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경기도

화성행궁/수원(2017)

케인스 2017. 8. 1. 22:48



화성행궁(華城行宮) / 수원(水原)

             

 

 

☞  경기도(京畿) 수원시(水原市) 화성행궁(華城行宮)

   



           화성행궁(華城行宮) 위치 <참고자료>

 

화성행궁(華城行宮)은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에 위치하며 조선 22대 왕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할때 임시 거처로 사용하던 곳입니다.


  화성행궁(華城行宮) 전경 <참고사진>

 

사적 제478호 화성행궁은 정조13년(1789)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 되었습니다. 행궁(行宮)은 왕이 지방에 거동할 때 임시로 머물거나 전란(戰亂), 휴양, 능원(陵園)참배 등으로 지방에 별도의 궁궐을 마련하여 임시 거처하는 곳을 말합니다.


정조는 서울 동대문구 배봉산 언덕아래(현재의 서울시립대자리)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현륭원(顯隆園)으로 이장하면서 수원 신도시를 건설하고 성곽을 축조했으며, 정조14년(1790)∼19년(1795)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 수원에 이르는 중요 경유지에 과천행궁, 안양행궁, 사근참행궁, 시흥행궁, 안산행궁, 화성행궁 등을 설치하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화성행궁은 규모나 기능면에서 대표적인 행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부 유수(留守)가 집무하는 내아(內衙)로도 활용하였습니다.


정조는 1789년 10월 현륭원 이장 이후 정조14년(1790) 2월부터 정조24년(1800) 1월까지 12차에 걸친 능행(陵幸)을 행하였습니다. 이때마다 정조는 화성행궁에 머물면서 여러 행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정조가 승하한 뒤 순조(純祖)1년(1801)에 행궁 옆에 화령전(華寧殿)을 건립하여 정조의 진영(眞影)을 봉안 하였고, 그 뒤 순조, 헌종, 고종 등 역대 왕들이 이곳에서 머물렀습니다. <수원문화재단>


정리의궤(整理儀軌: 1797 추정) 중 행궁전도(行宮全圖) <참고자료>


화성행궁은 576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로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였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낙남헌(洛南軒)을 제외한 시설이 일제에 의해 훼철되었습니다. 1980년대 말,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 되었습니다.  <수원문화재단>


 화성행궁도(華城行宮圖):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 중  <참고자료>


        


화성행궁 2단계 복원사업 2020년 완료될 전망


수원시에 따르면 화성행궁 일원에 우화관(于華館), 장춘각(藏春閣), 분봉상시(分奉嘗侍), 별주(別廚) 등 4개동 94칸을 복원할 예정이라고 하였습다. 우화관(于華館)은 화성유수부의 객사(客舍)로 정조13년(1789)에 건립됐습니다.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리기도 했으며 외국사신이나 관리들의 숙소, 연회장소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정조19년(1795) 우화관에서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장춘각(藏春閣)은 도서관, 별주(別廚)는 수라간, 분봉상시(分奉常寺)는 제사준비실 기능을 했습니다. 수원시는 1989년부터 2002년까지 화성행궁 1단계 복원사업(482칸)을 마쳤으며, 2003년부터 우화관, 장춘각, 분봉상시, 별주 등 화성행궁의 4개 시설물 94칸을 복원하기 위한 2단계 사업이 진행 중입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1800) 행궁전도(行宮全圖)  <참고자료>


2단계 복원사업()이 완료되면 위의 행궁전도(行宮全圖) 그림과 같은 모습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 1단계 복원사업이 완료된 『화성행궁(華城行宮)』과 『화령전(華寧殿)』의 현재 모습



'화성행궁'과 '화령전' <google참고사진>



                          

화성행궁(華城行宮) 둘러보기




             화성행궁(華城行宮) 전도 <google참고사진>



■  홍살문(紅箭門)




행궁 앞 홍살문(紅箭門) [왕궁, 관아, 왕릉 앞에 세우는 붉은 문으로 화성행궁 입구를 나타냅니다.]



   

                                                                         홍살문 위치 []



■  신풍교(新豊橋)



신풍교(新豊橋)


 왕궁 앞에는 금천(禁川)인 명당수와 명당수를 건너는 금천교가(禁川橋) 있는데, 화성행궁에는 신풍교가 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신풍교 위치 []



■  하마비(下馬碑)



 행궁 앞 하마비(下馬碑)





   

                                                                         하마비 위치 []



■  느티나무



행궁 앞 느티나무 3그루


행궁 앞 3그루의 느티나무는 350여 년의 고목으로 궁월의 조경제도에 의해 (:품)자 형태로 심어진 것입니다.







  

                                                                              느티나무[보호수] 위치 []



■  화성행궁(華城行宮) 입구



화성행궁 [사적제478호]


  행궁 앞 화성전도(華城全圖)



   화성전도(華城全圖) <참고사진>


                       화성행궁(華城行宮) 안내판


화성행궁 시설물



                        화성행궁 모형도


정조(正祖) 어필 "화성행궁(華城行宮)"


정조17년(1793), 정조(正祖)의 글씨로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지만, 이 현판의 원래 위치가 궁금합니다.


 화성행궁 복원 기념비





  


                                                                    화성행궁 입구 위치 []





   신풍루(新豊樓)



 신풍루(新豊樓) : 화성행궁의 정문


신풍루(新豊樓)는 화성 행궁의 정문으로 외삼문에 해당하는데 정조14년(1790)에 2층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鎭南樓)라고 이름지었고 편액은 화성부 유수 조심태(趙心泰, 영조16년/1740 ~ 정조23년/1799)가 썼습니다. 정조18년(1794)에 증축하였고, 2층 구조로 위층은 마루 바닥을 만들고 아래는 3개의 널문을 설치하였습니다. 정조19년(1795) 이 문의 이름은 진남루에서 신풍루(新豊樓)로 변경되였습니다.



<사진자료>


                                                                 1907년 신풍루 [헤르만 산더]  <참고사진>


1910년대 신풍루 <참고사진>



                                                            신풍루도[정리의궤] <자료출처: 자유당건축>


정리의궤의 그림을 보면 1층 나무기둥 없이 전체가 석재기둥으로 되어있으나 1907년 사진에는 상부에 목재기둥이 있고 하부는 장초석으로 구분되어 있다. 정리의궤(整理儀軌)는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로 조선시대 정조19년(1795)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화성(華城: 지금의 수원 성곽)에서 벌인 정조(正祖)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의 회갑연을 기록한 의궤입니다.  





'신풍(新豊)'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나라 고조가 '신풍 땅은 새로운 또 하나의 고향' 이라고 한 고사(故事)에서 유래한 것으로 정조에게 화성(華城)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원래 신풍루의 편액은 정조가 총애하던 당대의 명필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1799)'으로 하여금 쓰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걸려있는 「신풍루(新豊樓)」 글씨는 정확히 누구의 글씨인지 그 이력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조19년(1795) 을묘(乙卯)년 행차시에 신풍루 앞에서는 정조가 친히 참석하여 화성부의 사민(四民 : 원래는 사농공상의 모든 백성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홀아비, 과부, 독신자, 고아 등 의지할 곳 없는 사람을 말함)에게 쌀을 나누어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수원시자료>



                                                                    신풍루사미도(新豊樓賜米圖) <참고자료>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실린 신풍루사미도(新豊樓賜米圖)입니다. 정조19년(1795) 을묘년 능행차때 정조가 직접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백성들에게 쌀을 하사하는 장면을 담은 그림입니다.


                            

신풍루(新豊樓) 뒷모습



    

                                                                        신풍루 위치 []





  집사청(執事廳)



 집사청(執事廳)


집사(執事)는 주인을 모시고 살림을 맡아하는 사람들로 행궁의 집사청(執事廳)은 궁궐의 액정서[掖庭署: 국왕이 쓰는 붓과 먹, 벼루 등을 보관하며 대궐안의 열쇠를 간수하고 여러가지 설비, 비품을 관리하는 관청]와 같이 잡다한 사무를 보던 집사들이 사용하던 건물입니다. <수원시자료>



                                             집사청(執事廳)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두 채의 건물로 형성된 집사청  <참고사진>


집사청(執事廳)은 좌익문 밖 동북쪽 담 안에 위치하며 정조13년(1789)에 세웠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 옛 모습대로 복원된 것이며, 좌우 두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원문화재단>


집사청 중앙3칸에 마련된 조선시대 궁중의상(宮中衣裳) 모형



   

집사청 위치 []



■  느티나무(槻木) 소원빌기



 느티나무 소원빌기


"높이는 30m, 둘레는 6m에 이르며 1982년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화재로 인해 훼손되어 수원시는 2003년 5월 대대적인 나무살리기 작업을 하였으며 현재의 위용을 보여주고 있다." <안내판>




 


                                                    소원빌기 느티나무 위치[]



■  중약문(重鑰門)



          중약문(重鑰門)과 쉼터 <참고사진>


중약문(重鑰門)


중약문(重鑰門)은 정조18년(1794)년에 세운 우화관[于華館: 복원중]의 정문으로 남향을 하고 있습니다. 중약문은 원래 중양문(中陽門)의 옛 이름으로 중양문 자리에 있던 현판을 옮겨 달았습니다. 중약(重鑰)이란 ‘거듭 자물쇠를 채운다’ 는 뜻입니다. <수원시자료>


                                                              중약문(重鑰門) 현판 <참고자료>


원래의 편액은 영,정조시대 문신(文臣) 서유방(徐有防:1741∼1798)이 썼으나, 현 글씨는 서예가 근당(槿堂) 양택동(梁澤東, 1947~)씨가 썼습니다.


          쉼터[중약문 밖에 관람객을 위해 휴식공간을 마련해 놓았습니다.]  <참고사진>



 


                                                                                        중약문 위치 [],  쉼터 위치 []




북군영(北軍營)




북군영(北軍營) 정면 출입구


북군영(北軍營)  <참고사진>


북군영(北軍營)은 장용외영(壯勇外營)*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入直宿衛)하는 건물입니다. 정조13년(1789)에 처음 지었고, 정조18년(1794) 좌우에 익랑(翼廊)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정조22년(1798)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 우열은 파하고 1,2,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습니다. <수원시자료>


장용외영(壯勇外營)


장용영(壯勇營)은 즉위 초에 설치된 숙위소(宿衛所)의 혁파 이후 1785년(정조 9년)에 설치된 금군(禁軍) 조직으로서의 호위친병 장용위(壯勇衛)를 확대·발전시킨 군영이었습니다. 장용영은 내영(內營)과 외영(外營)으로 구성되며 외영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이 장용외영이 바로 수원에 주둔하였습니다. <문화콘텐츠 용어사전>





                                 북군영(北軍營)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북군영 뒷면과 행각



                                     스탬프 찍기


화성행궁 곳곳에 있는 10개의 스탬프를 찾아 용지에 찍어가며 재미있는 화성행궁 투어를 할 수 있으며, KBS 해피선데이 '1박 2일'에서 아침식사 복불복으로 진행했던 스탬프 체험입니다. <수원시자료>





 


                                                                            북군영 위치 []




  좌익문(左翼門)



좌익문(左翼門)


좌익문(左翊門)은 행궁의 중심선에 있는 문으로 중양문(中陽門) 앞 동쪽에 있는 중삼문(中三門)입니다. '좌익(左翼)'이라는 이름은 '곁에서 돕는다' 는 뜻으로, 내삼문(內三門)인 중양문을 바로 앞에서 도(道)와 행궁(行宮)을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수원시자료>

                              


좌익문(左翊門) 1914년  <여유당건축 참고사진>


좌익문(左翼門)


좌익문(左翊門)은 정조14년(1790)년에 세웠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파괴된 후 1998년 12월 복원된 것입니다. <수원시자료>


                                                             좌익문(左翊門) 현판 <참고자료>


좌익문(左翊門)의 편액은 정조대의 문신(文臣) 정동준(鄭東浚: 1753∼1795)이 썼는데 없어지고, 현 글씨는 서예가 동강(東江) 조수호(趙守鎬.1924.12.15∼2016.11.10)씨가 썼습니다.


좌익문(左翊門)의 남쪽 행각


좌익문(左翊門)의 남쪽 행각의 끝은 외정리소(外整理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대장금 촬영지에 세워진 모형


                        화성행궁은 드라마 대장금(大長今) 촬영지이기에 이영애, 지진희씨 모형이 세워져 있습니다.


                                                     

                                                      모형 위치[]


좌익문(左翊門)의 뒷모습 [중양문에서 본 좌익문]


 

  


                                                                                  좌익문 위치 []




 중양문(中陽門)



중양문(中陽門)


중양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三門 : 정전에 이르기까지 바깥, 중간, 안쪽에 차례로 설치한 대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內三門)입니다. 중양문의 명칭은 패(沛) 땅의 옛 이름을 따서 붙인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는데, 봄의 방위(方位)인 동향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봄의 별칭인 양중(陽中)을 뜻하는 것으로 정조의 행차는 대부분 정월(正月)에 행하여 졌으므로, 봄에 행차하여 행궁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습니다. <수원시자료>

중양문(中陽門)


중양문(中陽門)의 옛 이름은 중약문(重鑰門)이었는데 현판 역시 우화관(于華館) 정문으로 옮기면서 중양문(中陽門)으로 고쳐 달았습니다. 정조14년(1790)에 완성되었으며, 중앙의 정문과 좌우의 우협문, 좌협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문 좌우로 긴 행각을 두어 출입을 통제하였습니다. 1795년 봉수당(奉壽堂) 진찬례(進饌禮) 때 봉수당 앞으로는 정조와 혜경궁을 비롯한 왕실의 종친과 대신들이 자리하였고, 중양문 밖으로 대문을 활짝 열어 승지와 사관, 각신이 반열을 이루었던 바 있습니다.  <수원시자료>


                                       중양문(中陽門) 현판 [동강(東江) 조수호(趙守鎬.1924.12.15∼2016.11.10)씨의 글씨] <참고자료>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참고자료>
 
      1795년 윤2월 13일 화성행궁의 봉수당에서 거행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그린 조선시대 기록화.



중양문(中陽門)의 뒷모습 [봉수당에서 본 중양문]



 


                                                                            중양문 위치 []  



유여문(維與門)



유여문(維與門)


유여문(維與門)은 유여택(維與宅)의 정문으로 전면 마당의 우측 행각(북행각)이 전면 동행각과 만나는 부분에 설치된 문으로 행궁 주축의 좌익문과 중양문 사이 마당에서 유여택으로 가는 문이며, 정조20년(1796)에 세웠습니다.



유여문(維與門)


유여(維與)의 뜻은「시경」 중 '주나라가 천명을 받아, 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크게 하였고 이 집을 주었다'는 것으로 정조가 화성 유수에게 화성을 크게 하고 집을 주었다는 뜻이 됩니다.   <자료: 여축>


                                              유여문(維與門)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유여문 위치 []



■ 솟을삼문



중양문(中陽門)좌익문(左翼門) 사이의 마당 북쪽에 위치한 솟을삼문  <사진자료>



 

                                                               솟을삼문 위치 []




 봉수당(奉壽堂)




 봉수당(奉壽堂)


봉수당(奉壽堂)은 임금 행차시 정전(正殿)으로 쓰인 건물로 중심 4칸을 왕권을 상징하는 편전 공간으로 연출하였습니다. 평상시에는 화성 유수부[한양을 방위하는 거점도시의 역할을 하였으며, 현대의 광역시 규모]의 동헌(東軒) 건물로 유수[현대의 도지사급]가 집무하던 곳으로 '장남헌(壯南軒)'이라고도 합니다. 이 건물은 원래 정조13년(1789) 9월 완공 되었고, 정조18년(1794)에 지금의 규모로 증축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파괴되었다가 1997년 복원 되었습니다. <수원시자료>


                           


봉수당(奉壽堂)


정조19년(1795) 정조(正祖)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회갑연(回甲宴) 진찬례(進饌禮)를 이 건물에서 거행 하였습니다. 이 때 정조는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홍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뜻의 봉수당(奉壽堂)이라는 당호를 지었습니다. <수원시자료>





봉수당 회갑연 재현 장면 <참고사진>


정조는 혜경궁 회갑연을 마치고 9년뒤인 1804년에 혜경궁의 70수연(壽宴) 진찬을 봉수당에서 갖겠으니 사용할 물건을 잘 보관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진찬례 행사는 조선시대 최대의 궁중행사로 당시의 커다란 화제거리였으며, 왕실의 종친과 신하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참여 하였습니다.


봉수당(奉壽堂) 현판 [정조대의 문신이자 명필인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썼으며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음]



                           삼도(三道)






봉수당 위치 []  



■  봉수당에서의 진찬연[연출]




         <참고사진>


                <참고사진>




■  봉수당의 어좌 [연출]



 어좌(御座): 옥좌(玉座) 또는 보좌(寶座)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  정조대왕 처소[연출]



           <참고사진>



              



■  헤경궁 홍씨(惠慶宮洪氏) 회갑연 진찬 모형



봉수당 마당 오른쪽 행각에 전시해 놓은 진찬 모형 [<참고사진>


 

진찬 모형 <참고사진>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참고자료>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6호.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56.2㎝, 가로 65㎝.「봉수당진찬도」는 원래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8폭 병풍의 첫 번째 폭에 해당되는 그림입니다. 현재 소장처에는 나머지 7폭을 제외한 이 한 폭만이 독립된 화축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화성능행도병』은 능행을 주관했던 정리소(整理所)에서 이를 기념하여 만든 병풍입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봉수당과 장락당 행각의 환관, 상궁, 나인의 모습  [연출]



봉수당과 장락당 서쪽 행각에는 아래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어 있습니다.


                           글읽는 환관 [연출] <참고사진>





                                     채비하는 환관 [연출] <참고사진>


    

                            단장하는 상궁[연출] <참고사진>




                             나인처소[연출] <참고사진>


                      



■  건장문(建章門) 



 건장문(建章門) 과 봉수당 월대 북쪽의 드므, 향로


건장문(建章門)은 봉수당 우측 행각(북행각)에서 아래(동쪽)로 꺾인 행각의 둘째 칸에 있는 문으로 노래당, 낙남헌과 통합니다.  봉수당 우측부터 건장문에 이르는 행각은 정조18년(1794)에 새로 지은 것이고, 건장문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행각[樓上庫]은 이전에 지어진 것입니다.

                                  건장문(建章門)


     건장(建章)이란 한나라의 궁전 이름입니다. 그리고 창경궁의 세자궁인 건극당(建極堂)의 여러 정문 중 건장문도 있었습니다.


                                       건장문(建章門) 현판 [서예가 백농(白農) 한태상(韓泰相,(?)의 글씨] <참고자료>


 

                                                                           건장 위치 []



■  어천문(於千門)과 삼수문(彡壽門) 



봉수당 북쪽에 위치하는 어천문(於千門)과 삼수문(彡壽門)은 같은 문입니다. 봉수당 뒷쪽에서 노래당 방향으로 보면 어천문(於千門)이란 현판이, 노래당 방향에서 봉수당쪽으로 보면 삼수문(彡壽門)이란 현판이 붙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어천문(於千門)


봉수당(奉壽堂)의 서북행각의 다섯 번째 칸에 설치된 문으로 봉수당 후정에서 북향하는 득중정(得中亭)의 후정(後庭)으로 통하는 득한문(得閒門)으로 가는 길에 있는 문(門)입니다.


                                              어천문(於千門) 현판  <참고자료>


 

                                                        어천문(於千門) 위치 []



■  경선문(慶善門)




경선문(慶善門)


유여택(維與宅)의 북쪽 문인 연희문(延暉門)을 통해 서쪽으로 나가면 북쪽 담장에 있는 문으로 이 문을 지나면 봉수당의 앞 마당이 된다. 경선문의 뜻은 당나라 태종이 태어난 고택의 이름이 경선궁으로 당태종이 경선궁에 행차하여 잔치를 베풀고 시를 지어 악기로 연주 하도록 하고 이를 〈공성경선악(功成慶善樂)〉이라 명명하였으며, 동자(童子)를 시켜 구공무(九功舞)를 추게 하였다. 《資治通鑑 卷194 唐紀 太宗文武大聖大廣孝皇帝上之下》에서 온 말입니다.


                  경선문(慶善門) 현판 [정조대의 문신(文臣) 관암(冠巖) 홍경모(洪敬謨, 1774∼1851) 글씨를 집자 (集字)함]  <참고자료>


 

                                                         경선문(慶善門) 위치 []





 경룡관(景龍館)



경룡관(景龍館)


경룡관(景龍館)은 정조18년(1794)에 건립되었으며 헌경왕후(혜경궁홍씨)의 처소인 장락당(長樂堂)의 외문(外門)으로 사용한 부속 건물입니다. 건물은 2층 구조의 건물로 2층은 모두 마루를 깔아 누마루를 만들고, 아래층은 3칸의 널문을 만들어 지락문(至樂門)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수원시자료>




<수원문화재단 참고사진>


'경룡(景龍)'이란 제왕(帝王)을 상징하는 큰 용을 뜻하는 것으로 당태종(唐太宗)이 거처한 궁궐 이름에서 따 왔습니다. 당태종은 정관지치(貞觀之治)로 일컬어진 훌륭한 정치를 펼쳐 당나라를 굳건한 반석 위에 올려놓고 태평성세를 구가하여 제왕의 모범으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정조는 당태종의 궁궐 이름을 차용한 이 건물에서 휴식을 취하며 조선의 태평성세를 구현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수원시자료>


                                

                                 경룡관(景龍館) 현판


정조18년(1794)에 세워진 경룡관의 편액은 정조대의 문신(文臣) 천은(天隱) 조종현(趙宗鉉, 1731∼1800)이 썼지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며 현재의 현판 글씨도 누가 썼는지 알려지지 않습니다.  <수원시자료>



■ 지락문(至樂門)



  <참고사진>

    지락문(至樂門)  <참고사진>


장락당(長樂堂)으로 들어가는 누문(樓門)인 경룡관(景龍館)의 1층에 설치된 3칸 판문(板門)입니다. 행궁지 발굴조사에서 장대석열이 노출되어 정확한 위치가 확인되었습니다.

                                         지락문(至樂門)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지락문 위치 []  




 장락당(長樂堂)




 장락당(長樂堂)


장락당(長樂堂)은 봉수당 남쪽에 위치하여 동향으로 봉수당의 서남쪽 지붕과 겹쳐 있으며, 정조18년(1794) 화성 성역 중에 완성되었습니다. 정조19년(1795) 을묘원행 중에는 헌경왕후(獻敬王后, 혜경궁홍씨)의 침전(寢殿)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장락당은 일제강점기 때 훼철되었다가 1997년 복원되었습니다.<수원시자료>




장락당(長樂堂)


장락당은 전한(前漢)의 도읍인 장안성(長安城)의 궁전이었던 장락궁(長樂宮)에서 이름을 따 왔습니다.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기원하였던 정조는 한(漢)나라 태후의 거처였던 장락궁의 이름을 따 행궁의 내전인 장락당의 편액을 직접 써서 걸었습니다. 정조가 쓴 현판은 현재 문화재청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건물 주변의 출입문은 동서로 다복문(多福門)과 장복문(長福門)이 있고 앞마당 앞[동쪽]에 지락문(至樂門)이 있습니다. <수원시자료>


                                            장락당(長樂堂)  현판 [정조 임금의 글씨]  <참고자료>



■  침소에 들기전 헤경궁 홍씨 [연출]






 

                                                               장락당 위치 []  




■  헤경궁 홍씨 회갑연 진찬상 모형



헤경궁 홍씨 회갑연 진찬상 모형 [ 장락당과 다복문 사이 행각] 




장락당(長樂堂)의 외문(外門)으로 사용한 지락문(至樂門)  <참고사진>

                        


다복문(多福門)과 장복문(長福門)



 다복문(多福門)과 장복문(長福門)


장락당(長樂堂)의 전면 마당에서 좌측에 있는 담장에 설치된 복내당(福內堂)으로 통하는 협문(夾門)입니다. 담장에는 2개의 문이 있는데 서쪽이 다복문(多福門)이고, 동쪽이 장복문(長福門)입니다. 두 개의 문 모두 정조 18년(1794) 행궁 증축시에 장락당과 함께 지어졌습니다.


                     

                       다복문(多福門)


                                 다복문(多福門)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장복문(長福門)


장복문(長福門)


                                        장복문(長福門) 현판 [서예가 취송(翠松) 정봉애(鄭鳳愛)씨의 글씨]  <참고자료>


 

                                                       다복문과 장복문 위치 []




 복내당(福內堂)




복내당(福內堂)


복내당(福內堂)은 행궁의 내당(內堂)으로 정조(正祖)가 행차시에 머물렀던 곳이며, 장락당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복내당은 정조

13년(1789)에 수원부 신읍치소의 내아(內衙)로 건립되었고, 정조18년(1794)에 증축하였으며, 동향(東向) 건물입니다. <수원시자료>


                          


                                              복내당(福內堂) 현판  <참고자료>


정조18년(1794) 2월 정조가 화성행궁 행차시에 복내당 현판을 직접 써서 달았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글씨는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가 썼습니다.




복내당(福內堂)의 이름은 “복은 안에서 생겨나는 것이다(福生於內).”라는 뜻입니다.


대장금 재현모습 [연출]


복내당 대청에는 드라마 ‘대장금’에 등장했던 장면을 재현(?)한 것으로 보이는 모습이 연출되어 있습니다.


복내당 부엌 <참고사진>


       복내당 부엌[연출] <참고사진>




 복내당 뒤뜰




 복내당 뒤뜰, 아래사진의 설치물이 있는 곳[] <참고사진>



                        복내당 뒤뜰 남쪽 행각의 출입문 안의 설치물[무슨 의미의 설치물인지 알지 못합니다.]


 복내당 건물 주변의 출입문 위치 []


복내당(福內堂) 건물 주변의 출입문은 외행각 남쪽 끝에 구복문(求福門), 동쪽에 구여문(九如門)이 있으며, 동행각의 유복문(維福門)이 있어 유여택의 뒤뜰과 통할 수 있습니다.



구복문(求福門)



외행각 남쪽 끝의 구복문(求福門) <참고사진>


구복문 안쪽 <참고사진>


                                  구복문(求福門)



구여문(九如門)



구여문(九如門)


복내당 건물과 붙여 남향으로 문을 낸 남쪽 문입니다. 구여(九如)의 뜻은 신하가 임금에게 송축하는 말로「시경(詩經)」 소아(小雅) 천보(天保)에 나오는 9개의 여(如)자가 들어 있는 축가 1. 산 같이  2. 언덕 같이 3. 산등성이 같이 4. 구릉 같이  5. 시내물이 막 흘려 오듯이 6. 달이 언제나 기울면 차듯이  7. 태양이 언제나 떠 오르듯이 8. 언제나 변하지 않는 남산같이  9. 언제나 무성한 송백(松栢)같이.


                                   구여문(九如門)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참고사진>



유복문(維福門)



 유복문(維福門)  <참고사진>


복내당(福內堂)의 정문으로 복내당의 정면인 동쪽행각에 있으며, 현재는 솟을대문으로 복원되어 있습니다. 복내당은 유복문(維福門) 을 정문으로 다복문(多福門)과 장복문(長福門)이 있어 복이 많은 곳이 되길 바라는 정조의 마음이 보입니다.


                                                 유복문(維福門)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사진>

                               

         유복문(維福門)  <참고사진>



                                  복내당에서 본 유복문  <참고사진>



■ 임금의 수라상 [모형]



 임금의 수라상 [모형]




■ 드라마<대장금> 속 수라간 [모형]



 드라마<대장금> 속 수라간 [모형]


 드라마<대장금> 속 수라간 [모형]



  임금의 수라상과 드라마 속 수라간 모형  <참고사진>


                       임금의 수라상과 드라마 속 수라간 모형이 있는 위치 []




 유여택(維與宅)



유여택(維與宅) <참고사진>


유여택(維與宅)은 평상시에 화성 유수가 거처하다가 정조(正祖)가 행차시에 잠시 머무르며 신하를 접견하는 건물입니다. 정조19년(1795) 행차시에 정조는 이곳에서 각종 행사에 대한 보고를 받고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습니다. 1800년 정조가 승하(昇遐)한 다음 현륭원 재실에 모신 어진과 창덕궁 주합루(宙合樓)에 모신 대본(大本) 어진(御眞)일체를 순조1년(1801) 화령전(華靈殿)을 건립하기 전까지 이 곳에 잠시 봉안하였습니다.  <수원시 자료>



유여택이라는 이름은『시경(詩經)』에서 주(周)나라가 천명을 받은 유래를 말하고 문왕(文王)의 덕을 칭송한 구절인 “상제께서 모두 물리치시고 나라의 규모를 크게 하리라. 이내 서녘을 돌아보시고 이 집을 주었다(上帝耆之 憎其式廓 乃眷西顧 此維與宅).”에서 따왔는데, 정조의 입장에서는 화성 유수를 임명하여 내려보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수원시 자료>



원래 유여택은 정조14년(1790)에 건립하고 은약헌(隱若軒)이라 하였다가, 정조20년(1796)에 증축하면서 유여택으로 이름을 바꿔 달았습니다. 건물은 동향으로 앞쪽에 공신루(拱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유여택은 복내당 동쪽 행각과 외정리소 사이에 있으며, 현재의 건물은 1998년 복원되었습니다. <수원시 자료>




                                                             유여택(維與宅) 현판  <참고자료>


유여택(維與宅)이란 편액은 원래 정조(正祖) 때의 문신 유사모(柳師模)가 썼지만 현재 걸려있는 현판은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입니다.


유여택 중앙 대청에는 어좌(御座)가 놓여있고 뒤에는  장남헌(壯南軒)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참고사진>



  

                                                                    장남헌(壯南軒) 현판  <참고자료>


글씨는 정조가 썼으며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있습니다. 장남헌(壯南軒)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의 동헌 건물로 현재의 봉수당(奉壽堂)을 말합니다. 장남헌(壯南軒)의 현판이 왜 유여택에 걸려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공신루(拱宸樓) <참고사진>


유여택(維與宅) 건물의 북쪽에는 동향으로 앞쪽에 공신루(拱宸樓) 1칸을 덧붙여 휴식 공간으로 이용하였습니다.


                          공신루(拱宸樓) 현판 [서예가 동강(東江) 조수호(趙守鎬.1924.12.15∼2016.11.10)씨의 글씨]  <참고자료>


 

                                                                               유여택 위치 []



 

유여택(維與宅) 건물 주변의 출입문은 서쪽에 향춘문(向春門), 북쪽 부속 건물에 연휘문(延暉門), 남쪽에 가어문(嘉魚門)과 경화문(慶華門), 북쪽에 유여문(維與門)을 두었고 동쪽에 빈희문(賓曦門)을 설치했는데 빈희문에서 외정리소로 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향춘문(向春門)



   향춘문(向春門) <참고사진>


유여택(維與宅) 건물에는 남,북 행각이 붙어있는데 북쪽에 있는 문이 연희문(延暉門)이고 남쪽 행각에 있는 문이 향춘문(向春門)입니다. 향춘문의 뜻은 '양지의 꽃나무엔 봄이 쉬 찾아드네(向陽花木易爲春)'라는 시구에서 뜻을 취하였고, 정조는 고양군의 관아 동헌의 편액의 이름에도 사용했다.


                                                         

                                       향춘문(向春門) <참고사진>


                                                    향춘문(向春門)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향춘문(向春門)




연휘문(延暉門)



연휘문(延暉門)


유여택(維與宅)은 정조18년(1794)에 세웠으며, 북행각의 끝단에 설치된 문으로 봉수당 남행각과 직각으로 만납니다. 유여택 전면의 빈희문(賓曦門)도 전면 행각의 우측 끝단에 있으므로 빈희문 밖에서 보면 연휘문이 바로 보입니다.  연휘문(延暉門)이란 "밝은  빛을 맞이한다"는 뜻이며 경복궁 교태전의 뒤뜰 건순각으로 들어가는 문의 이름과 같습니다.


                                     연휘문(延暉門) 현판 [서예가 취송(翠松) 정봉애(鄭鳳愛)씨의 글씨(?)]  <참고자료>



가어문(嘉魚門)



가어문(嘉魚門)


유여택(維與宅)의 남쪽에 있는 문으로 가어(嘉魚)는 곱고 맛있는 물고기로 '시경(詩經)' 에 나오는데 " 잉어의 바탕에  붕어의 살"이라는 뜻입니다.


                                     가어문(嘉魚門) 현판 [서예가 근당(槿堂) 양택동(梁澤東, 1949~)씨의 글씨]  <참고자료>




경화문(慶華門)



 경화문(慶華門) <참고사진>


경화문(慶華門)은 유여택(維與宅)의 좌우 행각과 함께 정조20년(1796) 여름에 세웠는데, 유여택의 남쪽 행각 세 번째 칸에 설치된 문입니다.  경화(慶華)란 '경사와 영화'를 뜻하는 것으로 사도세자가 생전에 입춘일(立春日)에 주련(柱聯)에 붙일 시를 "경화는 편안함으로 말미암아 시작한다"란 쓴 적이 있었습니다.


   경화문(慶華門) <참고사진>


                                                    경화문(慶華門)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유여문(維與門)



                    유여문(維與門)


유여문(維與門)은 유여택(維與宅)북쪽 행각 끝에 있는 문으로 이 곳을 나가면 중양문(中陽門) 뜰로 나가게 됩니다.


                                     유여문(維與門)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빈희문(賓曦門)


빈희문(賓曦門)


유여택(維與宅)의 전면 동행각의 북쪽 끝단에 설치된 문으로 외정리소로 통하는 2칸 문입니다. 동행각은 유여택(당시 은약헌)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20년(1796)에 행각 외부로 외정리소(外整理所)를 지으면서 북쪽 끝 공랑 2칸을 문으로 변경한 것입니다.


                                    빈희문(賓曦門)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쪽문



 쪽문[ <참고사진>


유여택의 남쪽기단에 있는 작은 판문으로 이 쪽문은 별도의 이름이 없고 문 위에는 홍살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유여택 뒤에서 본 쪽문  <참고사진>



앙부일구(仰釜日晷)



유여택 앞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앙부일구는 세종 16년(1434)에 장영실, 이천, 김조 등이 만들었던 해시계로 시계판이 가마솥같이 오목하고, 이 솥이 하늘을 우러르고 있다고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둥근 지구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안쪽에는 시각선, 계절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뒤주[연출]




  <참고사진>






 외정리소(外整理所)




                외정리소(外整理所)


정리소(整理所)는 정조19년(1795) 을묘원행에서 펼쳐질 각종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정조18년(1794) 12월에 설치한 임시 기관이었는데, 화성 성역이 끝난 후 외정리소(外整理所)라 하여 정조를 비롯한 역대 임금이 행차할 때 화성 행궁에서의 행사 준비를 담당하는 관청이 되었습니다. <수원시 자료>



                        

           

        외정리소 아문(外整理所衙門) <참고사진>


정리소(整理所)는 수도방위를 담당한 장용내영(壯勇內營) 조방(朝房:소속 관원들이 조회하는 건물)에 설치하였는데, 정조20년(1796) 화성 행궁이 완공되면서 유여택(維與宅) 앞에 외정리소를 세우고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이란 현판을 달았습니다. <수원시 자료>


                                    외정리아문(外整理衙門)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외정리소(外整理所)  <참고사진> 


외정리사(外整理使)는 호조판서가 겸임(兼任)하는 것이 상례(常例)였으나 화성의 경우는 화성 유수가 겸직하였습니다. 외정리소 건물은 유여택 앞쪽에 위치하였는데 빈희문(賓曦門) 밖의 동쪽 행각을 수리하여 지은 것입니다.  <수원시 자료>



외정리사(外整理使)가 행사 준비를 정리하는 장면을 연출한 곳 [<참고사진>


                            

                        외정리사(外整理使)가 행사 준비를 정리하는 장면 [연출]



 기층헌(起層軒)


                                   기층헌(起層軒)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기층헌(起層軒) 내부에 악기 배열






유여택(維與宅)에서 빈희문(賓曦門)을 나오면 외정리소(外整理所)입니다.


 

                                                  외정리소 [], 외정리아문 위치 []





 비장청(裨將廳)





비장청(裨將廳) <참고사진>


비장청(裨將廳)은 화성 유수부의 비장(裨將)들이 사용하던 건물로 외정리소 앞에 있는 남향 건물입니다. 원래는 정조13년(1789)에 세웠는데 정조20년(1796)에 서리청(書吏廳) 건물을 수리하고 비장청으로 변경하여 사용하였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 복원한 것입니다.  <수원시 자료>




 비장청(裨將廳)


비장(裨將)은 관찰사나 절도사 등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던 막료(幕僚)로 조선 후기에는 방어사를 겸한 수령들까지 모두 비장을 거느리는 것을 관례화하여 민정 염탐을 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수원시 자료>


                                                  비장청(裨將廳)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비장청 동문 <참고사진>


    비장청 행각과 정문 <참고사진>



비장청 뒤쪽의 비장청 북문


                                                               비장청 위치 []




서리청(書吏)



 서리청(書吏廳)


서리청(書吏廳)은 비장청 (裨將廳) 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남향입니다. 예전의 금도청(禁盜廳) 건물을 증축하여 사용하였으며, 정조19년(1795) 을묘원행시에는 수라간(水剌間) 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 복원한 것입니다.  <수원시 자료>



 서리청(書吏廳)


서리(書吏)는 문서의 기록 및 수령, 발급을 담당하는 아전(衙前)으로 서리청(書吏廳)은 그들이 사용하는 건물입니다.


                                   서리청(書吏廳)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서리청의 서쪽문  <참고사진>


  서리청 행각과 정문 <참고사진>


서리청의 북쪽문과 동쪽문 <참고사진>





    서리청 북쪽문 <참고사진>



 서리청의 동쪽문 <참고사진>



 

                                                                              서리청 위치 []





남군영(書吏)




 남군영(南軍營) 및 행각(行閣)


남군영(南軍營)은 신풍루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조13년(1789)에 처음 지었고, 정조18년(1794) 좌우에 익랑(翼廊)을 증축하여 모두 62칸의 규모를 갖추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2002년 7월 복원된 것입니다. <수원시 자료>


                                            남군영(南軍營) 현판 [서예가 근당(槿堂) 양택동(梁澤東, 1949~)씨의 글씨] <참고자료>



 남군영(南軍營)

 

남군영은 북군영과 마찬가지로 장용외영의 기마병이었던 친군위(親軍衛)가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入直宿衛)하는 건물입니다. 정조22년(1798) 장용외영 군영의 일대 개편에 따라 좌,우열은 파하고 1, 2, 3번의 입번 순서를 정하여 매년 각 100명씩 양 군영에 나누어 배치하였습니다. <수원시 자료>


  남군영과 행각및 정문 <참고사진>


남군영 행각 <참고사진>


                     남군영 정문 <참고사진>


 

                                                                             남군영 위치 []




노래당(老來堂)




 노래당(老來堂)


정조18년(1794)에 행궁을 증축할 때 새로 지었으며, 북쪽으로 낙남헌(洛南軒)과 이어져 있고, 남쪽으로는 득중정(得中亭)과 통합니다. 낙남헌 서쪽 1칸과 이어져 동향으로 자리하여 낙남헌과 ㄱ자를 이루고 있는 건물로서 팔작지붕집입니다.  <수원시 자료>


 노래당(老來堂)


노래당은 정조가 왕위에서 물러나 노후생활을 꿈꾸며 지었다는 건물로 낙남헌(洛南軒)과 득중정(得中亭)에서 펼쳐지는 여러 행사 도중 휴식을 취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노래(老來)란 말은 ‘늙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편안히 살면 그곳이 고향이다’라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따온 것입니다. <수원시 자료>


                                  노래당(老來堂) 현판 <참고자료>


                             현판은 채제공(蔡濟恭)이 썼으나 전하지 않으며, 이 글은 정조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고 합니다.


 봉수당과 연결되는 건장문(建章門)과  노래당의 난로문(難老門)


                          난로문(難老門)


노래당(老來堂) 전면 마당의 중앙에 있는 정문으로 벽돌로 만든 홍예문의 이름입니다. 난로문은 화성 행궁에서의 즐거운 생활을 늙지 않고 오래도록 지속하고 싶다는 뜻으로 화성을 노후(老後)의 안식처로 삼겠다는 정조의 뜻이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수원시 자료>


난로문과 가풍문



 가풍문(歌風門)


노래당 동쪽 담장 북쪽 끝 낙남헌과 연결되는 부분에 단선(單扇 : 한쪽으로 된 문)으로 만든 가풍문(歌風門)이 있습니다. 가풍문은 화성에서 노래하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으로 난로문(難老門)과 같이 화성을 노후(老後)의 안식처로 삼겠다는 정조의 뜻이 들어 있다고 하겠습니다. <수원시 자료>


     화살표 방향으로 진행하면 아래 사진의 장소가 나옵니다. <참고사진>





 

                                                                            노래당 위치 []





 낙남헌(洛南軒)




낙남헌(洛南軒)


낙남헌(洛南軒)은 일제강점기에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남아있는 유일한 건축물로 1972년 경기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낙남헌 건물의 위치는 원래 득중정이 있던 곳으로 득중정을 노래당 옆으로 옮겨 짓고 그 터를 넓혀서 신축하였는데 정조18년(1794)에 완공되었습니다. <수원시 자료>




                                              낙남헌(洛南軒) 현판 <참고자료>


현판은 정조대의 문신 치행(穉行)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이 썼으며 현재 문화재청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낙남헌(洛南軒)이란 이름은 중국 후한(後漢)시대의 도읍(都邑)인 낙양성(洛陽城) 「남궁(南宮)」에서 따왔습니다. 낙(洛)자는 곧 낙양을 의미하고 남(南)자는 정궁(正宮)인 남궁을 뜻합니다.


낙남헌(洛南軒)


낙남헌은 각종 행사를 진행할 수 있도록 행사용 건물로서 공간을 알맞게 배치하였습니다. 동서남 3면으로 분합을 달아 행사가 있을 때에는 분합을 활짝 열어 그 광경을 지켜 볼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앞은 넓은 마당을 만들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동북쪽에는 정조13년(1789) 조성된 득중정지(得中亭池)라고 하는 가운데에 작은 섬이 있는 작은 연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훼손되어 없어졌습니다. <수원시 자료>


 낙남헌 중앙 계단의 면석의 구름문양과 삼태극


낙남헌에서는 정조19년(1795) 을묘원행(乙卯園幸) 때 각종 행사가  치러졌는데,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여 군사들에 대한 호궤(犒饋: 군사들을 배불리 먹임)를 하였으며,  별시(別試)를 치러 문,무과 61명을 선발하여 급제자에게 합격증을 내려 주는 행사[방방(放榜)]도 있었으며, 혜경궁의 회갑을 기념한 양로연(養老宴)도 시행하였습니다. 또한 정조21년(1797)에는 화성유수부의 무사(武士)를 대상으로 활쏘기 시험을 치러 상을 차등에 따라 주기도 하였습니다. <수원시 자료>


   일제강점기 때 낙남헌 <참고자료>


일제강점기 때는 화성 뿐 아니라, 행궁도 의도적으로 파괴 되었는데, 이 낙남헌만은 원래 모습 그대로의 건물로 남겨 두고 수원 군청으로, 신풍 초등학교의 교무실 등 용도를 바꾸어 가며 사용하였습니다.



낙남헌(洛南軒)의 서쪽 3칸은 노래당의 3칸 건물과 하나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화성행행도팔첩병(華城行幸圖八疊屛)


정조가 정조19년(1795) 윤2월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에 걸쳐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묘소에 참배하기 위해 화성(華城)에 행차했을 때 치른 일련의 행사를 그린 궁중행사도.


 

                                              (1)                                <참고자료>                                     (2)


(1):  '화성행행도팔첩병' 中 낙남헌방방도 (洛南軒放榜圖 : 특별 과거시험을 실시한 뒤 합격자를 발표하고 시상하는 그림)

(2):  '화성행행도팔첩병' 中  낙남헌양로연도 (洛南軒養老宴圖 : 나이든 관원과 화성의 노인들에게 경노잔치를 베푸는 장면)



 

                                                               낙남헌 위치 []




득중정(得中亭)




 득중정(得中亭)


득중정(得中亭)원래 정조14년(1790)에 새로 지어 낙남헌 자리에 있었으나 정조18년(1794)에 옮겨지어서 북향으로 노래당과 이어져 있으며, 앞마당에 어사대(御射臺)가 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1998년 12월 복원된 것입니다.



                                              득중정 현판 <참고자료>


                                  득중정이란 편액은 정조의 글씨이며,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득중정(得中亭)


득중정은 『예기(禮記)』「사의(射義)」편에 “활을 쏘아 맞으면 제후가 될 수 있고, 맞지 않으면 제후가 될 수 없다(射中 則得爲諸侯 射不中 則不得爲諸侯).”라고 한 구절에서 ‘득(得)’자와 ‘중(中)‘자를 따서 붙인 것입니다. 선비들이 활쏘기를 하는 주목적은 덕행을 관찰하는 것으로 정곡(正鵠)을 맞춘 사람은 이미 마음속에 덕이 함양되어 있어서 모든 행동이 도리에 맞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수원시자료>


득중정(得中亭) <참고사진>


득중정(得中亭)은 사정(射亭 : 활터에 세운 정자)으로 노래당 남쪽과 이어져 서쪽으로 꺾여진 지점에 세웠습니다.


                              


어사대(御射臺)


정조는 행차시에 매번 활쏘기를 하였는데, 정조14년(1790)에 새로 만들어진 이 정자에서 활을 4발 쏘아 4발 모두 맞히고는 이를 기념하여 ‘득중정(得中亭)’이라고 하였습니다. 득중정에서는 건물을 옮기기 전인 1790년에 정조가 친림(親臨)하여 편액을 쓴 후 광주와 과천 등 연로에 거처하는 유생과 무사를 대상으로 별시를 치러 문과 5인과 무과 175인을 선발하였던 바 있으며, 1792년(정조 16) 원행시에도 정조는 수원의 유생과 무사들을 시험 보아 선발하였습니다. <수원시자료>


                                       화성행행도팔첩병(華城行幸圖八疊屛)


정조가 정조19년(1795)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에 걸쳐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의 묘소에 참배하기 위해 화성(華城)에 행차했을 때 치른 일련의 행사를 그린 궁중행사도.


                                            <참고자료>

            '화성행행도팔첩병' 中  득중정어사도 (得中亭御射圖 : 득중정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고 폭죽을 구경하는 그림)


정조19년(1795) 을묘원행시에는 주간과 야간에 활쏘기를 하였는데 김홍도가 그린『정조대왕 수원능행도』에「득중정어사도」가 남아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서 야간 활쏘기 행사의 모습과 활쏘기가 끝난 후에 실시한 ‘매화시방(埋火試放 : 불꽃놀이)’행사를 구경하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득중정(得中亭)350여년 수령의 「연필향나무」



득중정 남쪽에 위치한 득한문(得閒門)은 봉수당 서행각과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화성행궁 서쪽 끝 행각 벽에는 팔폭병풍도(화성성묘전배도, 낙남헌방방도, 서장대성조도, 봉수당진찬도, 낙남헌양로연도, 득중정어사도, 시흥환어행렬도, 주교도), 화성성역의궤, 정조대왕능행반차도를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복사 부착하여 참고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팔폭병풍도


                       화성성역의궤


정조대왕능행반차도


화성행궁 서쪽 끝 행각과 행궁 후원(後苑)


행궁 후원(後苑)



 

                                                                 득중정 위치 []



득한문(得閒門)



 득한문(得閒門) <참고사진>


득한문(得閒門)은 득중정과 봉수당의 서행각과 연결된 곳에 있는 문으로 낙남헌의 후정(後庭)에서 행궁의 후원(後苑)으로 통합니다. 득한문의 의미는 득중정(得中亭)의 득(得)과 후원에 있는 미로한정(未老閒亭)의 한(閒)을 혼합한 단어로 볼 수 있습니다.


                                  득한문(得閒門) 현판 [서예가 소헌(紹軒) 정도준(鄭道準, 1948~ )씨의 글씨] <참고자료>



삼수문(彡壽門)



 삼수문(彡壽門)


봉수당(奉壽堂)의 서북행각의 다섯 번째 칸에 설치된 문으로 봉수당 후정에서 북향하는 득중정(得中亭)의 후정(後庭)으로 통하는 득한문(得閒門)으로 가는 길에 있는 문(門)입니다. 삼수문(彡壽門)의 뜻은 세 가지의 장수로 상수(上壽:100세), 중수(中壽:80세), 하수(下壽:60세)로 나뉩니다.


                                              삼수문(彡壽門) 현판 <참고자료>


                             정조대의 문신이자 명필인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 1725~1799)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입니다.


 

                                                    득한문(得閒門) [] / 삼수문(彡壽門) 위치 []

                                                         




내포사(內鋪舍)




내포사(內鋪舍)


내포사는 행궁의 뒷담 안 북쪽 기슭에 위치하며 정조20년(1796) 9월에 준공되었는데 온돌 1칸만을 놓았으며, 앞으로 반칸을 물려서 벽돌을 깔았습니다. 내포사는 일제강점기에 훼철되었다가 2006년 복원한 것입니다.



 내포사(內鋪舍)


내포사는 성 밖의 위험을 깃발을 흔들거나 목어를 쳐서 성 안에 알려주어 방어태세를 갖추도록 하는 곳입니다. 왕의 행차가 있을 경우 낮에는 장수 2명, 군사 4명이 지키고, 인정(人定 : 밤 11시경에 야간 통행 금지를 알리는 종소리로 성문을 닫는다) 때 교대하였습니다.



                                    내포사 앞에 목어(木魚)가 메달려 있습니다.


행궁 후원에서 내포사 오르는 계단




 오솔길따라 언덕 위로 오르면 미로한정으로 가는 길입니다.


                                                                               내포사 위치 [] 




미로한정(未老閒亭)



 미로한정(未老閒亭)


미로한정(未老閒亭) 은 정조14년(1790)에 세워졌는데 1칸 6각정으로‘육면정(六面亭)’이라고도 합니다. 건물의 구조는 동쪽만을 비워놓고 5면은 난간을 설치하고 단청을 하였으며 서편 담에 작은 문을 설치하였습니다.


미로한정(未老閒亭)


미로한정은 행궁 후원(後苑 ) 담 안에 만든 정자입니다. 미로한정(未老閒亭)이라는 말은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입니다. 노래당과 함께 갑자년(1804)에 세자에게 양위(讓位)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의 뜻이 담겨진 이름이었습니다.


미로한정(未老閒亭)에서 바라본 행궁


화성 행궁은 창덕궁과 같이 후원을 정원으로 가꾸었는데 미로한정은 행궁 후원에서의 휴식을 위한 부대 시설로 지어졌으며, 이곳에서는 한정품국[閒亭品菊 : 국화꽃 벌여놓고 완상(玩賞)하는 미로한정의 가을 풍경]의 경관이 연출되기도 하였습니다



미로한정(未老閒亭) 현판 [서예가 동강(東江) 조수호(趙守鎬.1924.12.15∼2016.11.10)씨의 글씨]


 

                                                                               미로한정 위치 []





우화관(于華館): 미복원




우화관(于華館) 위치도 <참고자료>


우화관은 화성유수부의 객사(客舍)로 화성 행궁의 북쪽, 낙남헌과 신풍루의 중간 지점에 있었습니다. 우화관의 ‘우(于)’자는 향하여 간다는 뜻이고, ‘화(華)’자는 화성이란 뜻으로 우화관은 곧 한양에서 화성유수부에 공무(公務)로 간 사람들이 머무는 집이란 의미입니다.


정조13년(1789)에 세워질 당시 처음 명칭은 팔달관(八達館)이었는데 정조19년(1795) 우화관으로 개명(改名)하였습니다. 건물은 남향으로 3부분으로 나뉘어져 좌우측에 객들이 묵을 온돌방을 두었으며 각종 행사가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대기할 수 있도록 넓은 대청과 행각, 익랑을 만들었습니다. 건물 앞에 삼문(三門)을 세워 출입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정조19년(1795) 을묘원행시에 수원, 광주, 시흥, 과천의 유생들이 이 곳에서 문과 시험을 치렀으며, 1796년 화성 각 건물의 상량식을 거행할 때 헌관들의 대기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우화관(于華館) 발굴조사 지역 [멀리 보이는 건물은 낙남헌]





낙남헌 동쪽 우화관(于華館) 발굴조사 지역





출처관련: 위 내용 중 행궁의 문(門)에 관한 자료는 "여유당 건축"의 자료를, 현판글씨에 관한 자료는 "대교약졸"님의 자료를 참조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화성행궁(華城行宮)/수원(水原)(2017/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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