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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北京) - 진비정(珍妃井)/양성전(養性殿)지역

케인스 2012. 8. 20. 19:14

 

 

                      진비정(珍妃井)

 

      중국 북경(北京)/자금성, 내정(內廷)의 양성전(養性殿) 지역

 

 

녕수궁화원(寧壽宮花園) 구역: 서로(西路) 

 

 

 

녕수궁화원(寧壽宮花園) 구역 <참고사진>

                                                                                                                               

  

▶ 녕수궁화원(寧壽宮花園)

 

 

                            

                        녕수궁화원(寧壽宮花園) 위성사진 및 평면도 <참고사진>

 

   

●  진비정(珍妃井)

 

 

                                                   진비정(珍妃井) 위치도 <참고사진>

 

진비정(珍妃井)의 위치 <참고사진>

 

경기각(景棋閣)의 북서쪽, 녕수궁화원(寧壽宮花園)의 북쪽 끝단에 진비정(珍妃井)이 있습니다. 

 

경기각(景棋閣)과 그 북서쪽에 위치한 진비정(珍妃井) <참고사진>

 

                                                진비정(珍妃井) <참고사진>

 

                                                     진비정(珍妃井) <참고사진>

 

진비정(珍妃井)은 청(淸)나라 11대 황제(皇帝) 광서제(光緖帝)가 총애하는 후비(后妃)인 진비(珍妃)가 서태후(西太后:자희태후/慈禧太后)에 의해 우물에 빠뜨려 죽임을 당한 바로 그 우물입니다. 사람들은 진비(珍妃)를 추도하여 이 우물을 진비정(珍妃井)이라 하고, 진비정 남쪽의 작은 건물에 그녀의 영당(靈堂)을 차리고 그 이름을 회원당(懷遠堂)이라 불렀습니다.

 

 

●  진비영당(珍妃靈堂)/회원당(懷遠堂)

 

 

경기각(景棋閣), 부망각(符望閣), 진비정(珍妃井)과 진비영당(珍妃靈堂) <참고사진>

  

경기각(景棋閣), 진비정(珍妃井)과 진비영당(珍妃靈堂) <참고사진>

 

 

진비영당(珍妃靈堂)인 회원당(懷遠堂) <참고사진>

 

진비(珍妃) <참고사진>

 

진비(珍妃:1876~1900년)의  이름은  타타납 서설(他他拉 瑞雪). 1889년 자매가 동시에 광서제(光緖帝)의 빈(嬪)으로 선택됩니다. 1894년 진비(珍妃)로 봉해지나 1900년 우물에 빠뜨려 죽임을 당하며 다음해 시체를 건져내어 매장하였고, 1913년 숭릉(崇陵:광서제릉)의 비원(妃園)에 이장하였습니다. 사후 진귀비(珍貴妃)로 봉해지고, 선통제(宣統帝) 즉위시에 각순황귀비(恪順皇貴妃)로 다시 추봉됩니다.

 

회원당(懷遠堂) 내 진비(珍妃)의 신위(神位) <참고사진>

 

진귀비(珍貴妃)의 친언니 근비(瑾妃)가 경기각 서쪽 문방에 "회원당(懷遠堂)"이란 영당을 설치하였으며 내부에는 "정위통성(精衛通誠)"이란 편액이 있고  감실을 만들어 "진귀비신위(珍貴妃神位)"라는 신위(神位)를 봉안하고 그 슬픔을 기리고 있습니다.

 

 

 

 

 

서태후(西太后: 자희태후/慈禧太后) 그리고 광서제(光緖帝)와 진비(珍妃)

 

 

광서제(光緖帝) <참고사진>

 

청(淸)나라의 제11대 황제(재위 1874∼1908)인 광서제(光緖帝)는 이름이 재첨(載湉). 묘호(廟號)는 덕종(德宗). 시호(諡號)는 경황제(景皇帝)이며, 네 살에 즉위하여 33년간을 황제 자리에 있었습니다.

 

1880년 재첨(載湉) <참고사진>

 

제8대 황제 도광제(道光帝)의 제7자 순현친왕(醇賢親王) 혁현(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순왕복진 예흐나라(Yehenara)로, 서태후가 가장 아끼던 여동생이었습니다. 즉, 광서제는 서태후와 이모와 조카 관계이며, 서태후의 아들인 동치제와는 이종 사촌인 동시에 친사촌이기도 합니다. 

 

서태후(西太后: 자희태후/慈禧太后) <참고사진>

 

제9대 황제 함풍제(咸豊帝)의 후비(后妃)인 서태후는 자신의 아들인 제10대 황제 동치제(同治帝)가 19세의 어린 나이에 천연두로 죽자, 아들의 아이를 가진 며느리 알루트(효철의 황후)를 죽여버리고, 권력을 더 유지할 목적으로 자신의 여동생 아이인 4살짜리 재첨(載湉)을 양자로 삼고 황제로 앉혔습니다. 혈통상으로 보아 광서제는 제위에 오를 수 없었고, 오를 수 있다해도 제위계승 순위에서 한참 아래였습니다.

 

                                                          광서제(光緖帝) 대혼(大婚) <참고사진> 


 

광서제(光緖帝)는 18세에 서태후의 외조카인 융유황후(隆裕皇后)와 대혼식(大婚式)을 행하였으며, 예부(禮部) 좌시랑(左侍郞), 장서(長叙)의 딸 근비(瑾妃)와 진비(珍妃) 자매를 후비(后妃)로 맞이하였습니다.

 

진비(珍妃) <참고사진>

 

진비(珍妃) 자매는 광서15년(1889) 언니 근비(瑾妃)와 함께 입궁하였는데 13세의 그녀는 진빈(珍嬪)에 15세의 언니는 근빈(瑾嬪)에 봉해졌습니다. 광서제의 대혼 후 융유황후(隆裕皇后)는 총애를 잃었고 근비와의 사이도 막막해졌지만 오직 진비만은 광서제의 마음을 이해해 주었고 바둑을 두는 등 황제를 곁에서 모시며 가까이 지냈습니다.

 

광서제(光緖帝) <참고사진>

 

광서제(光緖帝)는 청나라 말기 격동기에 황제로서의 어려움에 쳐해졌지만 사실상의 실권은 서태후(西太后)가 장악하여 평생 동안 그녀의 전횡(專橫)에 시달렸습니다. 치세(治世)하는 동안 청 ·불전쟁, 청 ·일전쟁 등이 잇달아 일어났으며, 서구열강과의 관계로 다사다난한 시대였습니다.  

 

광서(光緖)황제와 진비(珍妃) <참고사진>

 

광서20년 서태후의 육순 때 빈(嬪)을 비(妃)로 승격시키며 진빈(珍嬪)은 진비(珍妃)로 봉해졌으며, 광서제는 평소 총명하며 사려깊고 자신의 정견을 지지해주는 진비에게 각별한 애정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량치차오[梁啓超], 광서제(光緖帝), 캉유웨이[康有爲] <참고사진>

 

깊어만 가는 청나라의 고민과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캉유웨이[康有爲] ·량치차오[梁啓超] 등의 주장대로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본받은 변법자강책(變法自强策)을 받아들여, 1898년 무술(戊戌)변법을 시작하게됩니다. 이 개혁은 당시의 상황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 세력의 쿠데타로 실패하여 변법파의 캉유웨이 등은 해외로 망명하고, 광서제(光緖帝)는 중화전(中和殿)에 연금됩니다.

 

진비(珍妃)가 유폐 당했던 경기각(景棋閣) <참고사진>

 

광서20년 10월 서태후는 근비(瑾妃)와 진비(珍妃)를 귀인(貴人)으로 강등시켰는데, 광서제의 무술정변(戊戌政變)이 실패로 돌아가며 이를 지지하고 옹호하였던 진비(珍妃)는 서태후의 노여움을 받게 되고 중화전(中和殿)에 갖힌 광서제와는 별도로 경기각(景棋閣) 원내에 따로 유폐되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설이 전해지는데 이는 진비가 뇌물을 받아 매관매직한 것을 서태후가 알게되었기에 때문에 유폐되었다고도 전해집니다. 사후에 진귀비(珍貴妃), 각순황귀비(恪順皇貴妃)로 추봉되었습니다. 

 

1900년 의화단(義和團)과 8국연합군과의 싸움 <참고사진>

 

1900년 의화단(義和團)운동이 일어나 8개의 열강(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미국,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의 군대가 베이징에 입성하자, 광서제(光緖帝)는 서태후와 함께 시안[西安]으로 도피하였습니다. 자금성 탈출의 혼란을 틈타서 피신하기 전 서태후는 태감(太監)에게 명하여 진비(珍妃)를 우물에 넣어 죽이도록 명합니다.

 

 

                                                          <참고사진> 

일화 소개

 

황제가 남아서 8국 연합군 사령관들과 대면하기를 바라고 있는 진비는 서태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녀의 시안으로의 도피행에 황제를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나 태후는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진비에게는 한마디 때꾸도 하지 않고 곁에 있던 환관들에게 벌컥 화를 내고 짜증을 부리고는 "저 질질 짜고 있는 계집을 우물에 던져 넣어라"고 명령했다고 합니다.

이것 말고 궁중의 환관에게 몇 번이나 들은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태후는 진비의 애원에 대해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 여기 남기로 하자, 하지만 서양 오랑캐들에게 산 채로 붙잡힐 수는 없다. 너와 나에게 남은 길은 하나밖에 없다. 우리 두 사람은 모두 죽어야한다. 쉬운일이다. 네가 먼져가거라. 내가 너를 뒤따라가겠다고 약속을 하마" 그러자 환관들이 자신들의 여주인의 신호에 따라 진비를 붙잡아 우물에 던져 넣었고 진비는 익사했다.

<자금성의 황혼 3장. 반동과 의화단 운동, 1898~1901년 중>

 

              앞줄 왼쪽부터 근비(槿妃), 서태후(西太后), 융유황후(隆裕皇后) <참고사진>

 

1년 후 1901년 화약(和約)이 성립되어 서태후와 광서제는 자금성으로 귀환하였고, 진비(珍妃)의 언니 근비(槿妃)의 요청으로 진비(珍妃)의 시신을 건져 올렸는데, 그 얼굴이 살아있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고 전해집니다. 서태후는 시신을 궁녀 묘지에 묻게하였으며 진귀비(珍貴妃)에 추봉하였습니다. 선통제(宣統帝) 즉위시에 각순황귀비(恪順皇貴妃)로 다시 추봉되었습니다. 

 

숭릉(崇陵:광서제릉) 비원(妃園)의 진비(珍妃) 陵 <참고사진>

 

 

그후 1913년 청(淸) 서릉(西陵)의 숭릉(崇陵:광서제릉) 비원(妃園)에 이장하였고, 후에 비극의 우물을 사용할 수 없도록 입구를 막아버렸습니다.

 

숭릉( 崇陵: 광서제 陵) <참고사진>

 

광서제(光緖帝)는 그 뒤에도 유폐생활을 하다가 1908년에 죽었고, 바로 다음 날 서태후도 갑자기 죽었습니다. 

 

 

 

 

 

 

 

 

                                                    진비정(珍妃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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