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경기도

수원화성/수원(2017)

케인스 2017. 9. 19. 20:08



수원화성(水原華城) / 수원(水原)

             



☞  경기도(京畿) 수원시(水原市) 수원화성(水原華城)

   

         

           수원화성(水原華城) 위치 <참고자료>

 

수원 화성(水原 華城)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와 장안구에 걸쳐 있는 길이 5.52킬로미터의 성곽으로 사적 제3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 소장 문화재로 팔달문(보물 제402호), 화서문(보물 제403호), 장안문, 서북공심돈(보물 제1710호), 방화수류정(보물 제1709호) 등이 있습니다. 또한 한국 성(城)의 구성 요소인 옹성, 성문, 암문, 적대, 포대, 봉수대 등을 모두 갖추어 한국 성곽 건축 기술을 집대성했다고 평가되고 있으며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상징


    수원화성(水原華城) 전도  <참고자료> 


수원화성은 조선왕조 제22대 왕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능침(陵寢)을 양주 배봉산(拜峰山: 서울시립대뒷산)에서 수원 화산[현 화성시]으로 천봉(遷奉)하고 화산 부근에 있던 읍치(邑治)를 수원 팔달산 아래 지금의 위치로 옮기면서 축성되었습니다. 수원화성은 정조의 효심이 축성의 근본이었으며 당파정치 근절과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치적 포부가 담겨 있었고 수도 남쪽의 국방요새로도 활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답사경로 <google참고사진>   


수원화성은 규장각 문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동서양의 기술서를 참고하여 만든 「성화주략(1793년)」을 지침서로 하여, 재상을 지낸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채제공(蔡濟恭)의 총괄아래 조심태(趙心泰, 1740~1799)의 지휘로 1794년 1월에 착공에 들어가 1796년 9월에 완공하였습니다.
수원화성 축성과 함께 부속시설물로 화성행궁, 사직단 등 많은 시설물을 건립하였으나 전란으로 소멸되고 화성행궁의 일부인 낙남헌(洛南軒)만 남아있었습니다. 수원화성은 축조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성곽의 일부가 파손, 손실되었으나 1975~1979년까지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의거하여 대부분 축성 당시 모습대로 보수,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수원화성의 성(城)의 둘레는 5,744m, 면적 130ha로 동쪽지형은 평지를 이루고 서쪽은 팔달산에 걸쳐 있는 평산성의 형태로 성벽은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우는 외축내탁(內托外築)의 축성술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성곽을 만들었습니다.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축성법, 현안(懸眼)과 누조(漏槽)의 고안, 거중기(擧重機)의 발명, 목재와 벽돌의 조화를 이룬 축성방법 등은 동양성곽 축성술의 결정체로서 희대의 수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수원화성은 축성시의 성곽이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북수문(화홍문)을 통해 흐르던 수원천이 현재에도 그대로 흐르고 있고, 팔달문과 장안문, 화성행궁과 창룡문을 잇는 가로망이 현재에도 도시 내부 가로망 구성의 주요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등 200년전 성의 골격이 그대로 현존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수원화성의 시설물은 문루 4, 수문 2, 공심돈(空心墩) 3, 장대 2, 노대 2, 포(鋪)루 5, 포(砲)루 5, 각루(角樓) 4, 암문 5, 봉돈 1, 적대 4, 치성 9, 은구 2 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일곽을 이루고 있었으나 이 중 수해와 전란으로 7개 시설물(수문 1, 공심돈 1, 암문 1, 적대 2, 은구 2)이 소멸되었습니다. 이중 남수문은 2012년 6월 복원 완료되었습니다. <이상 수원문화재단자료>




수원화성(水原華城) 시설물 둘러보기


 

팔달문(八達門) ~ 서삼치(西三雉) 구간



 팔달문(八達門) ~ 서삼치(西三雉) <google참고사진> 



[1] 팔달문(八達門)



                                        팔달문(八達門) 위치 []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팔달산 아래 경사가 평평해지는 지점과 남수문 사이 남쪽을 향하여 건립되었는데,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팔달문(八達門)


팔달문은 화성의 남쪽 대문으로서 남문(南門)이라 불리는데 건설 당시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기에 보물 제40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팔달문의 이름은 정조(正祖)가 정하였고  수원의 주산(主山)인 팔달산(八達山)에서 따왔습니다.


◈ 문루(門樓)

  

화성(華城)은 대문(大門) 4곳과 암문(暗門) 5곳으로 출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화성의 4대문 가운데 장안문(長安門)과 팔달문(八達門)은 각각 정북(正北)과 정남(正南)으로 세워졌지만, 창룡문(蒼龍門)은 정동(正東)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화서문(華西門)은 정서(正西)에서 북쪽으로 거의 북북서(北北西)를 향하여 장안문과 일직선상에 세워졌습니다. 그것은 화성이 팔달산 줄기를 타고 축조되어 서쪽으로 대문을 내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대문의 수비는 장용외영(壯勇外營)에서 담당하였는데 정조22년(1798)에 장용외영을 개편 장락위(長樂衛)를 설치하고 그 아래 5위(衛)를 두어 화성의 4대문 이름을 따서 창룡위, 팔달위, 화서위, 장안위라 하고 중앙에 신풍위를 두었으며, 화성의 정군(丁軍)으로 대(隊)를 편성하여 수비하도록 하였습니다.




             팔달문(八達門) 현판 <참고사진> 


팔달문 문루의 상층 어칸(御間)에는 큰 글씨로 ‘八達門’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이는 정조가 친히 이름을 짓고 정조(正祖)가 총애하던 당대의 명필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썼습니다.


  

팔달문(八達門)


팔달문 문루의 구조와 형식은 장안문(長安門)과 거의 같으며, 단일 시설물로는 화성 건설시에 가장 많은 비용이 들어갔습니다. 이 문은 화강암으로 된 석축에 홍예문을 내고, 그 위에 여장을 돌린 다음 2층 누각을 세웠는데 누각은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에 우진각지붕으로 웅대함과 위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문의 높이는 약 19.5m 이며 벽돌로 쌓은 반원형 옹성이 문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팔달문 석축에 새겨진 공사 참가자 이름 <참고사진>


특이한 것은 옹성(甕城) 안 성문(城門)의 우측 석축(石築)에는 석수(石手) 가선(嘉善) 김상득(金尙得) 등 성문을 축조한 관계자 이름과 인원 등을 돌에 새겨 넣어[刻石] 공사의 책임 소재를 밝혀 놓았습니다.

                                              팔달문(八達門)과 남옹성(南甕城)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 옹성(甕城)


화성(華城)의 4대문은 모두 옹성(甕城)을 갖추고 있습니다. 옹성은 성문(城門)을 방어하는 중요한 시설로서 성(城)의 모양이 반으로 쪼갠 항아리[甕]와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조선시대의 대부분 지방 읍성(邑城)이 평상시 거주하는 내성(內城)과 외성(外城)으로 주변에 산성(山城)을 별도로 갖추고 있기 때문에 옹성을 설치한 예는 서울의 동대문이나 전주 남문 등 몇 군데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화성에서는 북옹성(北甕城)과 남옹성(南甕城)에는 오성지(五星池 : 모양이 구유처럼 생겼고, 여기에 5개의 구멍을 뚫었다)를 설치하여 적이 문에 불을 질렀을 경우 물을 흘러 넣어 불을 끌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설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제기된 성곽의 문제점에 대한 연구와 성곽 건설 경험,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최신 과학 지식을 살려 보완한 결과였습니다.



팔달문(八達門)과 남옹성(南甕城)  <참고사진>  

팔달문의 옹성을 남옹성(南甕城) 이라고 하는데 남옹성의 홍예문(虹霓門)은 벽돌을 사용하였습니다. 옹성 위의 초루(譙樓)는 축성당시에는 없었으나 후에 세운 것입니다. 성문의 옹성에는 5개의 원형구멍을 낸 '오성지(五星池)'라는 시설을 만들어 적의 화공(火攻)시 물을 이용해서 끌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오성지(五星池)/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오성지는 성문이 불타지 않도록 대비하기 위해 성문 위에 누조(漏槽)를 만들고 적군들이 성문을 불태우려할 때 활을 쏘고 물을 흘려 보낼 수 있는 방어시설입니다. 5개의 구멍이 설치되어 있어 오성지(五星池)라고 합니다.



팔달문(八達門)과 남옹성(南甕城)  <참고사진>  


성벽의 외벽면에는 수직에 가깝게 뚫은 현안(眼) 12개를 설치하였는데 뜨거운 물이나 기름을 이용하여 성벽에 붙은 적을 공격하는 시설입니다. 옹성 위의 바깥쪽 좌우에는 요철(凹凸) 모양의 담장이 각각 9개 있습니다.


팔달문(八達門) <참고사진>


정조와 역대 국왕들은 능행시에 화성 행궁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팔달문을 통하여 현륭원을 다녀왔습니다. 정조21년(1797) 1월 행차시에 정조는 화성을 순행(巡幸)하며 팔달문에 올라 채제공의 시「등팔달문루(登八達門樓)」(『번암집』권 1) 2수에 화답하여 「화좌규팔달문루운(和左揆八達門樓韻)」(『화성성역의궤』권 2. 어제) 2수를 지어 문루에 걸어두게 하였습니다.



1915~35년 사이에 발행된 조선고적도보 11성부(朝鮮古跡圖譜十一 城部) 중 팔달문(八達門) <참고사진>


1905년 이전의 팔달문 <참고사진>  


팔달문(八達門) 바깥쪽 그림『화성성역의궤』<참고자료> 


                                                               팔달문(八達門) 안쪽 그림『화성성역의궤』<참고자료> 


                                                   팔달문(八達門) 바깥쪽 그림『정리의궤』<참고자료>                                                          


성(城)의 구조  <참고자료> 


  



■ 팔달문 관광안내소 앞



팔달문 관광안내소 앞에서 성벽을 따라 오르막길을 오릅니다.




[2] 남치(南雉)




                                        남치(南雉) 위치 [


     남치(南雉)는 팔달문(八達門)과 남포루(南砲樓)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포루에서 90보(步: 1보는 약 1.2m) 거리에 있습니다.


◈ 치성(雉城)


치성(雉城)이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도록 한 구조물로서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입니다. 치(雉)는 꿩으로서, 능히 자기 몸을 숨기고 주변을 잘 살펴보기 때문에 그 뜻과 모양을 따서 치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적이 쳐들어와 성벽에 붙어 기어오르거나 성벽을 허물려고 하면 치성에서 총이나 활을 쏘아 적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원래 치성은 그 위에 집이 없고 여장(女牆: 성가퀴)만 있는 것이 기본 제도로 옛법에는 50타(垜: 1타는 3∼4보)에 하나의 치를 둔다고 하였습니다. 지세(地勢)에 따라 성의 굽고 꺾인 곳이나 문이 있는 곳에 이르면 각종 시설물을 만들어 성곽을 보호하게 마련입니다.


『화성성역의궤』의 「화성전도」에 치(雉)로 표시된 곳은 8개소이지만, 용도(甬道)에 2개의 치가 더 설치되어 있습니다. 치성(雉城)의 높이는 성벽과 같고, 길이는 대체로 30척[1 자(尺)가 약 0.3m]쯤 되며 바깥쪽으로 현안 1개를 설치하여 적의 접근에 대비하였습니다. 공심돈, 포루(砲樓), 포루(舖樓), 적대(敵臺) 등은 치성을 응용한 시설물입니다.



남치(南雉) 가는 길


 남치(南雉)


‘치(雉)’란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시설입니다. 성벽 가까이에 접근하는 적군을 쉽게 공격하고 성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화성(華城)에는 10개의 치(雉)가 있습니다.


                               


  남치(南雉) 외부 <참고사진>


남치(南雉)는 치성 바깥면에 현안(眼) 1개를 내었으며 3면을 여장(女牆: 성가퀴)으로 만들었으며 각 면마다 총안(銃眼: 총구멍) 3개씩를 뚫었습니다.

남치(南雉) <참고사진>



                                  치성도(雉城圖)/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치성내,외도(雉城內外圖)/정리의궤 <참고자료>





[3] 남포루(南砲樓)



                           남포루(南砲樓) 위치 [


남포루(南砲樓)는 서남암문(西南暗門)에서 팔달문(八達門) 쪽으로 101보(步: 1보는 약 1.2m) 더 가서 팔달산의 남쪽 중턱에 설치된 포루(砲樓)로서 용도(甬道) 방면의 수비를 위하여 설치하였습니다.


◈ 포루(砲樓)


포루(砲樓)는 적이 성벽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화포(火砲)를 쏠 수 있도록 만든 누대(樓臺)로서 성벽에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雉城)의 발전된 형태입니다. 공심돈(空心墩)과 같이 가운데를 비우고 치성 위에 누각을 지어서 화포를 감추어 두고 위아래에서 한꺼번에 발사하여 성벽에 접근하는 적에게 피해를 주도록 만들었습니다.


 남포루(南砲樓)


남포루(南砲樓)는 정조20년(1796) 7월9일 준공되었으며, 성벽 아랫부분까지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으나 성안에서는 외관상 단층 누각만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남포루(南砲樓) 외부 <참고사진>


포루(砲樓)는 성벽에서 돌출시켜 벽돌을 이용 3중층으로 지은 누각 건물로 화포를 감추어두고 위, 아래에서 한꺼번에 공격할 수 있도록 한 성곽시설물 중에서 가장 중무장된 시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성 안에 5개의 포루(砲樓)가 있는데 그 구조는 똑 같습니다.



남포루(南砲樓) 외부 <참고사진>


남포루(南砲樓)는 성 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 있고 3층으로 지면(地面) 위에 혈석(穴石 : 대포발사를 위해 구멍을 뚫은 돌)을 전면 2개, 좌우 3개씩 놓았습니다. 그 위에 벽돌을 쌓았고 안쪽으로 판자를 잇대어 2층으로 구분하였으며 총혈(銃穴) 15개를 만들었습니다.


남포루(南砲樓) 누각 내 <참고사진>


남포루(南砲樓) 상부에 문루 3칸을 만들어 총안(銃眼)과 전안(箭眼)을 뚫어 놓았고 문루 바깥 면에는 짐승 그림을 그렸습니다. 포루의 한쪽 구석을 비워두고 덮개문을 달아 통로로 삼고 사다리를 이어서 포루 아래쪽 공간[坎內]으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허물어진 남포루(1950년대): 아래부터 대포혈석 3개, 총혈 6개, 총안 6개] <참고사진> 


 허물어진 남포루 <참고사진> 



  

 포루 내외도/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남포루 내부도/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4]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舖舍)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舖舍) 위치 [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舖舍)는 팔달산의 남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암문(西暗門)의 남쪽 367보(步: 1보는 약 1.2m) 거리에 있습니다.


◈ 암문(暗門)


암문(暗門)이란 성곽의 비밀통로로 화성에는 5개의 암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곽의 굴곡된 부분이나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만들어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사람과 가축, 수레, 양식, 무기 등의 군수 물자(軍需物資)를 성안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군사 시설물입니다.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둔 돌과 흙으로 암문을 메워 폐쇄토록 하였습니다.


포사(舖舍)


포사(舖舍)는 성밖의 위험을 성안으로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치성(雉城) 위에 있는 것은 포루(舖樓)라고 하고, 성안에 독립 건물로 만들었을 때는 포사(舖舍)라고 합니다. 포사는 각 방향의 경계를 맡은 군사가 성밖의 위급한 사정을 대포로 쏘아 알리면 포사에 있는 군사가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응답하여 성안의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신호를 보내는 시설물입니다.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舖舍)


서남암문(西南暗門)은 정조20년(1796) 8월6일 세웠습니다. 이 문은 용도(甬道)의 출입문으로 만들어졌으며, 문 위에는 안팎으로 낮은 여장(女牆:성가퀴)을 설치하였습니다. 화성(華城)의 5개 암문(暗門) 중에서 유일하게 포사(舖舍)를 설치하였습니다.


            서남암문(西南暗門)


서남암문(西南暗門)은 다른곳과는 다르게 누각이 있고 암문 밖으로는 서남각루로 이어지는 통로(용도)가 나있어 화성의 암문 중에서는 제일 중요한 위치에 있더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암문의 홍예 높이는 약 2.7m, 너비는 약 2m 정도입니다.


 서남포사(西南舖舍)  <참고사진>


서남포사(西南舖舍)는 유사시를 대비한 시설물인 용도(甬道)와 서남각루(西南角樓)가 적에게 공격당할 경우를 대비하여 만든 것으로 서남암문(西南暗門)과 함께 정조20년(1796) 8월6일 완성되었습니다. 건물은 넓이가 한 칸이고 군사가 항상 지키므로 온돌을 놓고 사면에 판문을 설치하였는데 판문 바깥으로는 태극 문양을 그렸습니다.



서남암문(西南暗門)과 서남포사(西南舖舍) / 용도(甬道) 쪽에서 본 모습 



서남암문(西南暗門)/일제강점기 때 <참고사진>


                                                                            서남암문(西南暗門) 내외도(內外圖)/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용도(甬道)



                                              용도(甬道) <google참고사진> 


                                    용도(甬道)는 양측에 담을 쌓은 길이란 뜻으로 팔달산 남쪽 능선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용도(甬道)


용도는 원래 적군의 눈에 띄지 않고 군량(軍糧)을 운반하기 위하여 만든 수송로로 사용하는 것인데, 화성의 경우는 지형적 여건 때문에 남쪽에만 설치 하였습니다. 화성은 팔달산 능선의 중간 지점에서 성벽을 꺾어 산 아래로 내려갔는데, 남쪽 능선에 오르면 팔달문을 비롯하여 창룡문과 화홍문 일대까지 한눈에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적군이 이 곳을 점령하면 화성의 허점을 적에게 그대로 드러내 놓게되기 때문에 팔달산 남쪽 능선까지 성곽을 연장하여 용도를 만든 것입니다. 따라서 화성의 용도는 군량미를 운반하는 것 못지 않게 중요한 전략적 시설물입니다.



 용도(甬道)


용도(甬道)에는 서남암문(西南暗門)을 이용하여 출입하였고 용도 끝에 화양루(華陽樓)를 두어 군사를 지휘하도록 하였습니다.


용도(甬道)


용도(甬道) 좌우로 치성(雉城)을 1개씩[용도동치(甬道東雉)와 용도서치(甬道西雉)] 설치하였습니다.


 용도(甬道)여장(女牆: 성가퀴)



                                       용도(甬道) / 정리의궤(整理儀軌) <참고자료>


                                용도(甬道)/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5] 용도동치(甬道東雉)와 용도서치(甬道西雉)



                                용도동치(甬道東雉)와 용도서치(甬道西雉) 위치 [


용도동치(甬道東雉)는 서남암문(西南暗門)에서 용도의 동쪽 84보(步: 1보는 약 1.2m) 거리에 설치하였고, 용도서치(甬道西雉)는 서남암문에서 용도의 서쪽 94보 거리에 설치하였습니다.


 용도동치(甬道東雉)



  용도동치(甬道東雉) 외부 <참고사진>


용도동치(甬道東雉)에는 치성(雉城) 외면에 현안(眼) 1개를 내었으며 3면을 여장(女牆: 성가퀴)으로 만들었으며 각 면마다 총안(銃眼: 총구멍)을 뚫었습니다.


 용도서치(甬道西雉)



  용도서치(甬道西雉) 외부  <참고사진>


용도서치(甬道西雉)는 용도동치(甬道東雉)와 마찬가지로 치성(雉城) 외면에 현안(眼) 1개를 내었으며 3면을 여장(女牆: 성가퀴)으로 만들었으며 각 면마다 총안(銃眼: 총구멍)을 뚫었습니다.




[6] 서남각루(甬道東雉)



                                서남각루(西南角樓) 위치 []


서남각루(西南角樓)는 팔달산 남쪽 능선에 설치한 용도(甬道)의 남쪽 끝인 서남암문 밖 170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의 높은 지점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전략적 요충지로 전망이 매우 좋습니다.


◈ 각루(角樓) 


각루는 비상시에 각 방면의 군사 지휘소 역할을 하는 곳으로 성곽의 요소 요소에 위치하여 성 주변과 밖의 원거리까지 조망할 수 있는 시설로 화성(華城)에는 모두 4개소가 있습니다.



서남각루(西南角樓) / 화양루(華陽樓)


화성(華城)의 지형적 여건은 팔달산(八達山) 정상에서 남쪽으로 뻗은 능선이 높이 솟아올라 사방(四方)을 굽어보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이 곳을 적군이 점거한다면 화성 전체가 적에게 그대로 드러나게 됩니다. 따라서 이 각루(角樓)는 비상시를 대비해 축조한 용도치(甬道雉)의 군사들을 지휘하는 각루로 설치되었습니다.




 서남각루(西南角樓)/ 화양루(華陽樓)


                   서남각루 현판


서남각루의 편액에는 화양루(華陽樓)라고 하였는데 ‘화(華)’자는 화성을 뜻하고 ‘양(陽)’자는 산의 남쪽을 뜻하는 글자로 화성의 남쪽에 세운 문루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서남각루(西南角樓)/ 화양루(華陽樓) 뒷면  <참고사진>


정조20년(1796) 4월16일 공사를 시작하여 7월20일 건물이 완성되었는데 건물은 6칸으로 바닥이 2부분으로 나뉘어져서 남쪽 2칸은 판자를 깔고 난간을 둘러쳤으며, 북쪽 4칸에는 전돌을 깔아 상·하(上下)를 구분하였습니다.


서남각루(西南角樓)/ 화양루(華陽樓) <참고사진>


지휘관이 높은 곳에 앉아 군사들을 지휘하고 아래쪽은 부하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명령을 받을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남각루(西南角樓)·화양루(華陽樓) / 화성성역의궤 <참고사진>


                                      서남각루(西南角樓) 주위 성벽구조


 서남일치(西南一雉)


서남이치(西南二雉) <참고사진>



■ 3.1 독립운동기념탑 및 대한민국독립기념비



3.1 독립운동기념탑 및 대한민국독립기념비


 3.1 독립운동기념탑




대한민국독립기념비





[7] 서삼치(西三)



                                        서삼치(西三雉)위치 []


서삼치(西三雉)는 서장대(西將臺)에서 남쪽으로 서포루(西포樓)와 서남암문(西南暗門) 사이에 있습니다. 서포루에서 남쪽으로 140보(步 : 1보는 약 1.2m) 지점에 있으며 여장(女牆:성가퀴)의 두 끝이 성안으로 약간 들어갔습니다.


 서삼치(西三雉)




 서삼치(西三雉) 외부 <참고사진>


서삼치(西三雉)는 치성 외면의 벽체의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하여 현안 1개를 내었으며 각 면마다 방안(方眼: 네모난 총구멍) 3개씩을 뚫어 놓았습니다.



팔달공원 출입구 ~ 서이치(西二雉) 구간



                                                  팔달공원 출입구 ~ 서이 <google참고사진> 




■ 팔달공원 출입구


 이 곳을 나서면 팔달공원으로 갈 수 있습니다.


공원 쪽에서 본 출입구 <참고사진>



성신사(城神祠)




성신사(城神祠)



성신사(城神祠)는『화성성역의궤』에 팔달산 서남쪽 기슭의 병풍바위 위에 동향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정조20년(1796) 봄 정조는 화성의 성역이 완성되는대로 성신(城神: 성을 지켜주는 신)의 사당을 먼저 세우라고 명하여 동년 7월11일에 공사를 시작하여 9월1일 준공되었습니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2칸 규모의 맞배지붕 양식으로 전면(前面)에 삼문(三門)을 세웠습니다.



성신사(城神祠)/2009.10 복원


성신사는 화성 성역을 마무리 짓고 화성이 영원하게 보전될 것을 기원한 사당으로서 화성의 무사태평(無事泰平)을 기원한 기념 건축물입니다. 1796년 화성 성역의 준공을 축하하는 낙성연을 낙남헌에서 행하기 전에 먼저 이 사당에서 제사를 올렸습니다.






성신사(城神祠)의 삼문(三門)


삼문(三門)의 좌우에는 5칸행각을 붙였는데, 남쪽 2칸은 안쪽을 향하여 전사청(典祀廳 : 제향의 물건을 밭아 보는 관아)으로 쓰였고, 북쪽 3칸은 바깥쪽을 향하여 재실(齋室)로 사용하였습니다.


                                 성신사(城神祠) 현판 <참고사진>


                        중앙칸에 차려진 교의(交椅), 제상(祭床), 향탁(香卓)


성신사가 완공되었다는 보고를 받은 정조는 화성 낙성연을 위한 행차 전에 길일을 가려 위패를 받들게 하고 제문(祭文)은 직접 지을 만큼 대단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9월18일에는 헌관(獻官)은 화성유수, 전사관 겸 대축(典祀官兼大祝)은 화성판관(華城判官)이 담당하도록 명하였으며, 9월19일 신주(神主)를 사당 안에 봉안할 때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하고, 매년 봄가을 제향 때 향축과 각종 제수용품(祭需用品)을 규정에 의하여 내려보내도록 하였습니다.


                                                                   위패(位牌): 화성성신신위(華城城神神位)


                                             

성신사도(城神祠圖), 좌측의 그림은 화성성역의궤, 우측은 정리의궤: 삼문의 지붕형태가 다릅니다. <참고자료>


                                              



[8] 서포루(西舖樓)



                                        서포루(西舖樓) 위치 []


서포루(西舖樓)는 서장대(西將臺) 아래에 있는 서암문(西暗門)에서 남쪽으로 126보(步 : 1보는 약 1.2m)의 거리에 있습니다.


◈ 포루(舖樓)


치성(雉城)의 위에 지은 집을 포루(舖樓)라 합니다. 군사들을 숨겨두고 적군이 보지 못하게 하는 시설물입니다. 포루(砲樓)와 비슷한 용도(用度)를 가지고 있으나, 형태상 성체에서 툭 튀어나온 부분을 석재(石材)로 만든 것이 다릅니다.





서포루(西舖樓) <참고사진>


서포루(西舖樓)는 서암문(西暗門)이 적에게 발각되어 공격받는 것에 대비하여 설치하였는데 정조20년(1796) 8월18일에 준공되었으며, 건립 방식은 동북포루(東北舖樓) 와 같습니다.






서포루(西舖樓) <참고사진>


서포루(西舖樓)의 누각(樓閣)에는 판문(板門)이 설치되어 있고 전안(箭眼)을 두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포루(西舖樓) 외부 <참고사진>



서포루(西舖樓)는 성밖으로 약7m 돌출되어 있으며 치성(雉城) 외면의 벽체의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하여 현안(懸眼) 1개를 내었으며 각 면 마다 여러개의 총안(銃眼: 총구멍)을 뚫었습니다.




세계문화유산 화성(世界文化遺産 華城) 표지석



 세계문화유산 화성(世界文化遺産 華城) 기념표석



기념표석(紀念標石) 뒷면  <참고사진>




■ 효원(孝園)의 종(鐘)



효원의 종각


                                             

                                              효원(孝園)의 종(鐘)  <참고사진>






[9] 서암문(西暗門)



                                        서암문(西暗門) 위치 []


       서암문(西暗門)은 서장대(西將臺)의 남쪽 44보(步 : 1보는 약 1.2m)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암문(西暗門)은  성벽이 팔달산 능선을 따라 이 부근에서 약간 볼록하게 휘어져있기 때문에 문의 방향을 북쪽으로 향하게 하여 성벽과 직각을 이루고 있습니다.


 서암문(西暗門)


서암문(西暗門)은 정조20년(1796) 6월18일 완공하였습니다. 서암문의 위치는 아래쪽이고, 성안의 통로는 위쪽으로 나 있어서 계단을 만들어 출입하게 하였습니다.



                         서암문(西暗門): 성안 모습


                                  서암문(西暗門): 성밖 모습


                                  문의 안팎으로 낮은 여장(女牆: 성가퀴)을 설치하였습니다.


   서암문(西暗門): 성밖 모습 <참고사진>


성문이 바깥쪽을 향하지 않고 옆으로 틀어져 있어 밖에서 구별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렇게 자연 지형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암문을 설치했기 때문에 암문에 가까이 접근하기 전에는 문이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입니다.



          서암문(西暗門) 내,외도/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10] 서장대(西將臺)/화성장대(華城將臺)



                                         서장대(西將臺)/화성장대(華城將臺) 위치 []


화성장대(華城將臺)는 팔달산(八達山)의 정상에 위치하며, 화성(華城)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서장대(西將臺)라고도 불렀습니다.


◈ 장대(將臺)


장대(將臺)는 장수가 올라서서 군사를 지휘하는 곳으로 화성에는 서장대와 동장대 두 곳이 설치되었습니다. 화성은 남북이 짧고 동서가 길기 때문에 동쪽과 서쪽에 각각 1곳 씩의 장대를 두어 서로 호응하며 군사를 지휘 감독 하도록 하였습니다.



서장대(西將臺)/화성장대(華城將臺)


정조18년(1794) 1월 행차시에 정조는 팔달산에 올라 사방을 두루 살핀 다음 “이 곳은 산꼭대기의 가장 높은 곳을 골라잡았으니 먼 곳을 살피기에 편리하다. 기세가 웅장하고 탁트였으니 하늘과 땅이 만들어낸 장대(將臺)라고 이를 만하다.” 고 평가하고 장대터로 삼았습니다. 정조18년(1794) 8월11일 터닦기 공사를 시작하여 9월29일 장대가 완성되었습니다.



                         서장대(西將臺) 현판 [정조(正祖) 친필: 화성장대(華城將臺)]  <참고사진>



서장대(西將臺)/화성장대(華城將臺)


정조대의 문신(文臣)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이 지었다는 상량문에 “화성의 지세는 진실로 우리 나라의 관문이자 요새이다. 서장대에서 사방(四方)을 둘러보면 화성의 허실을 한 눈에 살필 수 있다. 팔달산을 둘러싸고 있는 백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하고, 앉은 자리에서 사변(事變)을 제어할 만하 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화성 성역을 일으키면서 이 자리에 돌로 평평하게 대(臺)를 쌓고 그 위에 2층 장대를 세운 것입니다. 2층으로 오르면 사방 100리가 보여 성안에 있는 군사를 한눈에 보고 지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서장대(西將臺)/화성장대(華城將臺)  <참고사진>


정조19년(1795) 을묘원행시에 정조는 현륭원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훈련[城操]과 야간 훈련[演炬]을 시행하였습니다. 이 훈련은 화성의 방어 체제를 점검하고, 일원적인 지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으로서‘화성성조주조식(華城城操晝操式)’과 ‘야조식(夜操式)’의 훈련 규정에 따라 진행되었습니다. 성조(城操)란 성을 지키는데 필요한 각종 군사훈련을 뜻합니다. 주조(晝操)는 주간훈련을 말하고 야조(夜操)는 야간훈련을 말합니다.


서장대(西將臺)/화성장대(華城將臺)


화성장대(華城將臺)의 넓이는 98척, 길이는 42척이고 좌우에 크고 외간(桅杆: 붉은 깃대) 한 쌍을 세워 군사들에게 각종 신호를 보냈습니다. 장대 뒤로는 노대(弩臺)를 설치하여 장대를 수비하는 역할을 하였고 노대 옆에는 군무소(軍務所)가 있었습니다.


               군무소(軍務所) <참고자료>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군무소(軍務所)는 이른바 군무의 필요에 응하는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서노대(西弩臺)와 화성장대(華城將臺) 중간 북쪽에 위치하였던 이 건물은 화성장대 뒤에 건립한 후당(後堂)으로 전면 3칸(5, 58m) 측면 1칸(1, 86m)에 남측면에서 반칸퇴(半間退)를 달고 북측에서 전(塼)돌 담장을 둘렸고 동측 담 끝에 홍예문을 설치하였습니다. 1975년 복원공사에서 지표(地表)가 교란(攪亂)되고 주춧돌도 없어 복원에서 제외되어 미복원 상태입니다.


외간(桅杆)


외간(桅杆)은 붉은 색을 칠한 큰 깃대로 원래는 배에 돛을 다는 큰 돛대를 뜻합니다. 화성(華城)에서는 서장대(西將臺) 앞에 좌우로 한 쌍의 외간을 세웠습니다. 서장대는 화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장대로서 자주 군사훈련이 열렸으며, 이러한 행사를 할 때 외간에 깃발을 겁니다. 외간의 장대에 붉은 색으로 단청을 하기 때문에 대홍외간(大紅桅杆)이라고도 불렀으며, 간단히 기간(旗竿)이라고도 합니다. 외간은 아래 부분에 설치된 두 개의 돌기둥에 의해 지지되는데 이 돌기둥을 기죽석(旗竹石)이라고 하며 차음이기 때문에 읽을 때는 깃대석으로 읽습니다. 깃대 상부에는 도르래가 달려있어 기를 걸고 내리기 수월하도록 했습니다.


                          

높이 8m 외간(桅杆)/왼쪽 사진,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1800년 제작)에 수록된 외간(桅杆)/오른쪽 그림


화성에는 동장대와 서장대에 각각 한 쌍(좌우)의 깃대가 있습니다, 일반 깃대와 달리 도르래를 이용한 것이 특징인데 왕이 군사훈련을 할 때 시열(試閱)이라는 글자를 썻습니다. 성안 사람들은 외간 끝에 걸린 깃발을 보고 군사훈련이나 특별한 행사 등 서장대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 수 있었습니다.


          외간(桅杆) <참고사진>


예를들면 깃대에 황색기가 달려 있으면 군의 '지휘관'이 이곳에 있다는 표시이고, 백색기는 병권을 상징하는 깃발로 '병조판서'가 있다는 표시고, 임금이 있을땐 '용이 그려진 깃발이 게양된다고 합니다.

 

연거도(演炬圖)  <참고사진>


『정조대왕능행도』중에 「서장대성조도」와 『화성성역의궤』에「연거도(演炬圖)」가 남아 있어 당시의 훈련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연거도(演炬圖)의 연거(演炬)란 '횃불을 밝힌다' 라는 뜻으로 야간군사 훈련 관련 판화그림입니다.  그림 좌측 상단에 불꽃놀이처럼 하늘에 그려진 것은 조선시대 종이 미사일이라 불리는 신기전의 발사 모습입니다.


 서장대에서 바라본 화성행궁과 광장


정조는 군사 훈련 사열을 마치고 「화성장대친열성조유시제우미상(華城將臺親閱城操有詩題于楣上)」이란 아래의 시(詩)를 지어 문루에 걸어 두게 하였습니다.


華城將臺。親閱城操。有詩題于楣上。

[화성(華城)의 장대(將臺)에서 성안의 군사 훈련을 친히 사열하고 시를 지어 문미(門楣) 위에 제(題)하다]

 
拱護斯爲重 / 나라를 지켜 보호함이 중한 것이라

經營不費勞 / 경영엔 노력을 허비하지 않는다오

城從平地迥 / 성은 평지로부터 아득히 멀고

臺倚遠天高 / 대는 먼 하늘 의지해 높기도 하여라

萬垛䂓模壯 / 오만 방패들은 규모가 장대하고

三軍意氣豪 / 삼군은 의기가 대단히 호쾌하도다

大風歌一奏 / 대풍가 한 곡조를 연주하고 나니

紅日在鱗袍 / 붉은 아침 햇살이 인포에 비추이누나



 

서장대(西將臺).화성장대(華城將臺) / 일제강점기  <참고사진>



       

   서장대도(西將臺圖) / 화성성역의궤 및 정리의궤 <참고사진>





[11] 서노대(西弩臺)



                                        서노대(西弩臺)위치 []


                                        서노대(西弩臺)는 팔달산(八達山) 정상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 노대(弩臺)  


노대(弩臺)란 누각이 없이 전돌을 쌓아 높은 대(臺)를 만든 시설물로 적의 공격을 항상 감시해서 대와 성 전체에 오방색 기로 신호를 하며 적이 근접했을 때 노(弩: 쇠뇌)를 쏠 수 있도록 만든 진지입니다. 노대(弩臺)에는 노수(弩手: 노를 쏘는 사람)를 매복시켜야 하므로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설치합니다.


       노(弩) <수원화성박물관>


노(弩)는 활에서 발전된 무기로 활을 활틀에 끼우고 활틀 끝에 구멍을 파서 발사 장치를 설치한 것으로 활보다 훨씬 멀리 나가고 여러 다발을 한꺼번에 연속으로 쏠 수 있는 강력한 무기로서 서양의 석궁(石弓)과 비슷합니다.



서노대(西弩臺)


서노대(西弩臺)는 팔달산 정상에 위치하여 사방의 시야가 터져 있어 적의 내습(來襲)을 항상 감시할 수 있고, 서장대(西將臺).를 곁에서 지키는 주요 방위 시설로 정조19년(1795) 2월28일 완공되었습니다.



 서노대(西弩臺)

서노대(西弩臺)는 서장대 옆에 8각형으로 약 3m 높이로 기와 벽돌로 쌓고 그 위에 여장을 설치하였으며 아래에서 위로 약간 수축된 8각뿔 기둥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노대 위에는 여장(女牆)을 동쪽을 제외한 7면에 설치하였습니다. 서장대(西將臺) 쪽으로 장대석(長臺石)을 쌓아 계단을 설치하였습니다.




서노대(西弩臺) 정상부(頂上部)  <참고사진>

서노대(西弩臺)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한가운데에 다시 1척 높이의 사각형 대(臺)를 놓았습니다. 이곳에 오르면 성밖의 서쪽이 한눈에 들어 오며 적으로부터 군사지휘소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노대(西弩臺)/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12] 서이치(西二雉)




                                        서이치(西二雉)위치 []


    서이치(西二雉)는 서포루(西砲樓)와 서장대(西將臺) 사이에 있으며 서포루에서 140보(步: 1보는 약 1.2m) 지점에 세웠습니다.



 서이치(西二雉)




     서이치(西二雉) 외부 <참고사진>


     서이치(西二雉)에는 치성(雉城) 외면에 현안(懸眼) 1개를 내었습니다.




● 서포루(西砲樓) ~ 북서적대(北西敵臺) 구간



    서포루 ~ 북서적 <google참고사진> 



[13] 서포루(西砲樓)



                                        서포루(西砲樓) 위치 []


  서포루(西砲樓)는 서북각루(西北角樓)에서 서장대(西將臺) 방향으로 197보(步: 1보는 약 1.2m) 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포루(西砲樓)


 서포루(西砲樓)


서포루(西砲樓)는 정조20년(1796) 5월30일 준공되었습니다. 이 곳만 벽돌로 계단을 만들었고 다른 포루보다 규모가 약간 작지만 세부 구조는 다른 포루와 같습니다.



서포루(西砲樓) 외부 <참고사진>


서포루(西砲樓)는 화성의 최고 군사 지휘소인 서장대(西將臺)와는 근거리에 위치한 까닭으로 다른 포루(砲樓) 중에서 가장 중무장(重武裝)한 포루입니다.


 포루(砲樓) 내외도 및 내부도 <참고사진>





■ 정조대왕(正祖大王) 동상(銅像)



                            정조대왕동상  위치 []


 수원화성의 서포루(西砲樓)와 화성행궁(華城行宮) 사이에 자리잡았으며, 팔달산(八達山) 북쪽 중턱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정조대왕 동상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축조한 정조대왕의 조형물을 21세기 문화의 시대에 걸맞는 수원의 상징물로 건립하여 후세의 영원한 산 교육장이 되도록 하기 위해 1999년 동상건립 계획을 수립하여 2003년 6월에 완공하였습니다. <수원시자료>



 정조대왕 동상



                        정조대왕 동상



[14] 서일치(西一雉)



                                        서일치(西一雉) 위치 []


서일치(西一雉)는 서북각루(西北角樓)와 서포루(西砲樓) 사이에 있으며 서북각루로부터 70보(步: 1보는 약 1.2m)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일치(西一雉)



            서일치(西一雉) 외부 <참고사진>


           서일치(西一雉)에는 치성 외면 벽체의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했으며 현안(懸眼) 1개를 내었습니다.




[15] 서북각루(西北角樓)



                                        서북각루(西北角樓) 위치 []


     서북각루(西北角樓)는 서장대(西將臺)와 화서문(華西門)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팔달산 북쪽 중턱의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서북각루(西北角樓)


서북각루는 정조20년(1796) 7월9일 건물이 세워졌으며 숙지산이 마주 보이는 비교적 높은 자리에서 화서문(華西門) 일대의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만들었습니다.



서북각루(西北角樓)  <참고사진>


서북각루(西北角樓) 건물은 산기슭이 구부러진 대로 산등성이의 반을 깎아내고 세웠으며 원래 문루 사방에 판문을 설치하였고 바깥 면에는 화살을 쏘는 구멍을 뚫어 놓았고 안쪽 면에는 태극(太極) 문양을 그렸으며, 서남쪽 한 칸을 터서 계단을 설치하였습니다.

서북각루(西北角樓)  <참고사진>


동남 1칸은 누각 청판(廳板) 아래를 벽돌로 담을 둘러치고 온돌을 설치하여 수직(守直)하는 군사가 숙식하며 이곳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서북각루(西北角樓) 외부 <참고사진>


     서북각루(西北角樓)는 치성 바깥 면으로는 현안 2개, 총안 11개를 내었고, 삼면에 여장(女牆: 성가퀴)을 둘렀습니다.



   

    서북각루(西北角樓) / 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서북각루(西北角樓) / 정리의궤(整理儀軌)  <참고자료>





■ 거중기(擧重器) 모형



 거중기(擧重器) 모형


 수원화성 축성시에 거중기, 녹로 등 신기재를 특수하게 고안, 사용하여 장대한 석재 등을 옮기며 쌓는데 이용하였습니다.



 거중기(擧重器) 모형  <참고사진>



    

    거중기(擧重器)와 분해도(分解圖) / 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거중기(擧重器)는 정조(正祖)가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책을 참고하여 정조 때의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고안하였습니다. 정약용은 수원화성을 건설할 때 이 거중기를 사용하여 공사기간 단축, 인력동원 감축이라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6] 화서문(華西門)



                                        화서문(華西門) 위치 []


화서문(華西門)은 화성의 서쪽 대문으로서 남양만,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로서 화성 행궁에서 북북서쪽으로 460보(步: 1보는 약 1.2m)쯤 떨어진 거리에 정서에서 북쪽으로 70도 정도 틀어서 자리잡고 있습니다.


 화서문(華西門)


화서문(華西門)은 그 원형을 잘 유지하여 현재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화서문의 상량문에는 “새로운 고을을 만들고 터를 다지니 그 체세가 동도의 낙양과 맞먹은 듯하고, 미인을 바라본다는 뜻을 땄으니 서화(西華)라는 칭호를 절충하였구나.”라고 했는데, 서화는 곧 낙양성의 서쪽 대문으로 ‘서(西)’자와 ‘화(華)’자의 순서를 바꾸어 ‘화서문(華西門)’이라 이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서문(華西門) 현판  <참고사진>


    편액은 화성 성역의 총책임자로서 총리대신이었던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썼습니다.


 화서문(華西門)


화서문(華西門)은 석축으로 된 무지개[홍예] 문위에 단층 문루(門樓)가 세워져 있으며 사방은 여장(女牆)으로 둘러져 있습니다. 홍예(虹霓)나 문루(門樓)를 만든 방식은 창룡문(蒼龍門)과 같으나 좌우의 석벽이 사각으로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화서문 석축에 새겨진 공사 참가자 이름 <참고사진>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화서문(華西門)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화서문(華西門) 홍예  <참고사진>  


화서문(華西門)과 서옹성(西甕城)  <참고사진>


서옹성(西甕城)은 화서문(華西門)의 옹성입니다. 정조20년(1796) 8월8일 공사를 시작하여 동년(同年) 8월16일에 완성되었습니다. 창룡문(蒼龍門)의 동옹성(東甕城)과 같이 좌측이 끊어져 있으며 다른 구조도 거의 같습니다.



화서문(華西門)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옹성(甕城)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옹성 위에는 장안문(長安門)이나 팔달문(八達門)과 같이 용도(甬道)가 문루 기부에서 통할 수 있게 하고, 그 양면에 여장(女墻: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쌓아 외부로 근총안(近銃眼), 원총안(遠銃眼), 현안(懸眼)을 뚫어 철저한 방어가 되도록 하였습니다.



 화서문(華西門)


누각(樓閣)은 평면으로 보아 정면 3칸, 측면 2칸(60.83㎡)의 단층건물이며, 지붕은 비교적 기울기가 낮게 꾸며진 팔작지붕, 겹처마집입니다. 이 건물은 1975년 화성의 중수공사 때 옹성과 함께 보수되었습니다. 


화서문(華西門) 수문청(守門廳) / 정리의궤  <참고자료>


수문청(守門廳) 3칸이 문 안 남쪽 가장자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누각(樓閣) 내부 바닥  <참고사진>


누각 내부 바닥은 중앙간에만 마루를 깔아 밑에 홍예 부분의 천장을 이루도록 되어 있고, 그 밖의 부분은 강회다짐 흙바닥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각(樓閣) 내부 천장  <참고사진>


 상부(上部)는 연등천장[椽背天障]으로 전형적인 조선 후기 양식입니다.


                                      

화서문(華西門)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 일제강점기  <참고사진>                     


 화서문(華西門)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 일제강점기  <참고사진>


  화서문(華西門)과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 일제강점기  <참고사진>


           화서문(華西門) 내도.외도/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화서문(華西門) 외도/정리의궤  <참고자료>





[17]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위치 []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華西門)에서 약 20m 북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화서문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설치한 것입니다.


◈ 공심돈(空心墩)


공심돈은 일종의 망루와 같은 것으로 4면을 벽체로 하고 벽체 내부는 3층으로 사다리를 통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했고 중앙부는 빈 공간으로 되어 있는 군사용 시설물로서 우리나라에서는 화성에서 처음으로 시도된 성곽 시설물로서 일종의 초소 구실을 하는 돈대(墩臺)로서 높게 쌓아 공격용 시설물을 설치하였습니다. 외부 벽체에는 위 아래로 구멍을 많이 뚫어서 바깥의 동정을 엿보고 공격할 수 있게 만들었으며 불랑기(佛狼機: 총포의 일종), 백자총(百字銃) 등을 발사하여도 적이 화살이나 총탄이 어디서 날아오는지 알 수 없게 하였습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정조20년(1796) 3월10일 완성되었고 화서문(華西門) 쪽을 방어하기위해 설치하였으며 역사적, 학술적,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171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공심돈(空心墩)은 조선시대 성곽에서는 유일하게 화성(華城)에만 있는 시설입니다. '속이 빈 돈대(墩臺: 높이 쌓아 망을 보는 시설)라는 공심돈의 뜻 그대로, 중앙부는 빈 공간을 두어 공격용 시설을 설치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성 안쪽 하층으로는 작은 홍예문을 만들어 출입하도록 하였습니다. 3층에는 단층 망루를 세워 4면에 판문을 설치하였으며 망루의 판문마다 각각 전안(箭眼: 화살 구멍)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내부도(內部圖) <참고자료>


                     돈대(墩臺)는 상·중·하 삼층으로 구분하여 청판(廳板)을 설치하였고 층마다 벽면에 포혈 20개를 내었습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내부(內部) <참고사진>


        중층과 상층에는 개판(蓋板: 마루판) 하나로 밀고 당겨 여닫게 되어 있으며 사다리를 설치하였습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정조는 정조21년(1797) 1월 원행시에 성을 순행하며 이 곳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만든 공심돈(空心墩)이니 마음껏 구경하라”고 하며 만족감을 표시하였습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외부 <참고사진>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서쪽과 북쪽 2면에 현안 두 개씩을 내었으며 성벽을 돌출시키고 그 위에 벽돌로 돈대를 쌓고 꼭대기에 군사들이 머물 누각(樓閣)을 세웠습니다.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내도. 외도 / 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 내도 / 정리의궤 <참고자료>





[18] 북포루(北舖樓)



                                        북포루(北舖樓) 위치 []


북포루(北舖樓)는 장안문(長安門)과 화서문(華西門)의 중간쯤에 위치하며 북서포루(北西舖樓)로부터 서쪽 약 130보(步: 1보는 약 1.2m)거리에 있습니다.


 북포루(北舖樓)


북포루(北舖樓)는 정조19년(1795) 2월20일에 준공되었으며, 북서포루(北西砲樓)와 함께 만들어져 성벽에 다가서는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북포루(北舖樓) <참고사진>


성 안쪽에서는 나무계단을 이용하여 북포루(北舖樓) 내부로 들어갑니다.


                                                                   북포루(北舖樓) <참고사진>


        북포루(北舖樓)  누각에 판문을 설치하고 3면의 판문에는 전안(箭眼: 화살 구멍)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북포루(北舖樓) 외부 <참고사진>


치성(雉城)에 현안(懸眼) 1개를 내고, 그 위에 문루를 만들었습니다. 문루의 담장이 성벽의 여장(女牆: 성가퀴)과 곧바로 이어져 있습니다. 문루(門樓) 3면의 여장에는 각 면마다 6개씩의 총안(銃眼: 총구멍)을 뚫었습니다.


  

                                       

                                         북포루(北舖樓) 내도 <참고자료>




성벽 길의 "장용영(壯勇營) 경계표석(警戒標石)"



            장용영 경계표석 위치[]

          

수원화성과 행궁은 팔달위(八達衛), 장안위(長安衛), 화서위(華西衛), 창룡위(蒼龍衛), 신풍위(新豊衛) 등 장용외영(壯勇外營) 5위(衛)의 군사들이 지켰는데 4대문을 중심으로 경계구역을 정확하게 설정해 놓았습니다. 각 위(衛)의 군사편제는 전부(前部), 좌부(左部), 중부(中部), 우부(右部), 후부(後部)로 되어있고 각 부(部)가 위치하는 곳에 표석(標石)으로 새겨놓았습니다.


장용영(壯勇營) 경계표석(境界標石) / 전면: 화서위 후부미국(華西衛後部尾局), 후면: 장안위전부두국(長安衛前部頭局)


화서위의 경계구역은 북포루(北鋪樓) 동쪽 모퉁이에서 서남암문(西南暗門) 서쪽 제3첩(堞)까지이며 흰색 깃발을 사용했습니다.

팔달위의 경계구역은 서남암문(西南暗門) 서쪽 제2첩에서 봉돈(烽墩) 북쪽 제5첩까지이며 붉은색 깃발을 사용했습니다.

창룡위의 경계구역은 동암문(東暗門) 동쪽 제9첩에서 봉돈(烽墩) 북쪽 6첩까지이며 청색 깃발을 사용했습니다.

장안위의 경계구역은 북포루(北鋪樓) 동쪽 제1첩에서 동암문(東暗門) 동쪽 제8첩까지이며 검정색 깃발을 사용했습니다.


표석(標石) / 장안위 좌부(長安衛 左部) 


팔달위와 창룡위는 봉돈 북쪽 제5첩에서 머리를 맞대고 있으며 팔달위 꼬리는 화서위 머리가 잇고 창룡위 꼬리는 장안위 머리가 잇는데 장안위와 화서위는 북포루 동쪽 제1첩에서 꼬리를 맞대고 있는 형국입니다. 위와 위가 만나는 곳에는 경계표석 4개가 있었고, 위(衛) 내의 좌부(左部), 중부(中部), 우부(右部)에 하나씩 총 12개의 표석이 있어 전체적으로 16개의 표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장용외영(壯勇外營)


장용영은 즉위 초에 설치된 숙위소(宿衛所)의 혁파 이후 1785년(정조 9년)에 설치된 금군(禁軍) 조직으로서의 호위친병 장용위(壯勇衛)를 확대·발전시킨 군영이었습니다. 장용영은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으로 구성되며 외영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이 장용외영이 바로 수원에 주둔하였습니다.




[19] 북서포루(北西樓)



                                        북서포루(北西砲樓) 위치 []


북서포루(北西砲樓)는 장안문(長安門)에서 성벽을 따라 화서문(華西門) 쪽으로 가면 북서적대(北西敵臺)가 나오고 거기서 다시 서쪽으로 156보(步: 1보는 약 1.2m) 되는 거리에 설치된 포루(砲樓)입니다.


북서포루(北西砲樓) <참고사진>


북서포루(北西砲樓) 정조18년(1794) 9월24일 완공되었습니다.



 북서포루(北西砲樓)


북서포루(北西砲樓)는 지붕을 이은 모양이 특이한데 성안 쪽은 맞배 지붕 형식이고 바깥쪽은 우진각 형식의 지붕입니다.


북서포루(北西砲樓) 내부 <참고사진>


                      북서포루(北西砲樓) 외부 <참고사진>


                      북서포루(北西砲樓)는 성 밖으로 약 8.8m 돌출되어 있습니다.



                                   

                                    포루(砲樓) 내도(內圖) / 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포루(砲樓) 내도(內圖) / 정리의궤 <참고자료>





[20] 북서적대(北西敵臺)



                                        북서적대(北西敵臺) 위치 []


     북성적대(北城敵臺)는 장안문(長安門)의 좌측[북서적대(北西敵臺)]과 우측[북동적대(北東敵臺)] 양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적대(敵臺) 


적대는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위해 성문의 좌우에 있는 치성 위에 설치한 방어시설로 4대문중 장안문과 팔달문 양쪽에 설치하였습니다. 정약용은 화서문 좌우에도 적대를 설치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화서문은 왼쪽에 급한 경사면을 이루고 있고, 오른쪽으로 공심돈이 있어 적대를 세우는 것이 무의미하였기 때문에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북서적대(北西敵臺) <참고사진>


서적대(北西敵臺)는 정조19년(1795) 2월28일에 완성되었으며 1967년에 보수하였습니다. 화성(華城) 북쪽의 장안문(長安門)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 서적대(北西敵臺)라고 합니다.  



 북서적대(北西敵臺)의 홍이포(紅夷砲) <참고사진>




  북서적대(北西敵臺) <참고사진>


적대(敵臺)는 성곽보다 높게 만들어서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하였으며 유사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들어 졌습니다.


북서적대(北西敵臺) 외부 <참고사진>


적대(敵臺)의 높이는 성벽과 같은데 밖으로 3개의 현안을 뚫고 벽돌로 쌓은 첩(堞: 여장)마다 총안(銃眼,총구멍)을 내었습니다.



            북성적대(北城敵臺)와 장안문(長安門) <참고사진>


       

      장안문(長安門) 외도(外圖) 상의 북서적대(北西敵臺)  / 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장안문(長安門) ~ 북암문(北暗門) 구간



장안문 ~ 북암문 <google참고사진> 



[21] 장안문(長安門)



                                        장안문(長安門) 위치 []


  장안문(長安門)은 화성(華城) 4대문 중 북쪽 대문(大門)으로 북문(北門)이라고 지칭하며, 사실상 화성(華城)의 정문(正門)입니다.


 장안문(長安門)


장안문(長安門)은 정조18년(1794) 2월28일 공사를 시작하여 9월5일 2층 문루까지 모두 완성되었습니다. 장안문의 규모와 형태는 팔달문과 거의 같으며 서울의 숭례문보다 더크게 쌓은 것이 특징입니다.


장안문(長安門)


장안문(長安門)이 준공된 이후에는 화성(華城)의 북쪽 관문으로서 정조(正祖)를 비롯한 역대 국왕의 화성 능행시 행차가 이 문을 통과하여 화성 행궁으로 들어갔습니다.



                                    장안문(長安門)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장안문(長安門)


정조19년(1795) 윤2월14일 정조는 화성 행궁에서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으로 가던 중에 장안문에 올라 장안문 밖에 개간할 만한 땅을 살펴보았습니다. 1797년 행차시에 정조는 채제공의 시 「장안문루(長安門樓)」(『번암집』권1)에 화답하여 「장안문루화총리대신운(長安門樓和總理大臣韻)」(『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권2. 어제)을 지었으며 이를 문루에 걸어두게 하였습니다.


                           장안문(長安門) 현판 <참고사진>


장안문(長安門)이란 이름은 정조(正祖)가 정하였고 당대의 명필이었던 송하옹 조윤형(松下翁 曺允亨 : 1725∼1799)이 편액(扁額)을 썼습니다. 중국의 오랜 역사에서 장안은 국가의 안녕을 상징하는 문자로 쓰여졌으며 이를 정조가 북문의 이름으로 정하여 태평성대(太平盛代)를 구가한 한(漢)·당(唐)의 서울이었던 장안의 영화(榮華)를 화성에서 재현하려 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장안문(長安門) <참고사진>


장안문(長安門) 내부


장안문(長安門)


장안문(長安門)의 문루는 한국 전쟁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65년 홍예 석축을 복원하였고, 1975년 화성 복원 공사시에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 따라 완전히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장안문(長安門)과 북옹성(北甕城) <참고사진>


북옹성(北甕城)은 장안문(長安門)의 옹성(甕城)으로 정조18년(1794) 10월20일 공사를 시작하여 정조19년(1795) 2월 27일에 완성되었습니다. 옛날의 성곽에는 문을 왼쪽이나 오른쪽에 설치하였는데 북옹성과 남옹성에서는 사통팔달한다는 뜻을 따서 한가운데에 문을 내어 정문과 곧장 연결되게 하였습니다. 옹성의 홍예문 상부에 누각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정문 양 옆으로 7개씩의 현안을 설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옹성 출입문 상부에 팔달문(八達門)과 마찬가지로 오성지(五星池)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오성지(五星池)/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오성지는 성문이 불타지 않도록 대비하기 위해 성문 위에 누조(漏槽)를 만들고 적군들이 성문을 불태우려할 때 활을 쏘고 물을 흘려 보낼 수 있는 방어시설입니다. 5개의 구멍이 설치되어 있어 오성지(五星池)라고 합니다.


                                   

           장안문(長安門)/1910년대 초 <참고사진>

        

          폭격으로 부서진 장안문(長安門)/6.25전쟁 당시 <참고사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장안문(長安門) <참고사진>


          전쟁 후 문루가 사라진 장안문(長安門) <참고사진>

                                               

장안문(長安門) 내도(內圖)/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장안문(長安門) 외도(外圖)/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장안문(長安門) 외도(外圖)/정리의궤 <참고자료>


장안문(長安門) 내도(內圖) / 정리의궤 <참고자료>


                               

                                장안문(長安門) 수문청(守門廳)/정리의궤 <참고자료>





[22] 북동적대(北東敵臺)



                                        북동적대(北東敵臺) 위치 []


          북동적대(北東敵臺)는 장안문(長安門)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서적대(北西敵臺)와 기능 및 형태가 거의 같습니다.


북동적대(北東敵臺)와 북동치(北東雉)


 북동적대(北東敵臺)


북동적대(北東敵臺)는 북서적대(北西敵臺)와 함께 정조19년(1795) 2월28일에 완성되었으며 1968년에 보수하였습니다. 화성(華城) 북쪽의 장안문(長安門)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북동적대(北東敵臺)라고 합니다. 



                 장안문(長安門)과 북동적대(北東敵臺)/북서적대(北西敵臺)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북동적대(北東敵臺)의 홍이포(紅夷砲)


홍이포(紅夷砲)




북동적대(北東敵臺) 외부


적대(敵臺)의 높이는 성벽과 같은데 밖으로 3개의 현안(懸眼)을 내고 벽돌로 쌓은 첩(堞: 여장)마다 총안(銃眼,총구멍)을 뚫었습니다.


 

            북성적대(北城敵臺)와 장안문(長安門) <참고사진>


       

        장안문(長安門) 외도(外圖) 상의 북동적대(北東敵臺) / 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23] 북동치(北東雉)



                                        북동치(北東雉) 위치 []


                             북동치(北東雉)는 북동적대(北東敵臺) 바로 옆에 위치하며 적대(敵臺)와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북동치(北東雉)


 북동치(北東雉)는 3면이 여장(女牆)으로 5개의 첩(堞)을 만들었으며 각각 방안(方眼: 네모난 총구멍) 3개를 뚫어 놓았습니다.




  북동치(北東雉) 외부 <참고사진>


  북동치(北東雉)에는 치성(雉城) 바깥면 에 현안(懸案) 1개를 내었습니다.




[24] 북동포루(北東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 위치 []


북동포루(北東砲樓)는 장안문(長安門)과 화홍문(華虹門)사이인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화홍문에서 성벽을 따라 장안문 쪽으로 약 124보(步: 1보는 약 1.2m) 거리에 있습니다.


북동포루(北東砲樓) <참고사진>



북동포루(北東砲樓)


북동포루(北東砲樓)는 정조18년(1794) 9월23일 준공되었으며, 성 밖으로 약9.3m 돌출되어 있고 지붕이 성 바깥쪽으로는 우진각지붕 형태이며 안쪽으로는 맞배지붕 형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북동포루(北東砲樓), 화홍문(華虹門) 지붕,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동북포루(東北舖樓)가 조망됩니다.


북동포루(北東砲樓) 외부 <참고사진>


북동포루(北東砲樓)의 돌출된 치성 길이는 약 9.3m, 정면 폭은 7.42m이며 성벽 높이는 5.47m이고 그 위의 전돌 여담 높이는 약 1.8m입니다. 포루는 3중층으로 꼭대기에 정면1칸 측면3칸의 누각건물을 지었으며 지붕은 성외측은 우진각, 내측은 맞배 지붕으로 하였습니다. 내부 계단은 하층의 중간에서 중층 및 상층에 곧은 계단으로 오르내리도록 하였다.



          북동포루(北東砲樓)/1920년대 <참고사진>


   북동포루(北東砲樓) 도면 <참고사진>






[25] 북수문(北水門)/화홍문(華虹門)



                                        북수문(北水門)/화홍문(華虹門) 위치 []


북수문(北水門)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의 서쪽 44보(步: 1보는 약 1.2m) 거리에 있으며 화홍문(華虹門)이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 수문(水門)


화성에는 화성의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수원천으로 인하여 북수문(北水門)과 남수문(南水門) 등 2개의 수문을 수원천 위에 세우게 되었습니다. 북수문은 화강암으로 쌓았고 남수문은 벽돌로 쌓았는데, 물이 통과하는 각각의 수문에는 쇠창살을 설치하여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차단하도록 하였습니다. 수문은 수원천이 여름 장마철에 매번 물난리를 겪었기 때문에 공사에 앞서 물길을 파서 넓히는 준천(濬川) 공사를 먼저 하였습니다. 준천 공사는 북수문 밖 500∼600보 지점에서 시작하여 물이 용연으로 곧장 흘러가지 않도록 서쪽으로 휘어지게 물길을 돌렸습니다. 용연을 지나면서부터 수원천은 넓고 편편하게 되며 직류(直流)하여 남수문 부근의 구천(龜川)을 지나게 됩니다. 매년 정례적으로 준천을 시행하여 수원천 관리를 철저하게 하였습니다.



 북수문(北水門)/화홍문(華虹門)


북수문(北水門)인 화홍문(華虹門)은 정조18년(1794) 2월28일 공사에 착수하여 정조19년(1795) 1월13일에 완성되었습니다. 다리 위의 문루는 수문 북쪽에 대한 경계(警戒)와 감시를 위해서 높이 지었고 사면에 분합(分閤)을 달고 동서남 삼면에는 연꽃 새김의 난간을 붙였으며 난간 아래는 벽돌로 담을 둘러쳤습니다.


                                       


 북수문(北水門)/화홍문(華虹門)


화홍문(華虹門)은 석교(石橋)로 7개의 홍예수문(虹霓水門)이 설치되었으며, 이 7개의 수문 중 가운데 수문이 좌우의 수문보다 넓고 크게 설치되어 있습니다. 홍예문 위로는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통로를 두었으며 성벽에 바짝 붙여서 누각(樓閣)을 세웠습니다. 한편 화홍문(華虹門)은  전란에 대비하여 여러 가지 방어 시설을 갖춘 포대(砲臺)로 사용할 수 있고 평소에는 성곽의 일부이자 교량으로 설계되었으며, 한편으로는 시내를 관통하는 수원천이 범람하지 않도록 물길을 조정하는 구실도 하였습니다


                               

                         화홍문(華虹門) 현판


편액은 주변 경관과 어울리도록 예서(隸書)의 대가 기원 유한지(綺園 兪漢芝 : 1760∼?)가 썼는는데, 글씨가 마치 용이 승천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화홍문(華虹門)의 화(華)자는 화성(華城)을 의미하고, 홍(虹)자는 무지개를 뜻하는 글자인데 용의 수컷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물이 수문을 통과하면서 무지개 현상을 빚어내고 또 수문 밖의 용연(龍淵)과 관련하여 화홍문이라고 이름을 붙인 듯 합니다.


화홍문(華虹門) 내부, 연등천장


화홍문(華虹門) 서쪽의 이주석(螭柱石) [상상 속의 동물 이무기]


  <참고자료: 규장각 조선시대 왕실문화>


 화홍문(華虹門)과 동쪽의 이주석(螭柱石)


화홍문(華虹門)은 1922년 7월 대홍수로 파손된 후 1931년‘수원 명소 보존회(水原名所保存會)’에서 이왕직사무국(李王職事務局)의 승인을 얻어 그 해 가을부터 복원 공사에 착수하여 1933년 5월25일 복원을 완료하였습니다. 화홍문 주변에는 방화수류정이라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정자와 용연이란 연못이 있어 화성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명소로 이름난 곳입니다

 

북수문(北水門)/화홍문(華虹門) 밑을 흐르는 수원천(水原川)


수문 남쪽 하천 바닥에는 돌을 깔아 바닥이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였습니다.



 

 북수문(北水門)/화홍문(華虹門): 1910년대 <참고사진>


  북수문(北水門)/화홍문(華虹門): 1922년 이전 <참고사진>


  북수문(北水門)/화홍문(華虹門): 1922년 이전 <참고사진>


 

  북수문(北水門)/화홍문(華虹門)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참고사진>


 

 북동포루(北東砲樓), 화홍문(華虹門) 그리고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참고사진>


      북수문(北水門) 내,외도/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화홍문(華虹門) 내,외도/정리의궤 <참고자료>





[26]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동북각루(東北角樓)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동북각루(東北角樓) 위치 []


동북각루(東北角樓)인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화홍문(華虹門)과 북암문(北暗門) 사이, 화홍문 동쪽 언덕 정상에 있으며 용연(龍淵) 옆의 용두(龍頭) 바위 위에 터를 잡아 각루를 설치하였습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동북각루(東北角樓)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은 정조18년(1794) 9월4일 공사를 시작하여 10월19일 완성되었는데, 이는 다음해에 있을 혜경궁(惠慶宮) 홍씨의 회갑 잔치에 맞추어 미리 공사를 마무리 지은 것입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동북각루(東北角樓) <참고사진>


방화수류정은 1922년 7월 대홍수로 파손되었는데 1932년‘수원명소 보존회’에서 복원하였고 1975년 화성 복원 공사시에 다시 완전하게 복원하였습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동북각루(東北角樓) <참고사진>


방화수류정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려하고 우아한 정자(亭子)로 용두 바위 위에 위치하고 있어 용두각(龍頭閣)이라고도 합니다. 이 곳은 팔달산 서장대, 장안문과 동북포루[각건대], 동장대 그리고 광교산 등 화성의 주요 부분과 화성을 둘러싼 주요 지점을 조망할 수 있는 요지(要地)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동북각루(東北角樓)


누각(樓閣)은 2층으로 되었으며 동서(東西)가 3칸으로 가운데에 설치한 온돌을 기준으로 북쪽에 1칸을 붙이고 남쪽으로 반칸을 물렸으며 서쪽은 2칸을 길게 이어 붙여서 전체적으로 ㄱ자가 여러 번 연이어지는 형태입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가구 조립 순서 <참고자료>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동북각루(東北角樓) 내부 <참고사진>


그리 넓지않은 공간의 구획이 복잡한 듯한데 정자 북쪽에 국왕과 근신들의 자리를 배치하고, 일반 신료들은 남쪽으로 길게 만든 공간에 상(床)을 놓고 마주 앉을 수 있도록 계획하였다고 합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동북각루(東北角樓) <참고사진>


정자 한켠에는 전돌을 깔아 2인 1조로 활을 쏠 수 있고, 마주서서 읍양(揖讓)의 예를 올릴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현판 <참고사진>


꽃을 찾고 버드나무를 따라 노닌다는 뜻의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 하여 송(宋)나라 때의 대유학자 정호(程顥 : 1032~1085)의 시 구절에 “방화수류과전천(傍花隨柳過前川)”이라 한 것을 인용하였는데 방(傍)자를 방(訪)자로 바꾸었으며, 화(花)자와 유(柳)자는 화산(花山)과 유천(柳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참고사진>


편액(扁額)은  정조가 총애하던 당대의 명필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썼으나 없어지고, 1956년 원곡 김기승(原谷 金基昇 : 1909∼2000)씨가 쓴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병신(丙申)소춘(小春)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1909 ~ 2000)
    병신년은 1956년이고, 소춘(小春)이란 초겨울인 음력 10월,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 1909 ~ 2000)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동북각루(東北角樓) <참고사진>


정자 앞에는 활쏘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을 마련하였는데 1795년 을묘원행시에 정조는 이 곳에서 화성 성역의 중간 평가를 하면서 화성유수 조심태의 노고를 치하하고, 활쏘기를 하였습니다. 1797년 행차시에도 정조는 화성을 순행하다 이 곳에서 활쏘기를 하고, 신하들에게 술을 내려 화성 성역의 노고를 치하하였습니다. 1798년 8월 원행시에는 정조가 이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조망, 동북포루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에서의 조망


   


동북각루(東北角樓)/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일제강점기 <참고사진>


동북각루(東北角樓)/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일제강점기 <참고사진>


동북각루(東北角樓)/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의 내부/일제강점기 <참고사진>

  


동북각루(東北角樓)/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참고사진>


      동북각루(東北角樓)/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내,외도/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방화수류정내도/정리의궤<참고사진>


        

                                                                                                   방화수류정외도1,2/정리의궤<참고사진>





■ 용연(龍淵)




                        용연(龍淵) 위치 []


                용연(龍淵)은 용두(龍頭) 바위 위에 있는 동북각루(東北角樓)/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밑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연못


화성 안에는 모두 세 군데에 5개의 연못이 조성되었는데 남지(南池), 동지(東池)가 2개씩, 그리고 북지(北池)가 있었으며, 성밖에는 용지(龍池)가 있어 화성의 훌륭한 경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연못과 그 주변에는 연꽃과 화목을 심고 가꾸어 자연 경관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여 이미 당시부터 하정범익(荷汀泛익 : 연꽃 사이로 물새가 떠다니는 연못 정경)과 같은 아름다운 경치로 널리 알려지기도 하였습니다. 이 연못들은 어느 때인지 유실되어 용지(龍池: 용연)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복원 상태입니다.



 용연(龍淵)


용연(龍淵)에 비친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동북포루(東北砲樓)의 모습과 주변의 소나무와 버드나무의 경관도 아름답지만 보름달이 뜰 때 용연의 풍광은 드라마틱한 장관을 연출한다고 합니다.


 용연(龍淵)은 용지(龍池)라고도 합니다.



                                             

                                          용연(龍淵)/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27] 북암문(北暗門)



                                        북암문(北暗門) 위치 []


                              북암문(北暗門)은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의 동쪽 40보(步: 1보는 약 1.2m) 거리에 있습니다.


 북암문(北暗門)과 동북포루(東北鋪樓)


북암문(北暗門)과 동북각루(東北角樓)/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참고사진>


북암문(北暗門)은 정조20년(1796) 3월27일 홍예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문을 통하여 용연(龍淵)으로 쉽게 출입할 수 있습니다. 성벽이 좌우로 휘어 암문에 접속되므로 성밖에서 암문을 보면 그림자가 생겨 가려지고, 또한 용연 주변의 수목(樹木)에 가려져 눈에 쉽게 보이지 않도록 배치되어 있습니다.


 북암문(北暗門)



 북암문(北暗門)/성(城) 내부


성안 쪽의 경사진 지면은 석축(石築)으로 막았습니다. 1972년 보수 공사를 하였고, 1975년 화성 복원 공사 때 완전히 복원하였습니다.


북암문(北暗門) 성 내외 경계 <참고사진>


                      

                  북암문(北暗門)/성(城) 외부 모습


문의 크기는 겨우 말 한필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고 문의 상단에 둥근 여장(女墻 : 성가퀴)을 설치하였으며 지세(地勢)를 감안하여 출입로에 돌계단을 설치하였고 출입구는 낮게 만들었습니다.



북암문(北暗門)과 방화수류정/일제강점기 <참고사진>


 

북암문도(北暗門圖)/화성성역의궤와 정리의궤(오른쪽) <참고자료>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는 고려 말 승려 진각국사 천희(千熙:1307~1382)의 탑비입니다. 원래 광교산 창성사 터에 있었는데 1965년 방화수류정 언덕 옆 현재의 자리로 옮겨 보호각을 세워 관리하고 있습니다.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彰聖寺址 眞覺國師塔碑)



● 동북포루(東北舖樓) ~ 동일치(東一雉) 구간



동북포루 ~ 동일치 <google참고사진> 



[28] 동북포루(東北舖樓)



                                        동북포루(東北舖樓) 위치 []


동북포루(東北舖樓)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에서 동장대(東將臺)쪽으로 약 135보(步: 1보는 약 1.2m) 거리로 이 곳의 지세가 주변보다 훨씬 높아서 동암문(東暗門)과 동장대, 북암문(北暗門)과 방화수류정까지 엄호할 수 있는 위치입니다.


 동북포루(東北舖樓) 오르는 길에 장안위좌부(長安衛左部) 표석


장안위(長安衛)의 경계구역은 검정색 깃발을 사용했으며, 창룡위(蒼龍衛)의 경계구역은 청색 깃발을 사용했습니다.


 동북포루(東北舖樓)


동북포루(東北舖樓)는 정조20년(1796) 5월15일에 준공되었으며, 상량문에 “이 각건대(角巾臺)를 사용 할 때에는 큰 독기(纛旗)와 높은 아기(牙旗)가 벌려 있고, 한가한 때에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노닐 만하구나.”라고 하였으니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나 화양루(華陽樓)와 같이 평상시 유락의 장소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북포루(東北舖樓)


화성지(華城志)에는 동북포루를 각건대(角巾臺)라 편액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만 실제 현판이 걸렸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각건대(角巾臺)는 생김새가 각건(角巾)과 흡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각건은 동진(東晋) 중기의 명신이었던 사안(謝安 : 字는 安石)의 고사(古事)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사안은 벼슬하지 아니하고 동산(東山)에 들어가 은거하고 있다가 40세에 이르러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명신(名臣)이 되었는데 그가 은거할 때 쓰던 모자가 각건으로 은거한 선비들이 쓰는 모자로 통용되었다고 합니다.


                                                                 각건(角巾) <참고사진>


동북포루(東北舖樓) <참고사진>


동북포루(東北舖樓) 문루(門樓)의 사면(四面)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바깥면과 좌우면에는 활을 쏘는 구멍을 만들어 놓았으며 안쪽에는 계단을 설치하였습니다.


   동북포루(東北舖樓) 문루의 판문에 만들어 놓은 전안(箭眼: 화살 구멍) <참고사진>


동북포루(東北舖樓) 외부 <참고사진>


동북포루(東北舖樓)는 치성의 중간 부분부터 벽돌을 쌓아 치성을 완성하고 그 위에 집을 짓고 판자를 깔아 문루를 만들었습니다.

                                             


     

                                                                               동북포루(東北舖樓) 내,외도/ 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동북포루(東北舖樓) 내,외도/ 정리의궤 <참고자료>





[29] 동암문(東暗門)



                                        동암문(東暗門) 위치 []


동암문(東暗門)은 군사지휘본부인 동장대(東將臺)의 서쪽 116보(步: 1보는 약 1.2m) 거리에 있습니다. 현재 연무 초등학교 뒤쪽입니다.


 동암문(東暗門)


동암문(東暗門)은 정조20년(1796) 3월25일 홍예가 이루어졌으며 북쪽을 향하고 있습니다. 벽돌로 내외 홍예를 쌓아 겨우 한 마리 말을 타고 드나들 수 있을 정도입니다.



 동암문(東暗門), 성 밖에서 본 모습


동암문(東暗門)은 암문의 모양 곡선미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문의 구조는 문 위에 벽돌을 깔고 오성지(五星池)와 커다란 둥근 여장(女牆: 성가퀴) 하나를 설치하였습니다. 


동암문(東暗門), 성 밖에서 본 모습 <참고사진>



        

동암문도(東暗門圖)/화성성역의궤,정리의궤 <참고자료>





[30] 동장대(東將臺)/연무대(鍊武臺)



                                        동장대(東將臺)/연무대(鍊武臺) 위치 []


                                       동장대(東將臺)는 화성의 동북쪽에 창룡문(蒼龍門)과 마주하여 위치하였습니다.

 

동장대(東將臺)/연무대(鍊武臺)


동장대(東將臺)는 화성 동쪽 방면의 군사 지휘소이면서 동시에 군사 훈련장으로 편액을 연무대(鍊武臺)라고 하였습니다. 이 곳은 지형이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있고 언덕의 등성이가 솟아 있는 곳이어서 성의 동쪽 구릉지역 중 가장 중요한 지역입니다.


                        동장대(東將臺) 현판 <참고사진>


                                       


  동장대(東將臺) <참고사진>


동장대 상량문의 한 구절에 “대(臺)는 사방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높은 곳이다.”라고 하듯 실제로 동장대는 선암산(仙巖山)의 일맥이 매향동을 안고 굽이쳐 도는 가운데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오른 고지대에 세워져 장대(將臺)에 올라가 보면 화성의 동쪽에서 성안을 살펴보는 전망이 좋은 군사 요충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동장대(東將臺) <참고사진>


동장대(東將臺)는 정조19년(1795) 7월15일 공사를 시작하여 8월25일 완성되었습니다. 1972년 보수 공사를 하였고, 1975년 화성 복원 공사 때 완전히 복원하였습니다.


   동장대(東將臺) <참고사진>


  동장대(東將臺) 건물의 지붕 형태는 팔작지붕 형식이며 사방을 조망할 수 있도록  벽체를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동장대(東將臺) <참고사진>


장대의 주변은 상·중·하 3단의 대를 쌓았으며 중대(中臺) 좌우의 구석에는 서장대와 마찬가지로 붉은 깃대[외간(桅杆)] 한 쌍을 세웠습니다. 상대(上臺) 위에 남동향의 장대 건물을 지었습니다. 사진 우측의 비탈길은 가로 12m, 세로 10m로 계단 대신 흙을 메워 말을 타고 오르게 조성하였습니다.


                                                      동장대 외간(桅杆) <참고사진>


장대에 세운 크고 붉은 깃대. "대홍외간 (大紅桅杆)"이라 함. 높이 8m. 화성에는 동장대와 서장대에 각각 한쌍의 깃대가 있다. 일반 깃대와 달리 도르래를 이용한 것이 특징. 기를 창에 끼워 세우며, 국왕이 군사훈련 할 때는 "시열"이라는 글자를 썼다.  <안내판>


  동장대(東將臺) 건물 내부[동→서] <참고사진>


 동장대(東將臺) 건물 내부[동남→서북] <참고사진>


장대건물에는 온돌(溫突) 한 칸을 높이 짓고 그 좌우 한 칸씩은 낮게 만들어 상하 관계에 따라 자리잡도록 하였습니다.



 영롱담 <참고사진>


 북쪽 돌층계 위에 사대(射臺)를 만들었고 그 위에는 영롱장(玲瓏墻)이라는 담장을 쌓았습니다.


   영롱장(玲瓏墻)/영롱담 <참고사진>


기와로 꽃문양을 새겨놓은 담장. 마치 구슬이 울리는 소리가 날 듯 한 꽃문양의 담이란 뜻으로 "영롱담"이라 하였다. 전체높이 165cm. 연무대의 왕을 보호하기 위해 뒷 담장 밑부분에 무늬가 있는 문석대로 축대를 쌓고, 그 위에 영롱담을 쌓아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안내판>


불랑기(佛狼機) 5호 <참고사진>


조선후기 대표적인 휴대용 화포. 몸체길이 72cm, 총구멍 9.5cm. 블랑은 프랑크라는 유럽인을 뜻하는 말로서양에서 만든 화포를 불탕기라고 함. 몸체가 큰 1호부터 작은 5호로 구분됨. 발사 틀의 수실을 하는 모포와 실탄을 장전하여 모포에 삽입해 발사하는 자포로 이루어짐. 여러개의 자포를 이용해 연속 사격이 가능해 임진왜란 이후 육전은 물론 해전에서도 힘을 발휘함으로써 조선 제일의 화기로 평가받음. <안내판>


    투석(投石) <참고사진>


성을 지키는 도구의 하나로 일명 "비석(飛石)"이라 한다. 화성성역의궤엥 의하면 성을 지킬 때 타마다 크고 작은 돌맹이 100개씩, 10타마다 큰돌 200근(120kg) 또는 150근(90kg) 짜리 3개씩 두도록 규정함. 투석은 준비가 쉽고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어 성을 방어하는 무기로 오랬동안 사용됨.  <안내판>


    좌행각 <참고사진>                                                         삼문과 우행랑 <참고사진>

 

부속 건물로 지은 좌행각(左行閣)은 비어있는 행랑이고, 오른쪽에 있는 우행랑은 장졸(將卒)이 입직(入直)하는 곳이며 붙여지은 삼문(三門)은 동장대(東將臺)의 정문입니다.


 동장대(東將臺)/연무대(鍊武臺) 정문



  동장대 좌측담 밖 조련장(操鍊場) <참고사진>


동장대(東將臺) 좌측담 밖은 넓은 조련장(操鍊場 : 동서 180보, 남북 240보)을 마련하여 말타기와 활쏘기 훈련을 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정조20년(1796) 1월 원행시에 정조(正祖)는 동장대에서 활쏘기를 하였습니다.


동장대(東將臺)와 서북쪽 협문(夾門)


정조21년(1797) 1월 행차시에 정조는 화성을 순행하면서 이 곳에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성제를 비교하고 “(화성으로 인해) 우리나라도 성제가 있다고 할 만하다.”고 화성 성곽 건설의 역사적 의미를 평가하였습니다. 그리고 동년 8월 행차시에 이 곳에 들른 정조는 좌의정 채제공의 시 「동장대중추완월(東將臺中秋翫月)」(『번암집』 권1)에 화답하는 시 「화좌규동장대중추완월운(和左揆東將臺中秋翫月韻)」(『화성성역의궤』 권2. 어제)을 지었습니다.


                                   동장대(東將臺)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동장대(東將臺)/일제강점기 <참고사진>


동장대도(東將臺圖)/화성성역의<참고자료>                                    동장대도(東將臺圖)/정리의궤 <참고자료>


 



[31]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위치 []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화성의 동북쪽 모퉁이에 위치하며 동북노대(東北弩臺)의 서쪽 60보(步: 1보는 약 1.2m) 거리에 성 안쪽을 돋구어 쌓은 지점 위에 있습니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정조20년(1796) 7월19일 완성되었으며, 이 공심돈은 인근의 창룡문(蒼龍門)과 동장대(東將臺)를 동시에 응원할 수 있는 위치로 중국 요동(遼東)에 있는 계평돈(平墩)을 본떠서 벽돌로 둥그렇게 타원형 형태의 돈대(墩臺)를 만들었습니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높이가 6.8m로 3층에는 누각을 세워 적의 동정을 살필 수 있도록 하였으며 바깥쪽으로 상부 26개, 하부 14개의 총안을 뚫어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고, 그 구멍으로 햇빛이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아래층 안쪽에 벽돌로 작은 홍예문을 만들어 출입하였습니다. 홍예문 동쪽의 빈 공간을 이용하여 온돌방 한 칸을 지어 군사들이 숙직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사각형의 구멍을 창문으로 삼아 군사들이 출입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부계단 <참고사진>


위 아래 층은 개판 (蓋板)으로 구분하였고 아래층에서 벽을 따라 소라처럼 나선형으로 벽돌 계단을 이용하여 위 아래로 오르내리게 하여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을 일명 「소라각」이라고도 합니다.


                                                      내부공간 <참고사진>


                            안쪽 원과 바깥 원 사이에는 4척 5촌의 공간을 비워두어 군사들이 몸을 가리게 되어 있습니다.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이용하여 꼭대기 누각으로 오르는 출입지점 <참고사진>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외부 모습 <참고사진>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 모형 <수원화성박물관>




                     동북공심돈/1920년대 이후 <참고사진>


동북공심돈/일제강점기 <참고사진>


동북공심돈 내외도 <참고자료>


                                              

                                               동북공심돈 내부도 <참고자료>



 


■ 연무대관광안내소 및 국궁체험장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에서 본 연무대관광안내소 및 국궁체험장


국궁체험장 <참고사진>




[32] 동북노대(東北弩臺)



                                        동북노대(東北弩臺) 위치 []


동북노대(東北弩臺)는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과 창룡문(蒼龍門) 사이에 있으며 창룡문(蒼龍門) 북쪽 96보(步: 1보는 약 1.2m) 거리에 있습니다.


 동북노대(東北弩臺)


동북노대(東北弩臺)는 정조20년(1796) 4월14일에 완공되었으며, 창룡문(蒼龍門) 일대에 내습하는 적을 대비하여 만든 시설물입니다.




동북노대(東北弩臺) <참고사진>


동북노대(東北弩臺)치성(雉城) 위에 벽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었으며 벽체의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했습니다. 현안 2개를 뚫었고, 3면에 각 1개씩의 궁노(弓弩) 발사대를 설치하였습니다. 바깥 쪽 두 모퉁이에는 둥근 타구(垜口: 방패처럼 몸을 보호하는 시설)를 설치하였는데 타구마다 좌우 여장(女牆: 성가퀴)에 방안(方眼: 네모난 총구멍) 3개씩 뚫고 총을 쏠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동북노대(東北弩臺) 상부(上部)


안쪽 두 모퉁이는 여장(女牆: 성가퀴)을 ㄱ자로 꺾어 만들었고 가운데에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하였으며 노대 바닥은 벽돌을 판판하게 깔았습니다.


동북노대(東北弩臺) 외부 <참고사진>




동북노대(東北弩臺)/일제강점기 <참고사진>


동북노대(東北弩臺)/일제강점기 <참고사진>


 

동북노대(東北弩臺)/일제강점기 <참고사진>


동북노대(東北弩臺) 내,외도/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동북노대(東北弩臺) 내,외도/정리의궤 <참고자료>





[33] 창룡문(蒼龍門)



                                        창룡문(蒼龍門) 위치 []


창룡문(蒼龍門)은 화성(華城)의 동쪽 대문으로서 일반적으로 동문(東門)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화성 행궁으로부터 1,040보(步: 1보는 약 1.2m)쯤 떨어진 거리에 있고 동쪽을 향하여 자리잡아 풍덕천을 거쳐 용인, 광주 방면으로 연결되는 화성의 출입구입니다.


 창룡문(蒼龍門)


창룡문(蒼龍門)은 정조19년(1795) 5월8일 공사를 시작하여 10월17일에는 문루(門樓)까지 완성되었습니다. 창룡문의 문루는 한국 전쟁 때 파괴되었던 것을 1975년 화성 복원 공사시에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에 따라 복원하였습니다.


                                      


창룡문(蒼龍門) <참고사진>


창룡(蒼龍)은 『주례(周禮)』「유인(庾人)」편에 나오는 용어로서 “말이 팔척 이상이면 용(龍)이 된다.”고한 구절의 주(注)에서 “창룡을 탄다. 창(蒼)은 청색(靑色)이다.”라고 한 월령(月令)을 인용한 것입니다. 창룡은 곧 청룡(靑龍)이며 동쪽 하늘을 맡은 태세신(太歲神)으로 화성의 동쪽을 맡는다는 의미로 창룡문(蒼龍門)이라 이름을 정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룡문(蒼龍門)과 동옹성(東甕城)


동옹성(東甕城)은 창룡문(蒼龍門)의 옹성(甕城)입니다. 정조20년(1796) 8월8일 공사를 시작하여 동년(同年) 8월14일 완성되었습니다.


                                    창룡문(蒼龍門)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동옹성(東甕城) <참고사진> 


동옹성(東甕城)의 형태는 옛날 제도에서 좌우측 중 한쪽 만 열려 있는 것을 취하였습니다. 옹성(甕城)과 정문의 좌측이 끊어져 있기 때문에 바깥 출입문은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동대문 옹성과 비슷합니다.


 창룡문(蒼龍門)


               창룡문(蒼龍門) 현판


창룡문(蒼龍門)의 편액은 원래 조선 후기의 학자 칙지헌 유언호(則止軒 兪彦鎬: 1730∼1796)가 썼습니다. 현재의 현판은 화성 복원 공사 당시 새로 쓰여진 글씨입니다.


                 옹성안 석벽에 새겨진 공사책임자 이름 <참고사진>


 창룡문(蒼龍門)


창룡문(蒼龍門) 내부 <참고사진>


창룡문(蒼龍門)에서의 조망


                           



  창룡문(蒼龍門)/한국전쟁 후 <참고사진>


 창룡문(蒼龍門)/일제강점기 <참고사진>



  창룡문(蒼龍門) 내,외도/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창룡문(蒼龍門) 내,외도/정리의궤 <참고자료>


                        창룡문(蒼龍門)/정리의궤 <참고자료>


                           3칸 건물인 수문청(守門廳)이 창룡문(蒼龍門)의 안쪽 가장자리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습니다.






[34] 동일포루(東一舖樓)



                           동일포루(東一舖樓) 위치 []


                          동일포루(東一舖樓)는 창룡문(蒼龍門)에서 남쪽으로 약 180보(步: 1보는 약 1.2m) 거리에 있습니다.


 동일포루(東一舖樓)


 동일포루(東一舖樓)는 적의 창룡문(蒼龍門) 방면 공격에 대비해서 만들었으며 정조20년(1796) 7월10일에 준공되었습니다.



동일포루(東一舖樓 <참고사진>


동일포루(東一舖樓)는 치성 위에 3칸의 긴 포루를 지었는데 벽을 설치하지 않아 사방이 터져있습니다. 바깥쪽 두 칸에는 판자를 깔아 문루를 만들고 안쪽 한 칸은 사다리를 설치하였습니다.


동일포루(東一舖樓) 외부 <참고사진> 


동일포루(東一舖樓)는 치성 외면에 현안 1개를 내었으며  누(樓) 밑에는 총을 쏘는 구멍을 내고 문루와 잇대어서 여장(女牆: 성가퀴)을 붙였습니다. 




[35] 동일치(東一雉)



                                        동일치(東一雉) 위치 []


                     동일치(東一雉)는 동일포루(東一舖樓)에서 봉돈(烽墩) 쪽으로 125보(步: 1보는 약 1.2m) 거리에 있습니다.


 동일치(東一雉)



   동일치(東一雉) 외부 <참고사진> 


  동일치(東一雉)에는 치성 외면에 현안 1개를 내었습니다.



   <참고사진>


  동일치(東一雉) 옆에는 주민들을 위한 성(城) 밑 통로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 동포루(東砲樓) ~ 남수문(南水門) 구간



동포루 ~ 남수문 <google참고사진> 




[36] 동포루(東砲樓)



                                        동포루(東砲樓) 위치 []


동포루(東砲樓)는 봉돈(烽墩)에서 성벽을 따라 창룡문(蒼龍門) 쪽으로 229보(步: 1보는 약 1.2m) 거리에 있는 화성 동쪽의 포루입니다.

 

동포루(東砲樓)  <참고사진>



  동포루(東砲樓) 외부 <참고사진> 


  동포루(東砲樓)에는 치성 외면 벽체의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했습니다.




[37] 동이치(東二雉)



                                        동이치(東二雉) 위치 []


      동이치(東二雉)는 동포루(東砲樓)와 봉돈(烽墩) 사이의 중간 지점으로 동포루에서 110보(步: 1보는 약 1.2m) 거리에 있습니다.


 동이치(東二雉)



    동이치(東二雉) 외부 <참고사진> 


    동이치(東二雉)에도 동일치(東一雉)와 마찬가지로 치성 바깥면에 현안 1개를 내었습니다.




[38] 봉돈(烽墩)



                                        봉돈(烽墩) 위치 []


봉돈(烽墩)은 봉수대(烽燧臺)라고도 하며 동이포루(東二舖樓)와 동이치(東二雉) 사이 화성 행궁에서 정면으로 마주 보이는 위치에 있습니다.



봉돈(烽墩) 


봉돈은 봉수대(烽燧臺)라고도 하며 풍수 지리상 화성 행궁의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자리[일자문성(一字文星): 산의 정상부가 평탄하게 수평으로 (一)자와 비슷하게 펼쳐진 것]에 있다하여 안산 봉수(案山烽燧)라고도 합니다.  



 봉돈(烽墩)


봉돈(烽墩)정조20년(1796) 6월17일에 준공되었습니다. 일제 침략기에 봉돈의 상당 부분이 허물어졌던 것을 1975년 화성 복원 공사시에 복원하였습니다. 봉돈(烽墩)은 풍수 지리상 화성 행궁의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자리[일자문성]에 있다하여 안산 봉수(案山烽燧)라고도 합니다.



  봉돈(烽墩)  <참고사진> 


봉돈(烽墩)은 화성의 사방 경계와 정찰 임무는 물론 변방에서 일어나는 정보를 빨리 탐지하는 척후(斥候)의 임무를 띠고 있는데 한양의 목멱산[남산]과 같이 수륙(水陸)의 정보 전달을 함께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저녁마다 남쪽의 첫째 봉화 하나를 올리면 동쪽으로 용인 석성산(石城山) 봉화(烽火)가 응답하고 서쪽으로는 서해안의 흥천대(興天臺) 봉화가 응답합니다. 정조20년(1796)에는 화성유수부의 서쪽 30리 지점인 서봉산(棲鳳山)에 간봉(間烽)을 두어서 오고 가는 봉화를 이 곳에서 전달하도록 하였습니다.



                                              봉돈(烽墩) 입구


화두(火竇: 횃불구멍)


낮에 연기를 올릴 때는 연기가 흩어지지 않고 곧 바르게 위로 올라가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이리똥, 말똥을 말린 것을 주로 사용하였으며 근대에는 청솔가지, 쑥대 등을 사용하였습니다.


                    


 봉돈(烽墩)


대부분의 봉수대는 흙이나 돌로 쌓아 설치하였는데 비해 화성의 봉수대는 벽돌로 쌓아 올려 그 규모와 외관이 마치 예술 작품처럼 정교하고 장려(壯麗)하게 축조되었습니다.


봉돈(烽墩)  <참고사진> 


좌우 계단 끝에는 각각 한 칸짜리 집을 지었는데, 남쪽 집은 온돌을 설치하여 군졸이 거처하도록 하였고 북쪽 집은 판자를 깔고 각종 용구(用具)를 넣어 두는 창고(倉庫)로 사용하였습니다. 감관(監官) 5인과 봉군(烽軍) 15인이 봉돈을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봉돈(烽墩) 북쪽방 <참고사진> 


온돌방[군사들이 거처하는 곳]                          <참고사진>                무기고[군사들의 무기를 보관하는곳]
  

 봉돈(烽墩) 외부 <참고사진> 


벽돌로 쌓아 올린 부분은 성벽보다 훨씬 높고 성밖으로 치성처럼 불거져 나왔습니다. 바깥 면으로는 현안 2개, 총안 18개와 누혈 1개를 내었고, 안쪽 면은 화두(火竇 : 횃불 구멍) 사이로 여장(女牆: 성가퀴)을 둘러 포혈 18개를 만들었습니다. 이와같이 봉돈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각가지 방어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봉돈(烽墩)



   


  봉돈(烽墩)/일제강점기  <참고사진> 


                               봉돈(烽墩)/1960년대  <참고사진> 


봉돈(烽墩) 내,외도/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봉돈(烽墩) 내도/정리의궤  <참고자료> 





[39] 동이포루(東二舖樓)



                                         동이포루(東二舖樓) 위치 []


                               동이포루(東二舖樓)는 봉돈(烽墩)에서 남쪽으로 105보(步: 1보는 약 1.2m)의 거리에 있습니다.


 동이포루(東二舖樓)


동이포루(東二舖樓)는 정조20년(1796) 7월3일에 준공되었으며, 적의 봉돈(烽墩) 방면 공격에 대비하여 만들었습니다.



 동이포루(東二舖樓)  <참고사진> 


 동이포루(東二舖樓)모양은 동일포루와 같으며 포루의 길이가 2칸으로 한 칸만 판자를 깔고, 한 칸에는 사다리를 설치하였습니다.


  동이포루(東二舖樓) 외부 <참고사진> 


동이포루(東二舖樓)는 치성 외면에 현안 1개를 내었으며  누(樓) 밑에는 총안(銃眼: 총구멍)을 내고 문루와 잇대어서 여장(女牆: 성가퀴)을 붙였습니다. 




[40] 동삼치(東三雉)



                                        동삼치(東三雉) 위치 []


동삼치(東三雉)는 동이포루(東二포樓)와 동남각루(東南角樓)의 중간 지점으로 동이포루에서 123보(步:1보 약1.2m) 지점에 있습니다.


 동삼치(東三雉)


 동삼치(東三雉)는 3면을 여장(女牆: 성가퀴)으로 만들었으며 각 첩(堞)마다 방안(方眼: 네모난 총구멍) 3개를 뚫어 놓았습니다.



      동삼치(東三雉) 외부 <참고사진> 


      동삼치(東三雉)는 치성(雉城) 바깥면에 현안 2개를 내었습니다. 




[41] 동남각루(東南角樓)



                                        동남각루(東南角樓) 위치 []


                                        동남각루(東南角樓)는 남수문 동쪽으로 솟아오른 언덕의 첫머리에 있습니다.


 동남각루(東南角樓)


동남각루(東南角樓)는 정조20년(1796) 7월25일 건물이 완성되었으며 서북각루와 거의 같은 구조인데 다만 4칸 모두 판자(板子)를 깔고 동쪽 처마 아래에 계단을 설치한 점이 다르며, 건물의 서남쪽 청판(廳板) 아래로 온돌 1칸을 설치하였습니다.



     동남각루(東南角樓)  <참고사진> 


동남각루(東南角樓)는 성안팎으로 시야가 넓은 곳으로서 남수문(南水門)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남공심돈[미복원]과 마주보며 군사를 지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동남각루(東南角樓)  내부에서 본 전안(箭眼: 화살 구멍) <참고사진> 


  동남각루(東南角樓) 외부 <참고사진> 


동남각루(東南角樓)는 치성(雉城) 위에 벽돌을 쌓아 조성하였으며 성(城) 벽체의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했습니다. 3면의 여장(女牆: 성가퀴)에 총안(銃眼: 총구멍)을 뚫고 총을 쏠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42] 남수문(南水門)



                           남수문(南水門) 위치 []


남수문(南水門)은 동남각루(東南角樓)와 팔달문(八達門) 사이 수원천(水原川)에 위치하며 수원천이 화홍문(華虹門)에서 곧장 750보(步: 1보는 약 1.2m)를 흘러 내려와 화성(華城)과 다시 만나는 지점에 만든 수문(水門)입니다.



 남수문(南水門), 동남각루에서 바라봄


 남수문(南水門), 북쪽면


남수문(南水門)은 정조18년(1794) 2월28일 공사에 착수하여 한동안 공사를 중단했다가 정조19년(1795) 11월 공사를 재개하여 1796년 3월25일 준공되었습니다. 1922년 7월 대홍수로 유실된 이후 2010년 9월 복원을 시작하여 2012년 6월 준공되었습니다.


남수문(南水門), 남쪽면


남수문(南水門)은 수원천의 수량이 불어나는 것에 대비하여 북수문보다 2개 더많은 9개의 홍예(무지개형 수구)를 만들었습니다.

남수문(南水門)에는 바깥쪽에 포혈(砲穴 : 화포를 쏘는 구멍) 57개를 뚫어 놓았으며 9개의 수문마다 1개씩의 둥근 담이 수문 위로 만들어 졌습니다.



남수문(南水門) 위 포사(舖舍)


남수문(南水門) 수문 위로는 문루 대신에 벽돌을 쌓아 긴 포사(舖舍)를 만들었는데, 화성의 성곽가운데 가장 취약한 부분임을 고려한 조처였습니다. 포사는 사방에 벽을 치고 한가운데만 터서 출입하였는데 비상시에 수백 명의 군사를 배치할 수 있는 요새입니다.



남수문(南水門)은 동서 양쪽 가장 자리에 성가퀴를 설치하여 성벽에 접속시켰고, 작은 홍예문을 만들어 포(砲)로 통하게 하였습니다. 포사(舖舍)는 수문의 ⅔를 차지하고 나머지 부분을 다리로 이용하였습니다.


남수문(南水門)


남수문(南水門)에는 바깥쪽에 포혈(砲穴 : 화포를 쏘는 구멍) 57개를 뚫어 놓았으며 9개의 수문마다 1개씩의 둥근 담이 수문 위로 만들어 졌습니다.





남수문(南水門) 보(洑)  <참고사진>


과거 남수문(南水門)은 홍수 때 마다 유실이 생겼던 곳이기에 원형 그대로 복원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중 하나인 홍수가 범람해서 일어날 수 있는 남수문 파괴에 대비해 커다란 부유물이 남수문 바로 앞에서 빠질 수 있는 보(洑)를 설치했습니다.


남수문외도(南水門外圖)/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위의 그림에는 홍예 안으로 쇠창살이 보입니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기위해 쇠창살로 막아 놓은 것입니다. 그러나 쇠창살을 복원할 경구 홍수 때 흘러나오는 나무나 부유물로 수원천이 범람할 것으로 판단하여 복원시 쇠창살을 만들지 않았고, 남수문 바로 앞에서 빠질 수 있는 보(洑)를 설치한 것입니다.


       

남수문(南水門)/1907년  <참고사진>


 

남수문(南水門) 내외도/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남수문(南水門) 내외도/정리의궤  <참고자료>


    복원 전 남수문(南水門) 바닥 흔적  <참고사진>





수원화성(水原華城) 미복원 시설물



남공심돈(南空心墩) [미복원]



                        
                    남공심돈(南空心墩) 위치 []


                   남공심돈(南空心墩) 복원도  <참고자료>


남공심돈(南空心墩)은 팔달문의 동남측 150m 거리에 남암문 옆 성곽이 직각으로 꺾이는 지점에 있으며 남수문(南水門) 방면의 방어를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건축 구조가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과 같으나 규모가 약간 작습니다.


남공심돈(南空心墩)과 팔달문/1907년  <참고사진>


남공심돈(南空心墩)은 정조19년(1795) 10월18일 완성되었으나, 1900년대 급속한 도시화에 밀려 남수문(南水門) 일대가 시장으로 확대되어 상권이 형성되면서 훼손되었는데, 1976년도 문화재 복원정화 공사시 복원되지 못하였습니다.


                남공심돈(南空心墩)/1907년  <참고사진>


남공심돈(南空心墩) 내외도/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한가운데에 돈대를 벽돌로 쌓고 담안쪽의 3면에는 공간을 두어 군사들이 전투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남공심돈(南空心墩) 내외도/정리의궤  <참고자료>


동쪽과 남쪽 2면에 현안 두 개씩을 내었고, 각 방향으로 2개의 총안(銃眼 : 총을 쏘는 구멍)을 뚫어 놓았습니다. 대(臺) 위에 성가퀴를 설치하고 1칸짜리 누각(樓閣)을 지었습니다.


남암문(南暗門) [미복원]



                        남암문(南暗門) 위치 []


              남암문(南暗門)은 팔달문(八達門) 동쪽 79보 3척(약 88m) 되는 곳에 있었으며, 정조19년(1795) 2월23일 세워졌습니다.



                                                               <참고자료>


『화성성역의궤』「화성전도(華城全圖)」를 살펴보면, 남암문(南暗門)은 성벽에 돌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정문보다 약간 작게 하여 안쪽 너비는 13척 1촌(약 4m)이고 높이는 12척(약 3.7m), 바깥쪽  너비는 11척 8촌(약 3.6m), 높이는 11척 5촌(약 3.5m)입니다. 문 위에는 덮게 판을 대고 판위에는 회를 더 붙여서 안과 밖을 성가퀴로 끼워 쌓았습니다. 밖은 여장만 세우고 문루(門樓)는 세우지 않았습니다. 다만, 흙을 채우고 잔디를 덮어 성 위의 길과 통하게 하였습니다. 문짝 안은 쇠로서 빗장을 설치하여 정문과 같게 하였습니다.


   남암문(南暗門)과 팔달문(八達門)/일제강점기  <참고사진>


남암문(南暗門) 위에는 화성성역의궤에는 나타나있지 않은 문루(門樓)가 보입니다. 아마도 1824년~1846년 사이에 문루가 설치되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남암문(南暗門)과 팔달문(八達門)/1907년  <참고사진>


    일제 침략기에 남암문(南暗門)은 남문시장(南門市場)으로 편입된 후 현재까지 미복원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남암문(南暗門) 내외도/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남암문(南暗門) 외도/정리의궤  <참고자료>





연못 [미복원]



      팔달문(八達門) 옆 남지(南池)


화성(華城) 안에는 모두 세 군데에 5개의 연못이 조성되었는데 남지, 동지가 2개씩, 그리고 북지가 있었으며, 성밖에는 용지(龍池)가 있어 화성의 훌륭한 경관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 연못들은 어느 때인지 유실되어 용지(龍池)/용연(龍淵)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복원 상태입니다.



은구(隱溝) [미복원]



             남은구(南隱溝) 위치[]


은구(隱溝)는‘숨겨진 도랑’이란 뜻으로 성안의 물을 빼내기 위한 비밀 배수구입니다. 화성에는 남은구(南隱溝)와 북은구(北隱溝) 등 2개의 은구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모두 미복원 상태입니다. 


         

     은구도(隱溝圖)/화성성역의궤                     <참고자료>                       남지도(南池圖)



    은구(隱溝) 위로 성벽을 쌓았으며 은구를 지나는 물줄기는 남지(南池)나 북지(北池)를 거쳐 흘러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남성적대(南城敵臺) [미복원]



                   남서적대(南西敵臺)와 남동적대(南東敵臺) 위치


남서적대(南西敵臺)와 남동적대(南東敵臺)로 이루어진 남성적대(南城敵臺)는 북성적대(北城敵臺)와 마찬가지로 팔달문(八達門) 좌·우 양편에 있었습니다.


                    <참고자료>

                  <참고자료>


남성적대(南城敵臺)는 1795년 2월28일에 완성되었으며 구조는 북성적대(北城敵臺)와 비슷하나 현안이 2개로 북성적대보다 1개 적습니다. 남성적대는 팔달문 좌우의 성벽과 적대가 도로로 사용되고 있어 1975년 화성 복원 공사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중포사(中舖舍) [미복원]

 


중포사(中舖舍) 위치[] <google참고사진>   


중포사(中舖舍)는 동북포루(東北舖樓)/각건대(角巾臺) 아래 320보(步: 1보는 약 1.2m) 거리로 지금의 삼일 상업고등학교 자리에 있었으며 창룡문(蒼龍門) 방향에서 발생하는 비상 상황을 성안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중포사(中舖舍)/정리의궤  <참고자료>


중포사(中舖舍)는 정조20년(1796) 8월6일 건물이 완공되었습니다. 포사(舖舍)를 설치한 지점은 산줄기가 내려오다가 중간쯤에서 높이 솟구쳐 오른 곳으로서 이 곳에 2층 건물을 지어 아래층 1칸은 군사가 숙직할 수 있도록 온돌을 놓았고 1칸은 터서 나무 사다리를 놓아 위층과 통하게 하였습니다. 1975년 화성 복원 공사 당시에 중포사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어 공사에서 제외되어 현재까지 미복원 상태입니다.



                                                             <참고자료>


                                             성문 내/외부 및 문짝, 성벽의 명칭


성문은 성 내외를 연결해 주는 통로인 개구부(開口部)의 형태에 따라 평문식(平門式)과 현문식(懸門式)으로 구분되며, 평문식은 다시 개거식(開据式/평거식(平据式)/홍예식(虹霓式) 등으로 구분되빈다. 현문식은 성문의 설치 위치가 체성벽의 일정 높이에서부터 시작되는 형식입니다. 현문식의 성문은 농성(籠城)을 위주로 하는 한국 고대성곽의 특징적인 형식입니다.

 

 <성문의 종류>
 

 

성문(城門)은 벽체를 두텁게 쌓아 올리고 석재도 특별히 반듯하게 다듬은 돌을 사용하는 등, 방어에 있어서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곳이며 성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입니다. 성문은 대부분의 성에서 동서남북 네 면에 만들지만, 큰 성곽이 아닌 경우에는 북문이 없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고대의 토성에서는 성문을 따로 만들지 않고 성벽을 엇갈려 터 놓는다든지 갖가지 모양으로 성벽을 교묘하게 꺾어서 접근을 어렵게 하는 구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아치로 육축(陸築)을 쌓고 판문을 달았으며 위에는 누각건물을 지어 성문을 규정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성문 내부 명칭>

  

 <성문 외부 명칭> 

 
 <성문의 문짝>

 

성벽은 성곽의 부속시설을 제외한 성벽의 몸체부분. 축성 재료에 따라 목책(木柵) / 토축(土築) / 석축(石築) / 토석혼축(土石混築) / 전축(塼築)등으로 구분됩니다. 석축성은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상 대부분의 산성이 여기에 속하는데,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축성방식입니다. 축성시 공역(工役)이 많이 들고 석재(石材)의 가공과 운반이 어려우나 토성에 비해 방어력이 우수하고 유지관리에 편리한 장점이 있습니다. 축조방식상 협축식(夾築式)과 편축식(片築式)이 있는데 편축시 내부에 흙을 채우는 내탁식(內托式)이 우리나라 석축성의 일반적인 방식입니다.

 

<성벽의 주요 명칭>

출처 :서울문화재아카데미




위 자료의 내용은 '수원시'와 '수원문화재단' 자료를 주로 참고하였으며, 의궤관련 사진 등은 '여유당 건축'의 자료를 참고하였습니다. 



                                        수원화성 / 수원(2017.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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