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양(학사루)
함양(咸陽) / 학사루(學士樓)
함양 학사루(學士樓)
도유형문화재 제 90호이며 경상남도 함양읍 운림리 함양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學士樓)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시대 문창후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선생이 이 지방에 태수로 재직시 자주 이 누각에 올라 시를 읊은 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학사루라 불렀다고 전하므로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본다. 학사루 서쪽에 객사가 있었고, 지방관리가 정무를 보면서 피로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학사루에 올라 시를 짓고 글을 쓰며 심신을 달랬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성리학자로서 영남학파의 종조였던 점필재 김종직이 이 곳의 군수로 부임하여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을 철거토록 하여 두 사람의 개인적인 감정이 고조되어 조선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를 일으키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한 곳이다.
왜구의 침입으로 사근산성이 함락될 때 학사루가 소실되었으며 조선 숙종 18년 (1692)에 군수 정무(鄭務)가 중수한 기록이 있다. 서기 1910년 이 곳에 함양초등학교가 세워질 때도 학사루는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며, 함양초등학교의 교실, 군립도서관 등으로 이용되던 것을 서기 1979년에 군청앞 현 위치로 이건 하였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2칸의 2층 누각으로 팔작지붕 목조와가이다. <참고자료:함양군>
학사루 주련(學士樓 柱聯)
七月蟬聲滿一樓 (칠월선성만일루) : 칠월의 매미소리 누에 가득한데
登臨回顧叉傷秋 (등림회고차상추) : 누에 올라 회고하니 감회가 깊구나
長林上下高城出 (장림상하고성출) : 상하림 긴숲에 성은 높이 솟았고
大野東南二水流 (대야동남이수류) : 한들의 동남에 두 냇물이 흐르네
學士已乘黃鶴去 (학사이승황학거) : 학사는 이미 황학을 타고 가버렸는데
行人空見白雲留 (행인공견백운류) : 행인은 부질없이 흰구름만 바라보네
可憐風物今猶昔 (가련풍물금유석) : 가련타 풍물은 예나 지금이나 같은데
常有詩篇揭軒頭 (상유시편게헌두) : 언제나 추녀끝에는 시편이 걸려있네
글: 작자미상, 글씨: 진주출신 야천 임재동
뒤에서 본 학사루(學士樓)
무오사화(戊午士禍)와 학사루(學士樓)
성리학자로서 조선조 영남학파의 종조(宗祖)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선생이 이곳 군수로 부임하여 어느날 학사루에 오르니 당시 관찰사(觀察使)로 있던 유자광(柳子光)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는 것을 보고 '어찌하여 소인배의 글이 학사루에 걸려 있느냐, 당장 철거토록 하라'고 명을 내려 시판을 철거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유자광은 김종직에게 원한을 갖게 되었고, 성종이 승하한 후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실록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단종 폐위사건을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초나라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를 비방하고 단종을 위로했다하여 문제삼은 글]을 문제삼아 사림파를 제거하게 됩니다. 이를 무오사화라 하며, 김종직은 부관참시[죽은 이를 무덤에서 꺼내 다시 목을 베게하는 형]를 당하게 됩니다. 결국 죽은 뒤 또 죽임을 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 것입니다.
학사루(學士樓) 현판
2층 누각으로 오르는 계단
함양 학사루의 느티나무
천연기념물 제 407호로 함양군 함양읍 함양초등학교내에 있는 이 느티나무는 김종직선생이 함양 현감으로 재임(1471-1475)할 당시 객사가 있었던 학사루 앞에 심었다고 전하는 나무로서 수령은 약 500년으로 추정되며, 높이는 21m, 나무둥치의 둘레는 8.3m에 이릅니다. 이 느티나무는 함양의 역사가 깃들어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느티나무는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일본, 대만, 중국 등의 따뜻한 지방에 분포하고 있습니다.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자라서 둥근 형태로 보이며, 꽃은 5월에 피고 열매는 원반모양으로 10월에 익으며, 줄기가 굵고 수명이 길어서 쉼터역할을 하는 정자나무로 이용되거나 마을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당산나무로 보호를 받아왔습니다.
학사루의 느티나무 <자료사진>
이 느티나무에는 김종직선생의 아픈 사연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함양 군수로 재임하던 당시 40이 넘은 나이에 아들을 보게 되었는데 그만 5살 때 홍역으로 잃고 말았습니다. 늦게본 아들이었기에 그 안타까운 마음 이루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듬해 임기를 마치고 함양을 떠나게될 때 세상 떠난 아들을 그리며 이 느티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아들을 잃은 안타까운 시(詩)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느냐
다섯 해 생애가 번갯불 같구나
어머님은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
지금 이 순간 천지가 끝없이 아득하구나.
참고자료
▶ 무오사화
김종직은 고려 충신 길재의 제자로 영남의 도학자다. 성종의 총애를 받은 그는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 제자들과 함께 영남사림을 형성하며 기성 세력인 훈구파와 맞서 조정에 새로운 기풍을 진작했다.
유자광은 김종직에 의해 학사루 현판이 불태워지는 모욕을 받았으나 보복의 기회를 엿보던 중에 마침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성종실록]을 편찬하던 중 "훈구파 이극돈이 세조비 정희왕후의 국상 때 전라감사로 재직하면서 기생과 어울리며 뇌물을 받은 사실이 있다"고 사초에 올린 것을 이극돈이 고쳐주기를 요청하였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분통이 터진 이극돈은 김종직과 감정이 깊은 유자광에게 도움을 청해 보복하려고 하였으나 당시 성종의 신임이 두터울 때라 차마 일을 벌이지 못했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청의 당상관으로 이극돈이 임명되자 기회를 만난 유자광은 실록에 실린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삼았다. 즉 단종의 폐위사건을 항우에게 죽음을 당한 초나라 의제에 비유하여 세조를 비방한 것이라 하면서 김종직은 대역죄인, 김일손은 악독한 그의 수제자라 주장하면서 김종직이 지은 글을 모두 불살라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훈구파가 가세하여 상소하자 당시 사림은 충언에 싫증을 느낀 연산군이 김일손을 심문한 끝에 이 사건 모두 김종직이 교사한 것이라 결론짓고 김종직은 부관참시, 김일손 외 4명은 효수, 정여창 외 수십인은 귀양 및 파면 조치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현실의 부조리를 과감히 시정하려는 사림파와 기존 구질서를 옹호하던 훈구파의 대립으로 유림 세력이 크게 위축된 사건으로 이후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 등의 사림파가 계속 희생당하지만 서원과 향악을 기반으로 잠재적인 성장을 계속하여 선조대에는 정계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한편 유자광은 이 사건으로 권세를 틀어쥐지만 만년에 유배를 당하고 유배지에서 눈이 먼채로 죽음을 맞이하고 가족마저 외면하였으나, 김종직은 문묘의 배향자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다.
▶ 김종직(金宗直)의 시(詩) 1) 學士樓下梅花始開 (학사루하매화시개) : 학사루 아래에서 매화가 비로소 피다
2) 學士樓下梅花始開 (학사루하매화시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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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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