순국 무명 용사비를 세워 후손들이 무명 용사의 살신 성인한 애국 충성을 영원토록 거울삼으며 또한 참다운 민주적 평등 사상을 이 역사의 교훈 속에서 함양하도록 그 사적을 비에 새겨 만대에 전한다.
一九七八년 九월 일
리 선근 짓고 김충현 쓰다
수자기(帥字旗) 게양식/2008년 <참고사진>
매년 음력4월24일에는 이곳 신미양요순국무명용사비(辛未洋擾殉國無名勇士碑) 제단에서 광성제(廣城祭)가 열립니다. 광성제는 1871년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 전투에서 장렬히 순절한 충장공 어재연 장군을 비롯한 어재순, 유풍노, 임기팽 등 무사 59인과 무명용사 296인의 넋을 기리기 위해 고종 때부터 행하는 제향으로 1970년부터는 어재연 장군의 후손들이 올리고 있습니다. 이 제향에 앞서 수자기(帥字旗) 게양대에 어재연 장군 수자기(帥字旗)를 게양합니다.
신미양요(辛未洋擾)
1866년(고종3)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나기 3개월전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가 평양 대동강을 올라와 통상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였습니다. 미국이 조선 사람들에게 총을 발사하는 등 사상자가 발생하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가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은 이 일을 빌미로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하였고 1871년 주청 특명전권공사인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에게 조선원정을 지시했다. 그들은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 대포 8문,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조선으로 향했습니다.
산화한 조선군 병사들 <참고사진>
4월 23일 미국 함대가 덕진진과 광성보를 점령했고, 어재연 장군 등이 이끄는 600여명의 조선군 수비대는 목숨을 걸고 미국 군대에 맞서 싸웠습니다. 어재연 장군과 휘하 병사들은 수륙양면작전을 전개하며 침입한 미국과 열약한 무기로 맞닥뜨렸습니다. 병력과 화력면에서 상대가 될 수 없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 수비군은 탄약이 바닥나자 돌을 던지며 저항하며 육박전에 돌입하고, 급기야 더 싸울 수 없게 된 병사들은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결하거나 바다로 뛰어들며 장렬한 최후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에 미국은 조선이 교섭에 응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결사항전을 준비했습니다. 군사행동을 감행하려던 미국 측은 무모함을 깨닫고 5월16일 함대를 이끌고 청으로 돌아갔으며, 이 결과 조선의 쇄국정책 및 서양 배척 풍조가 한층 강해졌습니다. <다음백과>
▶ 쌍충비각(雙忠碑閣)
쌍충비각(雙忠碑閣)과 무명용사비(無名勇士碑)
쌍충비각(雙忠碑閣)
쌍충비각(雙忠碑閣)에는 신미양요 때 어재연(魚在淵)장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의 순절을 기념하는 비와 함께 당시 순국한 59명 용사의 넋을 기리는 광성파수순절비(廣城把守殉節碑)가 있습니다.
현판 <참고사진>
쌍충비각(雙忠碑閣) 내 쌍충비(雙忠碑) <참고사진>
1871년 신미양요 때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중군 어재연 장군(1823-1871)과 그의 동생 어재순 외 59명의 순절비(殉節碑)입니다.
쌍충비(雙忠碑) <참고사진>
어재연, 어재순 순절비(殉節碑) <참고사진> 광성파수순절비( 廣城把守殉節碑)
오른쪽 비(碑)는 광성파수순절비( 廣城把守殉節碑)로 추모 시문이 있고, 뒷면에는 전사한 병사들의 명단이 있습니다. 왼쪽 비(碑)는 어재연과 어재순 순절비인데 어재연 형제가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순국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습니다.
<참고사진>
★ 어재연, 어재순 순절비(殉節碑)
진무중군어재연순절비
늠름한 충성과 용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 형제가 서로 뒤따라서 죽음보기를 돌아가는 것 같이했네
유학 어재순
형은 나라를 위해 죽고 아우는 형을 위해 죽으니 한 가문의 충성과 우애 백세토록 풍교의 울림이네
비장 이현학
막부의 빈려 군사로 그대 병기를 편 뒤로 위태로이 홀로 살지않으니 공의 이름이 회복되었네
어영초관 유풍로
가죽신과 바지로 규율을 따르고 분발하여 몸을 돌보지 않았으니 절제된 모습 어긋남이 없고 죽음 보기를 집으로 돌아가는것 같이 했네
★ 광성파수순절비( 廣城把守殉節碑)
본영천총 김현경
천총의 장이되어 죽음으로 절개를 드리웠고 하늘이 내려준 성품이요 땅의 신령으로 호걸스럽도다
본진별장 박치성
장애를 딛고서 지킴이 있어야지 구차히 산대서야 어찌하나 적에게 더럽혀지지 않았으니 나의 갈날 이미 길 있도다
▶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참고사진>
신미양요전망장병시랑(辛未洋擾戰亡將兵侍郞) 순절묘단(殉節墓壇) <참고사진>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 손돌목돈대(孫乭項墩臺)
손돌목돈대(孫乭項墩臺) <참고사진>
손돌목돈대를 일명 손석항돈대라고도 하며, 용두돈대에 못미쳐 구릉 정상부에 동그렇게 쌓은 돈대입니다. 강화 일대가 훤히 내려다 보여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안내문>
손돌목돈대 내부 <참고사진>
3개의 포좌(砲座)
입구 <참고사진>
입구
손돌목돈대에서 본 강화해협
손돌목의 험한 물살 <참고사진>
손돌목돈대의 이름의 유래가 된 ‘손돌목’은 예로부터 물살이 험하고 소용돌이가 잦아 조운선이 수시로 난파되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 용두돈대(龍頭墩臺)
용두돈대 <안내문>
<참고사진>
<참고사진>
1871년 6월1일 미군 탐측선을 향해 최초로 포격을 가한 돈대입니다.
용두돈대 중앙의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江華戰跡地淨化記念碑)와 홍이포 <참고사진>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江華戰跡地淨化記念碑)
앞면의 '강화전적지정화기념비' 글씨는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글씨이며, 뒷면에는 이은상 선생이 짓고, 김충현 선생이 글씨를 쓴 비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은상 지음. 김충현 씀 <참고사진>
홍이포(紅夷砲)
▶ 광성포대(廣城砲臺)
광성포대(廣城砲臺) <참고사진>
광성포대(廣城砲臺) 내경 <참고사진>
광성포대(廣城砲臺) 외경 <참고사진>
광성포대(廣城砲臺) 원경
광성포대 내려가는 길의 팔각정
역사테마투어 / 강화(江華)
(2018.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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