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킹/둘레길걷기

북한산둘레길 2구간[순례길](12.08.26)

케인스 2012. 9. 3. 00:05

 

 

                       북한산둘레길 2구간[순례길]

  

                                  (12.08.26)

 

 

☞  북한산둘레길    

 

      

 

 

 

☞  북한산둘레길 2구간[이준열사묘소-솔밭근린공원]: 순례길

   

 

    

  

 

 

 

▶ 트레킹코스(2.3km)

 

이준열사묘역입구 - 이준열사묘역 -  광복군합동묘소 - 이시영선생 묘소 - 섶다리 - 유림선생 묘역 - 4.19전망대 - 솔밭근린공원

 

                   

 

 

▶ 트래킹 사진

 

 

순례길의 무궁화

 

순례길 초입에서 보는 북한산

 

북한산둘레길2구간[순례길] 입구, 통일교육원 앞

 

북한산둘레길2구간[순례길] 입구

 

 

                북한산둘레길2구간[순례길] 입구에는 "이준열사묘소입구" 표지석이 있습니다.

 

입구의 이정표[이정표 주위 선전물은 색갈처리로 가렸습니다]

                

둘레길안내도 

 

 

순례길 입구의 안내판

 

 

 

 

순례길 입구 진입

 

진입 후 처음 만나는 다리

 

다리에서 본 상류쪽

 

다리에서 본 하류쪽[아직도 이런 모습이..]

 

다리를 지나면 곧 나타나는 이준열사 묘소 입구

 

이준 열사 묘역으로..

 

이준 열사(李儁 烈士) 묘소 순례

 

             

                  김포국제공항에 도착하는 이준열사의 유해(1963. 9. 30) <참고사진>
                            

1963년 9월26일 오전 9시30분 백선엽 주불대사(화란대사 겸임)와 한국전 참전용사 그리고 화란군 장교 4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 준열사 헤이그 묘소의 유해 발굴 작업을 한 후 열사의 유해는 비행기편으로 네덜란드를 떠나 1963년 9월27일 동경에 도착 주일 한국대사관에 안치되었습니다. 1963년 9월30일 열사의 유해는 김포국제공항을 거쳐 낙원동소재 건국대학교 구내에 임시 봉안되었습니다. 1963년 10월4일 오전 10시 서울운동장에서 봉안식을 거치고 오후 3시30분에 수유리 묘소에서 하관식을 거행하므로서 56년만에 환국한 열사의 유해 봉환 국민장을 마치고 열사는 고국에서 영면에 들었습니다.

 

                                      일성 이준 열사 위훈비(一醒 李儁 烈士 偉勳碑)

 

                                 일성 이준 열사 위훈비(一醒 李儁 烈士 偉勳碑)


1859년 기미 12월 18일 함경남도(咸鏡南道) 북청(北靑)에서 출생, 호는 일성(一醒)이며, 성격이 강인하고 호탕한 기품과 비범한 용기는 특출하였다. 1888년 북청(北靑)에 경학원(經學院)을 설립하여 육영사업에 전력하였고 1894년 함흥순릉참봉(咸興純陵參奉)에 임하였다. 1895년 우리나라 시초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를 졸업한 일성 이준(一醒 李儁)은 한성재판소 검사(檢事)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서재필(徐載弼) 등과 조선독립협회(朝鮮獨立協會)를 조직 평의장(評議長)이 되어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계속 조선독립협회에서 활동하였다. 1902년 만민공동회(萬民共洞會) 주최로 내정개혁운동에 앞장서다가 이승만(李承晩), 이동녕(李東寧) 등 17명과 함께 투옥되었다. 또 개혁당(改革黨)을 조직 민영환(閔泳煥), 이상재(李商在) 등과 활동하였으며, 1904년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 반대운동을 일으키고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 도총무(都摠務)로 일본인에 대부한 황지문권(荒地文卷)을 환원시켰다. 그후 적십자회(赤十字會), 공진회(共進會)를 조직 회장에 피선되어 활동 중 소인배(小人輩)들의 모함으로 황주(黃州) 철도(鐵島)에  6개월간 정배(定配)되기도 하였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의 허구성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하여 상해(上海)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였다. 1906년에는 윤효정(尹孝定), 장지연(張志淵) 등과 자강회(自强會)를 조직하였으며 동년 만국청년회(萬國靑年會),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 회장 등을 역임하고 보광학교(普光學校)와 서북흥학회(西北興學會), 오성학교(五星學敎)를 창설하여 청년운동과 육영사업에 힘썼다.

 

열사는 다시 뜻한바 있어 평리원(平理院) 검사 및 특별법원 검사로 있으면서 법도를 바로잡는데 노력하여 법의 수호신(守護神)이란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동년 안창호(安昌浩)와 비밀결사(秘密結社)를 조직 활동하였고 안중근(安重根)이 설립한 진남포(鎭南浦) 삼흥학교(三興學敎)에서『일심단결하여 완전독립하자』란 연제로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1907년에 YMCA강당에서 최후로 연설한 연제『생존경쟁(生存競爭)』은 청중들이 감명을 깊이 받았다. 동년 국채보상연합회(國債報償聯合會) 회장시에는 국채보상에 대한 인식을 촉구하였으며『한국혼부활론(韓國魂復活論)』을 저술하여 민족정기(民族正氣)를 계도하였다.

 

같은해 을사보호조약은 일본(日本)의 강압적 체결임을 호소하려는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친서(親書)를 휴대하고 만국평화회의(萬國平和會議)에 참석(參席)하여 국권(國權)을 회복코자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과 같이 네델란드 헤이그에 도착, 세계언론기관에 호소하고 의장단을 방문, 고종황제(高宗皇帝)의 친서(親書)와 신임장(信任狀)을 전달하였으나 일본대표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에 격분한 열사는 자결순국(自決殉國)으로써 한민족(韓民族) 자주독립(自主獨立)의 염원과 기개를 온세계에 떨쳤으니 때는 1907년 7월14일 향년 49세였다.

 

 

 

 

                   홍살문[홍전문/紅箭門]: 높이 4.8m, 기둥둘레 1.2m, 폭 4.1m

 

1983년 7월14일 이준 열사 묘소 입구에 홍살문[홍전문/紅箭門]을 처음 세웠으며, 그 후 마멸직전에 놓였던 홍살문을 1991년 12월3일 현재와 같이 재건하였습니다.

 

                                 홍살문[紅箭門] 재건(再建) 준공(竣工) 1991年 12月3日 

                               일성 이준 열사 (一醒 李儁 烈士) 기념사업회(紀念事業會)

 

 

 

 

 

 

 

                                                         자유평화수호의 상

 

       1992년 3월25일 북청군민회의 노력으로 「자유평화수호의 상」이 보수 중건되었습니다.

 

                                                    자유평화 수호의 상 [뒷면]

 

                                                               묘소 가는 길

 

 

 

 

 

                               이준 열사(李儁 烈士) 묘소 [강북구 수유동]

 

이준 열사(李儁 烈士) 묘소는 대리석으로 쌓아 올린 길이 40m 높이 5m의 凸자 모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준 열사(李儁 烈士) 묘소 [강북구 수유동]

 

이준 열사(李儁 烈士) 묘소 중앙에는 열사의 흉상이 동(銅)으로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화란식으로 된 묘형을 본따 묘를 만들고 앞에는 상석(床右)이 놓여 있습니다. 왼쪽에는 동판으로 된 열사의 약력 비문이 있으며, 또한 중국 총통이었던 원세개(袁世凱)의 만시(輓詩: 죽음을 슬퍼하여 지은 시)가 새겨져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열사의 위국충절을 기리며 쓴 박정희 전대통령의 글씨 "순국대절(殉國大節)"과 고종황제가 열사에게 수여한 헤이그특사 임명장(1907년 4월20일)이 대리석에 새겨져 있습니다.

 


제67주기 추념식(1974.7.14)  <참고사진>

 

이준 열사(李儁 烈士) 묘소 중앙

 

                                      이준 열사(李儁 烈士) 흉상(胸像)

 

                                                           묘(墓)와 상석(床右)

 

                               태극기가 양각(陽刻)되어 있는 이준 열사(李儁 烈士) 묘(墓)

 

이준 열사(李儁 烈士) 묘소 우측

 

대리석에 새긴 박정희 전대통령의 글씨 "순국대절(殉國大節)"과 고종황제가 수여한 헤이그특사 임명장

 

                           이 준 열사의 위국충절을 기리는 박정희 전대통령의 휘호

 

                               순국대절(殉國大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큰 절개

 

                      고종황제가 이준열사에게 수여한 헤이그특사 임명장(1907년 4월20일)

 

이준 열사(李儁 烈士) 묘소 좌측

 

 

                       동판에 새겨진 열사의 약력 비문[水踰里墓所銅版碑文]  


烈士李儁先生은朝鮮王朝哲宗王十年西紀一八五九年陰十二月十八日未時에 咸鏡南道北靑郡俗厚面中山里龍田洞에서誕生하였다.考諱秉瓘妣淸州李氏祖考諱命變先祖는李氏王朝創業主인太祖大王諱成桂의令伯인完豊大君諱元桂이요桓祖大王의長男이다.先生의幼諱性在字汝天이요鄕科를볼때에는諱璿在字舜七이요後日에號를海玉또는 一醒이라하였다. 三歲때에兩親이돌아가시고祖父의앞에서長成하였다. 天姿英偉한先生은十二歲에鄕試에應하여그文詞는世人을驚歎케하였고十七歲에大志를품고上京하여 戚里金炳始相公宗親大院君儒林의名流안勉菴崔益鉉과接濟하여超人의才士임이認定되었다.때마침淸日戰爭의뒤를이어이나라近代化運動이싹트자法官養成所를卒業檢事에就任하였으나 大官彈劾으로退官하였다. 美國에서돌아온徐載弼博士와함께獨立協會에盡瘁評議長으로서 保守派와의鬪爭으로身邊이危險하게되자原法部大臣張博과함께日本에亡命하여早稻田大學을卒業 歸國後에는協會의後身인萬民共同會에서諤한正論을펴는同時에志士閔泳換 李商奠과秘密히改革黨結成을進行하다가일이漏洩되어成果를얻지못하였다.一九○四年에俄日戰爭이일어나자祖國의危機를豫感하고當時度支部大臣李容翊과함께韓國의嚴正中立을宣言하게하였다.戰爭中日本은韓日議定書를勒成하고戰後에侵略이더욱加重하자 上海로가서列國의與論喚起로乙巳條約阻止에힘쓰는同時에마침美國大統領데오더루스벨트의令孃의來韓을契機로 韓美攻守同盟을劃策하였으나英日同盟中인國際情勢不利로大厦旣傾挽回할수없었다. 一九○五年十一月十七日에日使伊藤博文이우리君臣을兵威로强壓하고 乙已保護條約의國恥가오게되자 志士閔泳煥趙秉世洪萬植宋秉璿等이뒤이어殉國하고擧國이激憤하였었다.先生은慨然히戰線에나서서雷勵風飛至銷人으로救國에挺身하였었다.大韓自强會共進會結社로民衆을覺醒시키기에全力하면서때로는日本이强占한荒地開墾權의奪還貪官汚吏의彈劾으로 黃州鐵島에定配되는苦難도겪었고때로는內政改革을爲하여平理院檢事로서 恩赦案의不公汚濁을들어서法部大臣李夏榮을告發하여法의嚴正을밝히려고하였였다.日債를갚으려國價報償運動의先頭에서기도하고國民敎育會西北興學會에靑年志士安昌浩李甲等과協力하여 五星學校經營으로愛國靑年을養成하고安重根經營의三興學校에가서 愛國魂喚起에도힘쓰는等鞠躬盡瘁하였었다.國家의近代化에憲政實施가先決임을痛感하고憲政硏究會를結成하여그會長으로있으면서우선人材登庸으로內政의革新을企劃하였다.그러나이때는이미日本이勒成한保護條約때문에모든經綸이때阻止되고水泡化되므로 當面의火急은이鐵鎖로斷絶함에있다고본先生은生命을내걸고이를爲하여싸우기로하였다.때마침和蘭國海牙에서俄帝의發議로第二回萬國平和會議가열리자前議政府參贊李相卨과함께高宗帝의親任을얻어그會議에提訴하여日本의羈糾을斷絶하려하였다.帝의親書를지니고水陸의萬里遠程을거처俄京에서同志李瑋鍾과함께먼저俄帝의後援을얻고이어서 美國人헐버트의周旋으로美國代表의同情을얻어會議場에써日本의侵略과殘虐으로勒約임을痛論하는同時에 列國記者들에게日本의非人道와國際詐欺를暴露하였다.그러나日本이英國을背景으로妨害하고日敵에게幽閉된高宗帝의親任否認의僞電이오자會議에서의僞約匡正이不可能할뿐아니라 參會할資格조차被奪되었다. 先生의痛憤은極에이르러滿腔熱血로痛論一場하고殺身成仁의殉國으로써外로는列國의似而非正義를糾彈하고內로는國民의殉節救國의大道블敎示하니 때는西紀一九○七年七月十四日이었다.韓國에因緣깊은袁世凱의輓章에剖胸淺血示心眞壯節便驚天下人萬里魂歸迷故國千家淚酒哭忠臣豈緣妻子難瞑目爲報君王不有身大義堂堂懸日月泉臺應結夷齊隣先生의遺骸는海牙國立公園에安葬하고生前에血盟의友이던 李相卨先生의親筆로李儁一八五九年韓國北靑에서出生하여一九○七年和蘭國海牙府에서殉節하다라고誌하였다. 先生의遺骸가海牙에계신지五十六周年인西紀一九六三年十月四日에 祖國大韓民國서울特別市城北區水踰里山一二七番地의一號山麓에安葬하다. 初娶朱氏와의사이에一男一女를기르다長女松鮮長男鏞으로松鮮은士人趙健學에게嫁하고再娶平東李一貞女史에게一女鍾肅을길러서士人柳子厚에게嫁하였다.

西紀一九六三年十月四日

 後      學   柳 光 烈  謹撰

坡平后人  尹 禧 采  拜書

 

 

                                     중국 원세개(袁世凱)의 만시(輓詩) 

 

剖 胸 濺 血 示 心 眞
壯 節 便 驚 天 下 人
萬 里 魂 歸 迷 故 國
天 家 淚 灑 哭 忠 臣
豈 綠 妻 子 難 暝 目
爲 報 君 王 不 有 身
大 義 堂 堂 懸 日 月
泉 臺 應 結 夷 齊 隣

 

慰廷 袁世凱 謹輓

一醒李儁先生

 

                       가슴을 가르고 피를 뿌려 그 진실된 마음을 보였으니
                       그 장한 절개 문득 천하 사람이 놀라도다
                       만리에서 혼은 돌아와 고국에 안정을 못하고 헤메이는데
                       온 백성들은 눈물을 뿌려 그 충신을 곡하노라
                       어찌 처자를 위하여 눈감기를 어려워했으리
                       오직 군왕과 조국 그리고 겨레를 위하여 그 몸을 버렸도다
                       당당한 대의가 일월과 같이 높았으니
                       황천에 가서 백이 숙제와 이웃을 같이 하리로다

 

                                               위정 원 세 개 근만

                                                  일성 이준선생 

 

이준 열사(李儁 烈士) 묘소 좌측 <참고사진> 

 

             수유동 이준 열사(李儁 烈士) 묘소에 옮겨 놓은 이준열사 헤이그 묘비(墓碑)

 

1972年에 헤이그의 이준 열사(李儁 烈士) 묘소(墓所)를 유적지(遺跡地)로 지정하고 다시 세웠던 묘비(墓碑)입니다. 

 

 

                                  이준열사 헤이그묘비 이건 경위 <참고사진>

 

해아묘비 이건경위(海牙墓碑 移建經緯)

 

이 墓碑는 1907년 李儁烈士가 네델란드에서 殉國大節하였을 때에 헤이그 墓所앞에 처음 長圓形의 墓標가 建立되었으며 그後 1972年에 네델란드政府의 協助로 大韓民國政府가 烈士의 墓所를 遺跡地로 指定하고 다시 紀念碑를 세웠던 碑이다. 1977년10월 大韓民國政府에서 烈士의 墓域을 擴張 再整備하여 새로운 큰 墓碑와 胸像을 建立함에 따라 1972년에 세웠던 이墓碑를 외무부의 주선으로 1978년 6월에 이곳에 옮겨왔고 援護處의 支援과 학교법인 海靑學院 永東高等學敎 理事長의 협조로 7월14일  烈士의 殉國 第71周忌를 기하여 原狀그대로 세웠다.


                                  西紀 1978年 7月14日

                                  社團法人 一醒 李儁烈士 紀念事業會

 

 

최초의 이준열사 묘비 (1907.7) <참고사진>

 

1907년 7월14일 세계평화를 논하던 제2차 만국평화회의장에서 일제의 침략 행위를 세계 만방에 호소하고 할복 자결한 이준열사의 시신은 네덜란드 정부의 호의로 정성껏 거두어 7월17일 헤이그시 교외의 "뉴 아이큰다우" 공동묘지에 임시 매장하였다가, 9월6일 묘지를 영구 임대하여 정식으로 예장되었습니다. 묘소(墓所) 주위에는 철책을 두르고 묘(墓) 앞에는 타원형[長圓形]의 대리석으로 제작한 묘표(墓標)를 건립하였습니다.

 

                          

                           묘역 정화한 후의 이준열사 묘비 (1972.5) <참고사진>   


위의 묘비는 1972년 5월 네델란드 헤이그 교외 열사의 묘역을 정화하고 다시 세운 묘비로 1978년 6월 수유동 이준 열사(李儁 烈士) 묘소에 옮겨지게 됩니다.

 

         네델란드 헤이그 교외의 옛 묘지에 새롭게 조성된 이준열사의 묘역지  <참고사진>  

 

이준열사의 유해는 1963년 서울 수유동에 있는 이준열사 묘소로 옮겨졌으며, 1972년 5월 다시 세운 묘비 역시 1978년 6월 열사의 묘소에 옮겨지게 되었기에 현재 네델란드 헤이그 교외의 옛 묘지에는 열사의 청동흉상과 박정희 전대통령 친필『일성이준열사의 묘적』이라고 새긴 오석 묘비(墓碑), 석병풍(石屛風), 애석(艾石)으로 된 상석 및 화병과 향로를 설치하여 새롭게 묘역을 조성하여 이곳을 찾는이들에게 열사의 이력을 알리고 있습니다. 

 

                                 묘비(墓碑)의 좌측 비문(碑文)  <참고사진>  

 

이 준열사는 1859년 대한민국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매 열사는 결연히 일어나 주권 회복 운동에 앞장서던 중 고종황제로부터 1907년 네델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을사 보호조약이 우리의 뜻이 아님을 밝히라는 밀령을 받고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장도에 올랐다. 헤이그에서 평화회의가 열리던날 열사 등은 의장을 방문하고 황제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달하였으나 일본대표의 방해로 회의참석자격을 얻지 못하였다. 이에 열사는 죽음으로써 한민족의 자주독립의 염원과 기개를 온세계에 떨쳤으나 때는 1907년 7월 14일이었다. 열사의 유해는 56년 동안 이 자리에 묻혀 있다가 1963년 열사가 그렇게도 그리던 자주독립의 조국 대한민국의 품에 돌아가 서울북쪽 슈유리 묘소에 안장되고 1972년 네델란드 정부의 협조로 대한민국 정부가 이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조일문은 글을 짓고 이선하는 글씨를 썼다.

                               1972년 5월 일

 

                                 묘비(墓碑)의 좌측 비문(碑文)  <참고사진>  

 

                                    이 준 열 사 순 국 추 념 비

                                                              1972년 5월 20일 건립

                       건립자  대한민국 주화란대사관 
                       후   원  일성 이준열사 기념사업회 한화협회 주화란한국인회 
                       찬   조  한국일보사장 장기영, 범양전용선사장 박건석

 

                         이준열사의 부인 이일정(李一貞) 여사의 묘비(墓碑)

 

이준열사의 부인 이일정여사는 1877년8월24일 서울에서 탄생하여 1935년 4월11일 운명하였습니다. 여사의 묘소는 불광동에 있었으며, 열사의 따님 종숙(鍾肅)씨는 태평양전쟁이 날로 심해져갈 무렵 왜놈들의 성화에 시골로 피난 갔다가 8 .15 해방을 맞이하게 됩니다. 서울에 돌아와 어머니의 묘소를 찾았으나 열사에게서 배운 글씨로 쓴『節士李儁氏夫人李一貞氏幕』라는 비석은 행방불명이 되어 없어졌습니다. 그 후 6 .25 동란으로 어머니의 묘소는 위치조차도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으나  다행히도 묘비가 1973년 7월 불광동우체국의 하수도 공사장에서 발견되어 비를 다듬어 수유리 이 준열사 묘역에 세워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 준열사의 부인 이일정여사와 그의 유묵 <참고사진>  

 

공로비(功勞碑)

 

이 묘역의 환경정화사업은 이분들의 지성으로 이룩하였음

 

서기 1976년도 시행
학교법인 해청학원 영동고등학교

이사장 김형목
원호처장 유근창
함경남도 안변군민회 회장 오영환
한전새마을부녀회 회장 안정업 외 회원 일동

 

사단법인 이준열사기념사업회

 

묘역의 백화(白花)

 

                                                               돌아가는 길

 

 

다시  둘레길로..

 

이준 열사 위훈비(李儁 烈士 偉勳碑)를 돌아서..

 

개울을 건너고.. [천막만 없어도 아름다운 개울이 될텐데..]

 

                     

                                  북한산 대동문 오르는 길[솔밭공원 2.3km 지점]

 

          이 길로 조금만 오르면 애국선열 김병로선생의 묘역이 있습니다. 그냥 둘레길로 갑니다.

 

곧 삼거리가 나타납니다. 묘역을 잠시 둘러보겠습니다.

 

 

 

 

 

 

 

광복군합동묘역 순례

 

 

묘역 오르는 길

 

광복군 합동묘역으로..

 

 

김성율, 김순근, 김운백, 김유신, 김찬원, 동방석, 문학준, 백정현, 안일용, 이도순, 이한기, 이해순, 전일목, 정상섭, 조대균, 한휘, 현이평, 신원미상 1인,

 

                              이상 18명의 애국선열의 죽음을 잊지않겠습니다.

 

 

 

 

 

이시영선생[초대 부통령] 묘역 순례

 

 

 

 

좀 더 오릅니다.

 

이시영선생[초대 부통령] 묘

 

 

 

 

 

묘를 뒤로하고 내려갑니다.

 

다시 둘레길로 접어듭니다.

 

 

 

대동교

 

 

섶다리 지나서..

 

건너온 섶다리

 

 

 

 

 

유림선생 묘역 순례

 

 

유림선생 묘역 입구

 

 

묘비(墓碑)를 향해 계단을 오릅니다.

 

유림선생 묘역 오르는 길 

 

 

묘역을 지키는 서수(瑞獸) / 백호(白虎)?

 

                       

                      묘비(墓碑)

 

 

유림선생 묘

 

 

                      망주석 (望柱石)

 

                      망주석 (望柱石)의 細虎 (세호) 조각이 재미있습니다.

 

되돌아 내려갑니다.

  

                     다시 둘레길로.. [솔밭공원 2.1km]

 

 

 

둘레길 거리표

 

 

 

백련교

 

 

 

 

 

 

 

 

眺望 불암산, 수락산

 

 

솔밭공원 1.6km

 

둘레길 표시선 따라..

 

 

 

                      솔밭공원 1.3km

 

 

 

 

 

신숙선생 묘역 가는 길

 

 

솔밭공원 1.0km

 

4.19 전망대

 

 

국립 4.19민주묘지 전경

 

 

                      솔밭공원 0.6km

 

 

 

 

 

 

순례길 구간 마지막지점과 소나무숲길 구간 시작지점

 

소나무숲길 구간 시작지점

 

순례길 구간 마지막 지점

 

둘레길 표시선은 솔밭공원으로 이어집니다.

 

북한산둘레길2구간[순례길] 트레킹을 마치고 국립4.19민주묘지 순례길에 나섭니다.

 

 

국립4.19민주묘지 순례

 

 

국립4.19민주묘지 입구

 

국립4.19민주묘지 입구 안내도

 

정문

 

묘역 너머 북한산

 

 

 

 

상징문

 

상징문에서 본 4월 학생혁명 기념탑

4월 학생혁명 기념탑과 그 뒤 유영봉안소

 

4월 학생혁명 기념탑에서 본 상징문과 그 가운데 정의의 불꽃상

 

4월 학생혁명 기념탑 상징 조각 

 

 

정의의 불꽃

 

 

 

 

 

 

 

 

 

 

 

                                  북한산둘레길 2구간[순례길]

                                                             (12.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