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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읍성/홍성

케인스 2016. 10. 28. 23:43

 

 

            홍주읍성(洪州邑城) / 홍성(洪城)

 

 


☞ 충청남도(忠淸南道) 홍성군(洪城郡) 홍주읍성(洪州邑城)

 

 

홍주읍성(洪州邑城) 위치

 


 

    홍주읍성(洪州邑城) 위치 <참고자료>

 

홍성(洪城)의 홍주읍성(洪州邑城)은 충청남도(忠淸南道) 홍성군(洪城郡) 홍성읍(洪城邑)에 있는 읍성(邑城)이며 사적 제231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성곽으로  홍주성(洪州城)이라 줄여서 부르기도 합니다. 

 

홍성군(洪城郡)의 유래

 

홍성군(洪城郡)은 옛 홍주군(洪州郡)과 결성군(結城郡)을 합한 군(郡)이다. 홍주는 본래 고려의 운주(運州)로 995년에 도단련사(都團練使)를 두었고, 1012년에는 지주사(知州事)로 되었다. 이후 홍주(洪州)로 개칭되었다. 1358년에 홍주목(洪州牧)으로 승격된 후 1368년 지주사로 되었다가,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변혁을 거쳐 1895년에 홍주군(洪州郡)이 되었고, 1914년 옛 결성군(結城郡)을 합쳐 홍성군(洪城郡)이 되었다. 결성(結城)은 본래 백제(百濟)의 결기현(結己縣)인데 신라(新羅) 때 결성(結城)으로 고쳐 서림군(西林郡)의 영현( 領縣)이 되고, 고려시대(高麗時代)인 1018년 운주(運州)에 이속되었다가 117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우왕(禑王) 때 왜구(倭寇)의 침입으로 주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1390년에는 진성(鎭城)을 두고 유민(流民)을 정착시켰다. 조선시대 1413년 현감(縣監)을 두었다가 1895년 군(郡)으로 승격, 1914년 홍주군, 결성군 및 보령군(保寧郡)의 일부를 통합하여 홍성군(洪城郡)이 되었다. <홍성군홈페이지>

 

 

 

홍주읍성 위치도 <참고자료>

 

홍주읍성(洪州邑城)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邑城)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매우 크며, 현재는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이 남아있습니다. 홍주읍성(洪州邑城)은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고을의 읍성을 새로운 격식에 맞추어 쌓게 되었던 조선 세종 때 처음 쌓기 시작하여 문종1년(1451)에 새로 고쳐 쌓았습니다. 당시 성의 규모는 둘레가 4,856척(약 1.5㎞), 높이는 11척(약 3.3m)이며 문은 4개가 있었고, 여장(女牆), 적대(敵臺) 등의 여러 시설이 설치되었으며 안에는 우물 2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동문(東門)인 조양문(朝陽門)은 현재까지 남아있고

1975년 해체 복원한 것입니다. 아문(衙門)은 조양문의 문루를 설치할 때 함께 세운 것이며 ‘홍주아문(洪州衙門)’이란 글씨는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직접 썼으나 현재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며 조선시대 관아(官衙)의 구조와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가됩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德山)으로 격퇴시킨 일이 있습니다. 2013년에는 남문(南門)인 홍화문(洪化門)을 복원하였습니다.

 

 

홍주읍성(洪州邑城)의 옛 모습
 

 

고지도(古地圖)의 홍주읍성 [1750초, 해동지도(海東地圖)] <참고자료>
홍주목(洪州牧)은 18세기 중엽 27개면을 거느린 큰고을로 목사(牧使)가 주재하고 있었습니다. 지도는 위쪽을 북쪽으로 보고 지도를 그린 것이 아니라 고을의 진산(鎭山) 백월산(白月山)을 중심으로 그렸으며, 명당을 감싼 좌청룡과 우백호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지도에 보이는 읍성은 석축으로 되어 있으며, 동문(東門: 조양문)과 서문(西門: 경의문)만 표기되어 있고, 성안에 전영장(前營將) 건물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전영(前營)은 인조(仁祖) 때 세워진 것으로 속읍(屬邑)은 홍주, 서천, 임천, 보령, 한산, 청양, 정산, 홍산, 비인, 남포였습니다. <金在完글>

※ 전영(前營): 조선 후기에 서울과 지방의 여러 군영을 통솔하던 관아.객사(客舍): 고려와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두었던 관청건물의 하나로 왕이 파견한 중앙관리가 오면 여기서 묵게 하였습니다.※ 아사(衙舍): 관아의 건물


고지도(古地圖)의 홍주성 [1700년대후반, 지승(地乘)] <참고자료>
이 지도 역시 위의 해동지도와 같이 서쪽을 위로 향해 그렸는데, 고을의 진산(鎭山)인 백월산(白月山)을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그러나 해동지도에는 동문(東門: 조양문)과 서문(西門: 경의문)만 표기되어 있으나, 지승(地乘)에는 동문(東門)과 서문(西門) 외에 북문(北門: 망화문)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승 해제 참고>

고지도(古地圖)의 홍주성 [19세기초, 광여도(廣輿圖)] <참고자료>

 

홍주목(洪州牧)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홍동면, 홍북면, 금마면, 장곡면, 광천읍 일부, 갈산면, 보령시 천북면과 월경지인 당진군 신평면, 합덕읍, 서산시 대산읍, 운산면, 고북면 일대를 관할하였습니다. 홍성읍 오관리가 읍치(邑治)였으며 읍성(邑城) 안에 아사(衙舍), 객사(客舍), 전영(前營)이 그려져 있습니다. <광여도 해제참고>


     고지도(古地圖)의 홍주성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 <참고자료>
홍주(洪州)의 읍치는 빈번한 전란에도 불구하고 이전되지 않고 그 위치를 고수해 왔습니다. 성곽의 내부에는 홍주목(洪州牧) 관아(官衙) 건물과 충청도의 전영(前營)이었던 홍주진관(洪州鎭管)의 건물이 구분되어 표시되어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서해안의 19개 군현이 홍주진관에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성곽에는 남문이 없는데 읍기(邑基)의 방해처(妨害處)가 되어 만들지 않았고 대신에 나무를 심어 비보(裨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문(東門) 앞의 하천을 따라서도 숲을 가꾼 것이 그려져 있는데 이 지역의 범람을 막아주는 기능도 지녔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방지도 해제 참고> 

 

 

 

  홍주성 영역 <google참고사진>


 

 

<참고자료>

 

 

▶ 홍주관아(洪州官衙):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를 중심으로] 

고지도(古地圖)의 홍주성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 <참고자료>
1] 사달정(四達亭) 2] 애련당(愛蓮堂) 3]청수정(淸水亭) 4]여하정(余何亭) 5]내아(內衙) 6]책실(冊室) 7]안회당(安懷堂) 8]취은루(醉恩樓) 9]급창청(及唱廳) 10] 내삼문(內三門) 11] 공고(工庫) 12] 행랑(行廊) 13] 관노청(官奴廳) 14] 외삼문(外三門) 15] 사령청(使令廳) 16] 장관청(將官廳) 17] 장청(將廳) 18] 작청(作廳) 19] 토포청(討捕廳) 20] 집사청(執事廳) 21] 남관(南館) 22] 전영동헌(前營東軒) 23] 경사당(景士堂) 24] 도청(都廳) 25] 사창고(司倉庫) 26] 향청(鄕廳) 27] 객관(客館) 28] 사정(射亭) 29] 계풍루(繫風樓) 30] 군기청(軍器廳) 군기고(軍器庫) 31] 옥(獄) 32] 서문, 경의문(景義門) 33] 남문(南門) 34] 동문, 조양문(朝陽門) 35] 북문, 망화문(望華門)]   


(1) 사달정(四達亭)

 

 

1765년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부임한 홍양한(洪良漢)이 언급한 사달(四達)의 의미는 '정자(亭子)의 유심(幽深)함은 아해를 품에 안고, 정자의 안온(安穩)함은 늙은이를 편안히 하고, 정자의 크고 넓음은 가난한 자를 부추기고, 정자의높고 밝음도 우환있는 자를 기쁘게 하나니라 이러한 화시(和施)는 동해에 달하고 서해에 달하고 남해에 달하고 북해에 달하니 이를 가리켜 사달(四達)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1890년경의 홍주군지(洪州郡誌)에 '사달정(四達亭)은 안회당(安懷堂)의 뒤에 있는데 옛날의 동헌(東軒)이다'라 했고 1925년판 홍성군지에서는 '사달정(四達亭)은 옛 정사당(政事堂)으로 지금의 청사(廳舍) 뒤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본래 목사(牧使, 정3품)의 동헌인 '근민당(近民堂)'은 현존하는 동헌인 안회당이 아니라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사달정(四達亭, 7칸, 옛 政事堂)의 남쪽에 있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근민당(近民堂)은 1870년의 대대적인 읍성 개수 때 현재의 동헌인 안회당으로 옮겨졌다고 전하기도 합니다.
                                                                  사달정(四達亭) <참고자료>
위의 옛지도를 보면 사달정(四達亭)은 정면3칸 건물로 입구 담장에는 홍예식 담으로 꾸며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달정(四達亭)은 1529년 홍주목사(洪州牧使) 정사룡(鄭士龍)이 창건한 후 1717년 홍석보(洪錫輔) 목사가 다시 축성하고 1770년 홍양한(洪良漢) 목사가 이를 중수하였으나 세월이 흘러 퇴락훼철되었습니다. 1865년에 부임한 조병로(趙秉老) 목사가 사달정(四達亭) 터에 청수정(淸水亭)을 축조했으나 이마저 퇴락하매 이승우(李勝宇) 관찰사가 1896년에 여하정(余何亭)을 신축하였으나 퇴락하여 1991년에 이상선(李商善)군수가 복원하였고 연못을 보수하고 석축한 애련교(愛蓮橋)를 시설한 뒤 연꽃을 심고 물을 정화하여 비단붕어를 기르고 있습니다.

 

 

(2) 애련당(愛蓮堂)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1656편찬)에는 '사달정(四達亭) 북쪽에 못[池]을 파고 연(蓮)을 심었는데 정자(亭子)는 못[池] 속에 있다'라고 언급하였으며, 1666년 송시열의「애련당기(愛蓮堂記)」에는 "1665년 홍양현감으로 와 있던 이구(李垢)가 소지(沼池)를 확장하면서 연꽃을 심으니 송시열이 이를 연당(蓮堂)이라 명명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홍양의 현감 이구(李垢:子重)가 그 관소(官沼)의 당(堂)을 애련(愛蓮)이라 하니 그 소애(昭愛)하는 취지가 옛 현인과 같도다…… " 라는 귀절이 있습니다. 한편 1717년 홍석보(洪錫輔) 목사의「사달정기(四達亭記)」에 "앞에 있는 못[池]을 헐다 보니 축대의 섬돌이 나왔다. 읍(邑)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곳이 사달정(四達亭)의 유지(遺址)라 한다. 이곳에 애련당(愛蓮堂)의 목재를 헐어 정자(亭子)를 세우고 사달정(四達亭)이란 편액(片額)을 걸었다" 라는 기록은 애련당(愛蓮堂)의 소재를 의미합니다.

 

(3) 청수정(淸水亭)
고종2년(1865) 홍주목사(洪州牧使) 조병로(趙秉老)가 사달정(四達亭) 터에 토석(土石)으로 청수정(淸水亭)이란 정자(亭子)를 축조했습니다. 홍주목사 김이영(金履永)의「청수정기(淸水亭記)」에 의하면 '수(水)는 맑은 연후에 물건의 진상을 거울처럼 밝히고, 청(淸)은 사람의 진심을 밝힌 연후에야 그 처사가 선명한 것이니 나(조흥진)의 마음은 물을 다스리는 법과 같기에 청심(淸心)의 뜻을 따서 청수정(淸水亭)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이후 31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청수정(淸水亭)도 자연 훼철되었습니다.

 

(4) 여하정(余何亭)

 



 여하정(余何亭) 위치도[홍성군청 내] <google사진참고>

여하정(余何亭)

여하(余何): 나는 백성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여하정(余何亭) <참고사진>
여하정(余何亭)은 홍성군청 뒤 안회당(安懷堂) 뒷뜰과 연접한 소당(小塘)에 있는 3평 정도의 각정자(六角亭子)로 고종33년(1896) 홍주목사(洪州牧使) 이승우가 옛 청수정(淸水亭)자리에 세운 것으로, 홍주목사들이 관아 일 틈틈이 휴식을 취하던 곳입니다. 1975년과 2005년에 보수하여 옛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는 여하정(余何亭)은  연못 가운데에 세운 수상정(水上亭)이고, 바닥과 기둥은 나무로 되어있으며 지붕에는 기와를 얹었습니다.

 여하정(余何亭) 현판 <참고사진>
여하정(余何亭)이란 글씨는 조선 말기의 문신(文臣) 필서가(筆書家) 김병수(金炳秀: 문과에 올라 벼슬 참판에 이름, 1847~미상) 선생이 썼습니다.

 선자연(扇子椽) <참고사진>

 

추녀를 중심으로 양쪽으로는 부채살처럼 방사선으로 서까래가 걸립니다. 이를 부채살모양이라고 하여 선자연(扇子椽)이라고 합니다. 

 

 

여하정(余何亭) 중수기(重修記)  <참고사진>

 

 

여하정(余何亭) 중수기(重修記), 2005년 11월  <참고사진>

 

 

 여하정(余何亭)

 

<참고사진>

 

여하정(余何亭)은 육각형의 나무기둥 6개로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데 기둥마다 오언시(五言詩)가 주련(柱聯)으로 각 2개씩 총 12개가 걸려있습니다. 기둥 주련에 걸려있는 한시(漢詩)의 작자는 미상이지만, 홍주목사(洪州牧使) 이승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시(漢詩)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참고사진>

 

                               余方有公事(여방유공사: 내 바야흐로 목사로서 공사를 보게 되어)
                               作小樓二間(작소루이간: 조그마한 누 두간(二間)을 지었도다
                               懷伊水中央(회이수중앙: 연못의 물은 중앙으로 맴돌고)
                               樹環焉泉懸(수환언천연: 등나무가지는 샘가에 달렸도다)

                               開方塘半畝(개방당반구: 연못을 열어 반이랑 정도 물을 대니)
                               九日湖之湄(구일호지미: 호수의 물살에 햇빛이 아름답구나)
                               一人斗以南(일인두이남: 남쪽은 한 사람의 도량으로 가하건만
                               捨北官何求(사북관하구: 북쪽을 다스릴 관리는 어떻게 구하리오)

                               環除也皆山(환제야개산: 환제[산 많은 중국지명]는 모두가 산인데)
                               於北豈無住(어북기무추: 그 북쪽엔들 어찌 새가 없을소냐
                               賓主東南美(빈주동남미: 손님과 주인이 동남에서 만나 좋아하니)
                               其必有所樂(기필유소락: 반드시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여하정(余何亭) 옆에는 200년 된 왕버들 나무 한그루가 옆으로 비스듬하게 누워있어 운치를 한층 더해주고 있습니다.

 

 

왕버들 나무[수령 200년]

 

 

고목(古木) 앞 석상(石像)

 

찾는 이들의 편안한 쉼터 여하정(余何亭)


여하정(余何亭) 야경 <참고사진>

 

홍성 8경 중 하나로 지정되어 있는

여하정(余何亭)은

달빛 밝은 밤이면 더욱 아름답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5) 내아(內衙)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내아(內衙)는 목사(牧使)의 관사로 동헌(東軒)의 남서쪽에 있었으며, 1870년에 한응필 목사(牧使)가 14.5간의 건물을 보수한 기록이 있지만, 현재는 소실되어 없습니다. 태종16년(1416) 8월10일에 홍주(洪州)에 판관(判官)을 배치하였으므로 판관이 부임한 1416년 이후에 내아(內衙)건물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홍주군자료>

                                                                                                                                                                내아(內衙) <참고자료>
내아(內衙)는 'ㄱ'자 형태의 건물로 입구 담장에는 솟을대문이 보입니다.  동헌(東軒)을 외동헌과 내동헌으로 나누어 수령의 집무처를 외동헌, 수령의 살림집으로 내동헌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외동헌을 동헌, 내동헌을  내아(內衙)라고 불렀습니다.

 [참고사진]

 

울산읍성 내아(內衙) <참고사진>

 

 

(6) 책실(冊室)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관아(官衙)건물의 중심 동헌(東軒) 남쪽에 11.5간의 책실(冊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책과 문서를 보관하면서 목사(牧使)의 자제와 아객(衙客: 관청손님)이 거처하였습니다. 1870년에 한응필 목사(牧使)가 있을 때 보수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후로는 군수(郡守)관사로 사용하였으나 현재는 철거하여 없어졌습니다. <홍주군자료>

 

                                                                     책실(冊室)  <참고자료>
                                      'ㄱ'자 형태의 건물로 내아(內衙) 건물과 상당히 유사한 형태입니다.

 

[참고사진]

 

결성읍성 책실(冊室) <참고사진>

 

 

(7) 안회당(安懷堂)=동헌(東軒)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동헌(東軒) <참고자료>
 

안회당(安懷堂) 위치도[홍성군청 내] <google사진참고>


     홍주(洪州) 동헌(東軒) 안회당(安懷堂)  <참고사진>
안회당(安懷堂)은 조선시대 고종7년(1870) 홍주목사(洪州牧使) 한응필(韓應弼)이 현존하는 동헌(東軒)을 개축(改築)하였습니다. 안회당(安懷堂)은 조선시대 목, 부, 군, 현 등 지방행정 단위에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이 정무를 보던 청사인 동헌(東軒) 건물로 정면 8칸, 측면 3칸, 팔작지붕의 목조기와 건물입니다. 

                                           


 



안회당(安懷堂) <참고사진>
일반적으로 동헌건물은  'ㅡ'자형의 건물로 중앙에 대청마루, 양쪽에 온돌방을 두는 것이 보통이지만, 안회당(安懷堂)은 오른쪽 2칸이 장주초석(長柱礎石)을 사용한 누마루로 되어있어 사랑채와 같은 역할을 하고있습니다. 건물 왼편에 3칸의 온돌방을 두고 정면 중앙 5칸에 툇마루를 두고있어 관청이라기 보다 살림집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런 건물의 형태는 구한말 양반집 저택의 유형으로 관청건물에는 그리 쓰이지 않는 구조입니다.

 

   안회당(安懷堂) <참고사진>
   홍성군에 신청사가 건축되기 이전에는 18인의 홍주목사와 여러 흥주군수들이 행정을 집행하던 사무실이었습니다.

 

 안회당(安懷堂)

홍주목사(洪州牧使) 한응필이 철종(哲宗)과 고종(高宗)의 성은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안회당(安懷堂)과 연결된 누각(樓閣)으로 취은루(醉恩樓)를 붙여 지었다는 기록으로보아 처음 'ㅡ'자형 건물에서 누각을 붙여지으면서 'ㄱ'자형 건물로 변형된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사진>

 

 

 

동헌(東軒)이란 현판 대신 

안회당(安懷堂)

이란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

安懷堂』이란 현판은 고종7년(1870) 흥선대원군으로부터 하사받았다고 전하지만, 을유해방(1945) 이후에 분실되어 지금은 다른 글씨의 현판이 걸려있습니다.

 

 

안회당(安懷堂) 현판

 

1991년 안회당(安懷堂)을 부분보수할 때 현판을 임재유(林載佑)씨의 글씨로 새로 만들어 걸고, 안해당기(安懷堂記)도 새롭게 조각하여 걸었습니다. <홍성군자료>

 

안회당(安懷堂)이란 이름은 논어의 「노자안지 붕우신지 소자회지(老者安之 朋友信之 小者懷之)」에서 인용한 것으로, "노인을 평안하게 모시고, 벗은 믿음으로 대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안회당기(安懷堂記) [1991년 새로 제작함] <참고사진>

 

安懷堂記
歐陽子豊樂亭記曰宣上恩德하야 以興民共樂은 剌史之事也라 하니 誠哉라 是言也여 以剌史 而不能宣上恩德則 民安得樂이며 不興民共則 執謂剌史之事乎아 若歐陽子可謂報答 國恩而 亦可興語安懷之道也라다 宣上恩德이 固是安懷之方也요 興民共樂이 亦是安懷之則 爲臣子하야 憂國奉公이 古今一轍이요 前後一揆也라 顧以鹵姿로 幸生大有之世하야 猥蒙盛龍하야 歷事兩朝하고 換符至九하니 自天降이 逈出尋常萬萬則頂踵毛髮이 何莫非國恩이며 衣服飮食이 何莫非君賜요 況白髮高堂이 養以榮寵하니 其在奉檄之喜와 欲報之恩이 天地無涯하고 河海難量이로다 於丁卵歲來守洪州하니 洪州는 古之海豊縣而府衙之廢이 未知幾許年所也오 城堞傾頹하야 臥柳城橋하고 廳壁荒하야 碧蘚滿庭하니 於是乎邑人之指點과 識者之慨嘆이 厥有久矣라 越四年庚午春에 乃有府衙新建之擧하니 克承景福宮重建之休也과라 祗奉朝令하야 播告州民하고 --我龜하야 建此棟宇할새 運木石而克動하고 執-墨咸和하야 築之也하야 登登하고 約之也閣閣하야 以其年丁亥月旣望에 落之하니 雖以民力爲之而是實王靈之攸-也라 謂其聽事之堂日安懷者는 蓋取諸魯論에 老者安하고 少者懷之義也라 余以無與語於聖人之道라마는 然而圖報 國恩之徵이 每切於安老懷少라 故로 吾以名吾堂也로다 凡此蒼生이 爲王者天而吾能安之則庶可以報王矣요 凡此赤子爲國之本而吾能懷之난 則庶可以報國矣니 使斯民으로 無凍之嘆者는 安之之道也라 幸際堯舜兪之治하야 恐負-黃循良之責이라 故로 登斯堂也하야 五其有思乎是邦之內에 室生涯夏署雨와 冬祁寒에 小民이 得無怨咨聲歟아 春東作하고 秋西成에 農夫果有-稷之慶歟아 衣帛食內之老者幾人이며 襁負其子而至者幾人고 하야 造次焉必於是民하며 安不安歟아 每未及하야 苟或一老者之獲이면 惡在其奉公也며 一少者之失所면 惡在其任責者也리오 吾之此心이 及於一州之老與幼면 則庶可爲報之誠字이오 牧之道也니 非敢曰能於安나 而亦何必自劃耶아 是故安之安我也之我也安民之安而民亦安其安焉하고 民之而民亦其焉이면 則斯堂之名이 豈徒然而巳哉아 焚香坐하야 以余告余曰古之豊樂과 今之安는 名雖殊나 而其爲民之意는 則一也니 汝其愼하야 無愧古人也하라 噫 --旣退하고 符牒-停에 梅月이 微生하고 篆烟이 初歇이라 憑軒瞻眺則鳳首環하고 鳥棲入-하고 月山이 聳出하야 雲屛之晩色蒼蒼烟島低回海門之夕暉淡淡하고 金馬逝川이 東北-하야 穩流若橫帶하고 平鋪如鏡面하니 誠十二島之管領이오 甘七坊之都會과 呈其態할 供其賞者는 固是湖西之一勝州오 而斯堂이 又盡得是州之勝狀也러라 把酒臨風에 琴娥騷客이 -敍幽하니 可謂太守之樂也나 然而吾州之民이 或有不得其所者면 雖有百尺之棲와 數之美와 烟霞之寄하고 豈能-樂哉아 故로 曰與民共樂은 吾以爲安之義也와 今大院位特嘉命名之義하야 親自手書하야 生斯堂之顔色하니 余乃常目在之하야 名焉在玆하고 念焉在玆矣라 後之繼余而玆州者는 顧名思義하야 斯堂名으로 稱其情則이면 庶幾有補於政化之萬一云爾로다 按安懷堂醉恩樓非別棟卽其時政事堂而安懷堂今廢舍之事務室正中醉恩樓今廳舍事務室東北隅一棟而偈二額也安懷醉額恩二俱不現傳恐是兵遺失

 

洪州牧使 韓應弼 誌 
(해설 : 堯와 舜이 政事를 論할 때에 應待하기를 曰都曰兪라 하였고 龍黃이라 함은 -遂와 黃覇를 말함이니 漢나라의 良吏이다.)

<홍성군자료>

 

 

 안회당(安懷堂) 남서쪽

 

 

                                 안회당 뒷면의 굴뚝

 

 

 오른쪽 후측면 2칸의 툇마루

 

안회당(安懷堂) 뒷면

 


(8) 취은루(醉恩樓)

 

 

 

취은루(醉恩樓) 위치 <참고사진>

 

취은루(醉恩樓)는 동헌(東軒)인 안회당(安懷堂)과 연결된 누각(樓閣)입니다.

 

취은루(醉恩樓)
한응필(韓應弼) 목사(牧使)가 쓴 취은루기(醉恩樓記)에 의하면 한응필(韓應弼)은 철종(哲宗)때 관직에 올라 고종(高宗)때 까지 양대(兩代)를 무사히 지내기에 성은(聖恩)에 보답한다는 뜻으로 루(樓)를 안회당에 붙여 짓고 아침 저녁으로 북쪽을 향하여 사배(四拜)하였으며, 누각(樓閣)의 이름도 임금의 성은에 도취했다는 뜻으로 취은루(醉恩樓)라 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취은루(醉恩樓) <참고사진>
취은루(醉恩樓)는 정면2칸, 측면2칸으로 삼면(三面)에 세살문(細箭門)이 달려 정자(亭子)와 같은 기능을 하였으며, 조선 후기건물에 많이 보이는 구조입니다
 취은루(醉恩樓)의 장주초석(長柱礎石)

 

 

(9) 급창청(及唱廳)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군(郡)의 관청에서 부리던 사내 종을 급창(及唱)이라고 합니다. 주로 원님의 명령을 간접으로 받아서 큰소리로 전달하던 급창들이 있는 청사를 급창청(及唱廳)이라고 하는데 쉽게 말해서 관노(官奴)가 거처하던 곳입니다. 

 

                                                                 급창청(及唱廳) <참고자료>
1870년에 한응필 목사(牧使) 떄 급창청(及唱廳) 5칸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위치는 동헌의 동남방 가까운 곳에 공고(工庫)와 마주보는 북향건물이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어 없습니다.

(10) 내삼문(內三門)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위 지도에 보면 외삼문(外三門)과 내삼문(內三門)은 동헌(東軒) 정면의 직선상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1870년 한응필(韓應弼) 목사(牧使)가 재직시 내삼문(內三門) 10.5칸을 수리한 기록이 있지만, 내삼문(內三門)은 기미독립운동 때에 정당한 항쟁을 제지 탄압하기 위하여 홍성(洪城)에 진주한 일본군(日本軍)이 군수(郡守)를 추방하고 홍성(洪城) 군청(郡廳)을 병영(兵營)으로 점령한 후에  내삼문(內三門)과 남과 북으로 행랑을 이어 담장을 대신했던 건물을 헐어버렸습니다.
      홍성군청 청사도 <참고자료> 
홍주아문(洪州衙門) 에서 보면 홍성군청 건물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홍주아문이 외삼문(外三門)이라면 그 안에 내삼문(內三門)이 있었고 그 뒤로 동헌(東軒)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내삼문(內三門)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군청 건물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내삼문(內三門)

<참고자료> 

 

외삼문(外三門)은 가운데 칸이 높은 솟을대문으로 그려져 있지만, 내삼문(內三門)은 평대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내삼문 좌우로 행랑같은 다른 건물이 붙어있는 것으로 보여 아래 사진의 낙안읍성의 내삼문같은 모습이지 않았을까 상상해봅니다.  <개인의견> 

[참고사진]

 

낙안읍성 내삼문 <참고사진>



(11) 공고(工庫)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공작물(工作物) 저장소로서 지금의 관청 창고입니다. 1870년 한응필(韓應弼) 목사(牧使)가 재직시 공고(工庫) 5칸을 수리하였으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습니다.

 

                                                                        공고(工庫) <참고자료> 
그림으로 보아서는 'ㅡ'자형 건물로 보이며 옆의 공수(公須) 행랑(行廊)채 건물과 붙어있어 실제는 아래 12) 항목의 참고사진과 같이 길다란 'ㅡ'자형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개인의견> 

 

(12) 공수(公須)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공수(公須)의 사전적 의미는 '공공 단체에서 공적으로 쓰는 비용 또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공수청(公須廳)은 관아에서 쓰는 경비를 회계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홍성군자료에는 "공수(公須)는 행랑(行廊)을 의미하며 행랑은 주로 대문의 양쪽에 벌려 있어 하인이 거처하도록 만든 방인데, 이곳에서는 목사(牧使)의 하인이 거주하였다."고 되어있습니다. 무엇이 옳은지 검토가 필요해 보입니다.

 


                                                             공수(公須) <참고자료>

 

1870년 한응필(韓應弼) 목사(牧使) 재직시에 8칸을 수리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재는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습니다. 1912년 9월 홍주금융조합(洪州金融組合)이 이곳에 설립된 바 있습니다.

그림으로보면 'ㄱ자형 건물이 담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행랑은 공고(工庫)건물과 붙어 실제는 하나의 긴 건물을 두가지 용도로 나누어 사용할 수 있도록 구조를 바꾸어 설치했을 것으로 추정해 봅니다. 아래의 사진은 '강릉 선교장의 동행랑' 으로 행랑의 길다란 건물 형태가 이와같아서 반은 공고(工庫)건물로 반은 행랑채로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개인의견> 

                                                                                     [참고사진]
                                                                             강릉 '선교장' 동행랑

 

 

(13) 관노청(官奴廳)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관노청(官奴廳)은 외삼문(外三門)의 북쪽에 위치하였으며 1870년 한응필 목사가 9칸을 보수하였으나 현재는 훼철되어 없습니다. 이 지도에는 관청(官廳)이 없고 관노청(官奴廳) 건물이 단순히 관노(官奴)들만의 공간으로는 큰 것으로보아 관노청(官奴廳) 건물은 관청(官廳)의 역할을 동시에 하지않았나 여겨집니다. <개인의견> 

 

                                                                   


                                                                     관노청(官奴廳) <참고자료>
관노청(官奴廳)은 관아 안 노비들이 일하거나 쉬면서 명령을 기다리던 대기소였으며, 관아에서 일하는 노비들의 명부를 보관하고 관아에 들어오는 노비들의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관노청(官奴廳)에는 관노비(官奴婢)를 통솔하는 수노(首奴) 1인과 청내(廳內)의 명령을 전달하는 급창(及唱) 2인, 부사(府使)나 목사(牧使)등 지방관아의 수령을 찾아온 손님에게 차와 담배 등을 접대하는 방자(房子) 2인이 배치되었고 관노(官奴)는 12인이 있었습니다. 한편 관청(官㕔)은 관주(官廚)라고도 하였는데 지방 관아의 주방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였습니다. 이곳에서는 수령과 가족들의 식생활, 빈객 접대와 각종 잔치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고 회계사무를 관장하였습니다.

(14) 외삼문(外三門)


 외삼문(外三門)인 홍주아문(洪州衙門) 위치도 <google사진참고>
조선왕조때 홍주목(洪州牧)의 동헌(東軒)인 안회당(安懷堂)의 외삼문(外三門)을 홍주아문(洪州衙門)으로 불렀습니다.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바깥담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을 외삼문(外三門)이라 하지만, 실제로는 가운데 칸이 솟을대문 형식의 정면5칸의 건물입니다. 그렇다면 외삼문(外三門)이 아니라 외오문(外五門)이 되었어야 할터인데... 아래의 1920년대 홍성군청 정문인 홍주아문(洪州衙門)의 사진을 보면 가운데 1칸은 솟을대문으로 처리된 문(門)이고 양쪽 각2칸은 행랑형식의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외삼문(外三門)이 아니라 외대문(外大門) 또는 외문(外門)이라 해야 하는 것 아닌지 의문이 듭니다. <개인의견>
                                                                               외삼문(外三門) <참고자료>

                                 

         

 

 

1920년대 홍주아문(洪州衙門) <참고사진>



1966년 홍주아문(洪州衙門) <참고사진>

 

그런데 위의 새로운 사진에는 홍주아문(洪州衙門)이 양쪽으로 각 1칸을 벽으로 막아 행랑으로 처리하고 가운데 3칸은 솟을삼문 형식의 구조로 되어있습니다. 이럴 경우는 외삼문(外三門)으로 불러도 될 것 같습니다만 홍주아문(洪州衙門)도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이 변하여 원래의 모습이 어떤 구조인지 알아야 정확한 복원이 이루어졌다고 하겠네요. 


홍주아문(洪州衙門): 사적 제 231호
홍주아문(洪州衙門)우리나라 아문(衙門) 중에서도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군청(郡廳) 정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홍주아문(洪州衙門)은 역대 홍주목사(洪州牧使)가 행정을 하던 안회당(安懷堂) 외문(外門)으로 1870년 당시 홍주목사(洪州牧使) 한응필(韓應弼)이 홍주성(洪州城)을 대대적으로 보수하며 세운 것입니다.
홍주아문(洪州衙門) 현판 <참고사진>
홍주아문(洪州衙門) 현판의 글씨는 원래 흥선대원군이 친필로 써서 사액(賜額)한 것이었는데 6.25 전후해서 분실되었습니다. 현존하는 홍주아문(洪州衙門) 글씨는 홍성군 광천(廣川)에 살았던 어느 중국인 글씨라고 전해지기도 하지만 누구의 글씨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홍주아문(洪州衙門) 가구(架構)

 

 

홍주아문(洪州衙門) 가구(架構)

 

 

<참고사진>

 

 

 

홍주아문(洪州衙門) 안쪽면

 

3·1 운동 당시 홍성의 만세사건을 진압시키기 위해 진주한 일본군이 홍성군청을 병영으로 삼고 내삼문(內三門)을 비롯한 여러 건물들을 헐어버렸는데 다행히 외삼문(外三門)인 홍주아문(洪州衙門)은 살아남아 현재와 같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홍주아문과 그 옆 홍성군청 정문 <참고사진>

 

홍주아문(洪州衙門)은 문화재 관리국의 지원을 얻어 현재와 같이 보수하고, 종전에 홍주아문(洪州衙門)을 군청 정문으로 활용하던 것을 막고, 그 옆으로 현재의 군청 정문을 따로 세워 활용케 하였습니다.

 

 

                                 보호수 느티나무[수령 약210년]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쌍느티나무]

 

군청 앞에는 높이 17m, 둘레 6m 정도의 600년이 넘은 커다란 느티나무 두 그루의 나무가 한 쌍으로 서로 얽혀있습니다. 보우국사가 왕사가 된 것을 기념으로 심었다고 전해지는 느티나무입니다.  <홍주군청홈>

 

 

 

 

      제물을 차려 놓았던 받침돌 <참고사진>

 

 

<참고사진>

 

이 나무는 마을에 액운이 낄 때마다 울어 목사가 마을이 화를 당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수호수입니다. <홍주군청홈>

<참고사진>


홍주에 부임하는 목사들은 가장 먼저 이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지냈고, 지금도 홍성에서 큰 행사를 할 적에는 이곳에서 제사를 지냅니다. <홍주군청홈>

 

 

(15) 사령청(使令廳)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사령청(使令廳)은 장교청(將校廳) 또는 군관청(軍官廳)의 하부기관으로 사령(使令)들의 집무실입니다. 사령(使令)은 중앙과 지방 관청에서 심부름 등의 천한 일을 담당하며, 군관(軍官), 포교(捕校) 밑에서 죄인에게 곤장을 때리는 일 등을 맡았고 일에 따라서 조례(皁隷), 문졸(門卒), 일수(日守), 나장(羅將), 군노(軍奴)등으로 나뉘어집니다.

 

                                                           사령청(使令廳) <참고자료>
1870년 한응필(韓應弼) 목사(牧使)가 12.5칸을 수리했으나 1922년 1동이 훼철되고 나머지 일동은 후기에 훼철되었습니다. <홍성군자료>

[참고사진]

 

충남 부여군 홍산면에 위치한 홍산현 관아의 복원된 사령청(使令廳)  <참고사진>

 


(16) 장관청(將官廳)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장관청(將官廳)은 사달정(四達亭)의 북쪽에 있었으나 현재는 소실되어 없어졌습니다.                                                                                                           장관청(將官廳) <참고자료>

 

장관청(將官廳)은 속오군(束伍軍)을 지휘하기 위하여 파견된 별장(別將:정3품), 천총(千摠:정3품), 파총(把摠:종4품), 중군(中軍:종2품) 등과 같은 군장관(軍將官)들이 군무(軍務)를 집행하던 관청입니다.

속오군(束伍軍)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시 기존의 국방체제인 중앙의 5위제도와 지방의 진관체제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정부에서는 전쟁중에 군제를 전면적으로 개편했는데, 이때 지방에는 속오군이 설치되었다. 이는〈기효신서 紀效新書〉의 속오법에 따라 양반, 중인, 양인, 공사천으로 조직된 혼성군이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군포(軍布)를 바치고 유사시에만 소집되었다. 임진왜란 후 훈련도감 등 5군영을 설치하여 속오법에 따라 훈련하였다.



[참고사진]
동래읍성 장관청(將官廳) <참고사진>

   

 

 

(17) 장청(將廳)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장청(將廳)은 현재 경찰과 같은 범죄수사나 죄인 체포를 위한 업무를 담당한 군관(軍官)과 기찰(譏察)들이 근무하던 곳으로 지금의 경찰관이 주재하는 지서나 경찰서 같은 관청입니다.
                                                                                                                                         장청(將廳) <참고자료>
                                           장청의 위치는 내삼문의 북쪽 관노청의 서쪽에 있었으나 훼철되었습니다.

 

[참고사진]

 

고창읍성의 장청(將廳) <참고사진>

 

 

(18) 작청(作廳)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작청(作廳)은 이방(吏房)과 아전(衙前)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이방청(吏房廳) 건물로 ‘전헌(詮軒)' ’인이청(人吏廳)‘ ’질청(秩廳)‘ ’연청(椽廳)‘ '길청(吉廳)'이라고도 합니다. 사무가 이루어지는 관청이라는 뜻에서 작청(作廳)이라 부릅니다. 아전(衙前)이란 조선시대의 하위직 관리를 일컫는 말입니다.

 

 

                                                              작청(作廳)

<참고자료>

 

작청(作廳)은 외삼문(外三門)과 전영동헌(前營東軒)사이에 있는 넓은 지역을 차지한 청사(廳舍)로 사방이 담으로 둘러있으며 남쪽으로 3칸 규모의 정문(正門)이 있습니다. 담장 안으로 'ㄱ'자형의 본 건물과 입구 동쪽으로 3칸 규모의 작은 건물이 보입니다. 작청(作廳)은 1920년경 경찰관의 숙소로 사용되다가 훼철되었습니다.

 

[참고사진]

 

고창읍성의 작청(作廳) <참고사진>



(19) 토포청(討捕廳)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토포청(討捕廳)은 단순히 도적을 잡는 포도(捕盜)보다는 폭도(暴徒)를 토벌하고 도적이나 법죄자들을 잡아들이는 소임을 맡은 별포군(別捕軍)의 근무처입니다. 진영(鎭營)의 영장(營將)이 토포(討捕)의 일을 겸직할 경우 토포사(討捕使)라 합니다. 소속 관원인 별포군(別捕軍)은 고을 병방(兵房)과 장청(將廳)의 지휘를 받아 도둑을 추포(追捕)하는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광무10년(1906)에 각 지방마다 경찰 업무를 맡아보는 경무서가 설치되자 토포청(討捕廳)의 업무도 이관되어 폐지되었습니다. 융희1년(1907) 각 지방 경무서는 경찰서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토포청(討捕廳) <참고자료>

홍주목(洪州牧)에 토포사(討捕使)가 머물던 토포청(討捕廳)이 있었던 것은 오래입니다. 그 위치는 작청(作廳)과 집사청(執事廳)의 사이로 북쪽에 있었으나 현존하지 않습니다.

(20) 집사청(執事廳)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집사청(執事廳)에는 군과 경찰 사무를 담당하던 포도리(捕盜吏)들이 업무를 보던 곳입니다. 경찰청의 마스코트가 바로 포돌이와 포순이로 이 포도리에서 유래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북과 뿔피리, 태평소 등을 불어 문루의 개폐(開閉)를 알렸습니다. <홍성군자료>
                                                    집사청(執事廳) <참고자료>

 

집사청(執事廳)의 작청(作廳)과 전영동헌(前營東軒) 사이에 위치하였으며 지금의 우체국 대지가 이에 해당되나 현존하지 않습니다.

 <홍성군자료>

 

 

[참고사진]

 

 

화성행궁의

집사청(執事廳)

<참고사진>

 

 

(21) 남관(南)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남관(南館)은 홍주(洪州) 진영(鎭營)의 영장(營將)의 교귀소(交龜所)이며 손님을 접대하던 곳입니다. 객사(客舍) 남쪽에 위치한 관계로 남관(南館)이라 하였습니다. <홍성군자료>

교귀소(交龜所): 전현직 관찰사가 임무 교대식을 가지는 곳입니다. 조선시대 관찰사 인장(印章)은 그 뚜껑이 공통적으로 거북이                         모양을 하고 있기에 교대하는 장소를 '교귀소'라고 불렀습니다.


경종1년(1722)에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부임했던 이정제(李廷濟)가 이듬해 여름「남관기(南館記)」를 지었습니다.

 

南館記
南館이 在州城之中하야 ---塏하고 前有水田數十區하니 溪流--하야 環其下하고 遠近峰岳이 隱隱獻其寄秀하고 庭帿射鵠而較藝之하니 亦一快也로다 館凡十數架요 架各七-이니 長而 廣하야 以其處客館館之南이라 故名之南館云하니 父老傳古事에 我使由水路하야 朝宗時에 上船於州南海濱하니 此爲館이 接宴饗之所나 文獻은 無徵而可行也라 以余所科론 壬辰之亂에 命東官하야 駐-千洪하야 文武諸臣이 多從之하니(白沙李公集中)斯館之이 或在其時耶아 館之頹壤亦垂累十年하고 後逾改 而去其半이라 事未半而中-하고 後二年에 余適笠玆州하야 亦嘗留意斯役而歲荒民-하고 且値量田하야 未遑土木事러니 節制使閔候馳書하야 告以工訖하고 因索揭楣之文하니 噫라 館之興廢亦有數者存耶아 昔之傾歪者-桶 翼然하고 昔之渙患者丹碧煥然하야 可以館 賓客而饗僚佐하며 可以點軍客而閱校士하니 無統前人하고 無廢後觀에 其亦長於州者之幸也라  候以余之興聞其事로 求文甚動이오 余亦不能而無情於玆州하야 不敢以不文으로 辭하고 略敍始末하야 以歸之云爾이로다           壬寅榴夏 桂陽 李廷濟 記
내용을보면 남관(南館) 앞에는 논밭이 있어 시냇물이 흐르는데 뜰에는 4개의 느티나무가 있어 그늘이 매우 시원했다. 집무를 보고 나서는 시를 읊기도 하고 여흥으로는 활쏘기로 재주를 겨루기도 했다. 관(館)에는 10여개의 시렁(架)에 각각 7량(樑)씩 놓여 있어 향연의 자리로서 적합했었다. 임란(壬亂)때에 광해군[동궁]이 주차(駐箚:공무를 띠고 머무름)했을 때 문무제신이 많이 따라왔었을 때 사용되었다. 관이 허물어진 후 수 10년이 지나 개수하다 중단된 채 2년이 지난 후 이정제(李廷濟)가 부임하였다. 이 역사(役事)를 시작하였으나 흉년에 백성이 주림으로 토목공사를 이루지 못한 채 중지하였다. 절제사 민사연(閔思淵)이 1722년에야 중수를 완료하였다. 남관기(南館記)에 이르기를 '남관의 퇴락에도 수가 있는 법, 난잡하게 퇴락됐던 기와지붕이 새롭게 날개를 쳐들었고 낡아빠진 몸체는 단청으로 광채가 나니 빈객과 관료들은 향연을 베풀고 군객(軍客)과 장병들이 사열(査閱)하는도다"라고 하였다. <홍성군자료>

 

 

                                                    남관(南館) <참고자료>

 

남관(南館)은 홍주(洪州) 진영(鎭營)안에 있던 5칸의 목조 기와지붕 건물로 지도에는 전영동헌(前營東軒) 바로 서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남관기(南館記)에 의하면 이정제(李廷濟) 목사(牧使)가 개축착공하였고 후임자 민사연(閔思淵) 절제사가 1722년 3월 준공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훼철되어 현존하지 않습니다. <홍성군자료>

 

 

(22) 전영동헌(前營東軒) = 진영동헌(鎭營東軒)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군사제도(軍事制度)는 세조3년(1457) 주요한 지역을 거진(巨鎭)으로 하되 주변지역의 여러 진(鎭)을 그에 종속시키는 진관체제(鎭管體制)로 개편하였습니다. 지방군의 최고 책임자로는 각도에 병마절도사(종2품)를 두어 주진(主鎭)을 관할케 하고 주진 아래에는 목사(牧使)가 겸임하는 첨절제사(僉節制使)가 거진(巨鎭)의 군사권을 장악하였습니다.
태종8 년(1457)에 홍주(洪州)가 거진(巨鎭)이 되어 5군 14현을 관장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홍주(洪州)에 진영(鎭營)이 세워진 시기는 1408년에서 1457년 사이로 여겨집니다. 참고로 각도의 진영(鎭營)은 원칙상 전(前), 후(後), 중(中), 좌(左), 우(右)의 5영(營)으로 구분하고, 호서지방(湖西地方: 충청도)은 전영(前營)을 홍주(현 홍성), 후영(後營)을 충주, 중영(中營)을 청주, 좌영(左營) 해미, 우영(右營)을 공주에 두고 방어케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홍주(洪州)에는 목사(牧使)가 진영장(鎭營將)을 겸할 수도 있었지만, 대개는 문관(文官)인 목사와 함께 무관(武官)인 진영장(鎭營將)이 별도로 파견되었고, 목사의 동헌과 진영의 동헌이 별도로 존재하였습니다
                                                            전영동헌(前營東軒) <참고자료>
홍주(洪州) 진영(鎭營) 즉 충청도의 전영(前營)의 동헌인 전영동헌(前營東軒) 건물의 위치는 동문(東門)에서 제일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남관(南館)의 바로 동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전영동헌(前營東軒)은 남향이며, 앞에 내삼문(內三門) 그리고 폐문루(閉門樓)가 있었습니다. 부속 청사로 집사청(執事廳)과 토포청(討捕廳)이 서쪽에, 군기고(軍器庫)와 군기청(軍器廳)이 북쪽에 있었습니다. 옥(獄)은 내를 건너 서남방에 있었습니다. 현재로보면 전영동헌(前營東軒)의 위치는 조양문(朝陽門) 서쪽에 위치한 한국통신 건물 자리로 추정하고 있으며, 8칸의 목조 기와건물로 역대 영장(營將)들이 이곳에서 집무하였습니다. 
홍주 진영(鎭營)은 임란때 선조대왕 제2왕자 광해군이 머물렀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선조25년(1593) 임진 4월에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온 나라를 휩쓸어 선조가 5월에 평양에서 제2왕자 이휘(李暉)를 임시로 왕세자로 책봉하여 남방에 무군사(撫軍司)란 편의대(便衣隊)를 조직하여 나라 일을 처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1593년 5월에 왕세자가 관료(官僚)와 재신(宰臣)들을 대동하고 홍주 진군(鎭軍)을 지휘관장하였습니다. 광해군(光海君)이 무군사(撫軍司)로 주재하였던 사령부가 바로 진영동헌이었습니다. 한편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明)나라 제독(提督) 진린(陳隣)과 우리나라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이 군대를 거느리고  홍주성에 주둔(駐屯)하였습니다.

 

 

[참고사진]

 

 

홍산 동헌 <참고사진>

 

조선 전기의 군사제도
조선의 전기의 군사제도는 크게 중앙군과 지방군으로 나누었다. 중앙군은 중위·전위·후위·좌위·우위의 오위를 두고 그 통제기관으로 오위도총부를 두었다.
지방군의 국방체제는 진관제(鎭管制)였다. 이것은 전국의 행정단위로서의 읍(邑)을 동시에 군사조직 단위인 진(鎭)으로 편성하여 그 규모에 따라 주진(主鎭), 거진(巨鎭), 제진(諸鎭)으로 나누고 각 읍의 수령으로 하여금 군사지휘관으로서의 임무를 겸하게 한 것이다.
이러한 지휘체제는 육군(陸軍)의 경우, 각 도에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종2품)가 주진(主鎭)에 있어 도의 지휘권을 갖고, 그 아래 대체로 목사(牧使: 정3품)가 겸임하는 첨절제사(僉節制使)의 거진(巨鎭), 역시 대개 군수가 겸임하는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종4품) 및 현령, 현감 등의 절제도위(節制都尉, 종6품)의 제진(諸鎭)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육군과 아울러 (鎭管體制)를 갖추게 된 수군(水軍)은 내륙과는 달랐다. 행정단위인 도(道)를 기준으로 하되, 해역의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하여 군사기지를 설치하였다. 즉 해안을 가진 도에 수영(水營)을 설치하고 최고 지휘관으로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두어, 그로 하여금 관할 해안의 포진(浦鎭)을 통솔하게 하였다. 수사(水使)의 예하에는 거진(巨鎭)에 배치된 첨절제사(僉節制使)와 연해안의 작은 포구에 배치된 만호(萬戶)가 있다. 



(23) 경사당(景士堂)
경사당(景士堂)은 진관(鎭官) 초기의 전영(前營)으로서 군관사령실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건물은 5칸으로 진영(鎭營) 내에 있었으나 훼철되었습니다. 홍주(洪州) 진영(鎭營)은 5군 14현을 거느리던 거진(巨鎭)이었기 때문에 군무에 종사하는 인원이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진영(鎭營)소속의 관아에는 주로 내아(內衙), 교련청(敎練廳), 집사청(執事廳), 진영장청(鎭營將廳), 사령청(使令廳) 등 영장(營將) 관할의 부속관아가 많이 있었습니다.

 

(24) 도청(都廳)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도청(都廳)은 세리(稅吏)가 머물러 사무보던 관아로 지금의 세무서와 같습니다.
                                                                                                   도청(都廳)  <참고자료>
위치는 사달정(四達亭)과 동헌(東軒)의 북쪽 그리고 서문(西門) 가까이에 있었으며, 1870년 한응필(韓應弼) 목사(牧使) 재직시 7.5칸이 수리되었으나 지금은 훼철되어 없습니다.

 

(25) 사창고(司倉庫)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사창고(司倉庫)는 서해안 중앙으로서의 육상운송과 조창(漕倉)을 관할하고 창고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입니다. 또한 사창고(司倉庫)는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리는 주민에게 빌려 주기 위한 곡식을 저장해 두었던 창고이기도 합니다.                                                                                                                 사창고(司倉庫)  <참고자료>
1870년 한응필(韓應弼) 목사(牧使) 재직시 사창(司倉) 24칸을 수리하였습니다. 위치는 도청(都廳)의 동쪽, 향청(鄕廳)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1910년 훼철되었습니다.

(26) 향청(鄕廳)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향청(鄕廳)은 조선시대 지방자치기관으로 성종20년(1489)에 설치되어 지방 군현의 수령을 보좌하는 자문기구로서 지방인사 중 학문과 지식이 있는 양반을 좌수로 임명하여 향약을 행하기도 하고 부사의 유고시 정사를 대행하기도 했던 곳입니다. 향청(鄕廳)은 고려말 유향소의 후신으로 지방관인 군(郡) 현(縣)의 수령의 행정을 보좌하고 향리(鄕吏)의 악폐를 막기 위해 설치되었습니다. 향청(鄕廳)의 수장을 향정(鄕正), 아관(亞官), 좌수(座首) 또는 좌장(座長)이라 불렀으며 그 밑에 별감(別監)이 있었습니다. 향청(鄕廳)의 주 업무는 풍기단속, 향리의 감찰과 면장, 정령(政令)을 민간에 전달하는 일과 풍헌(風憲), 약정(約正)등의 추천 및 조세와 요역의 부과, 분배 등의 자문을 하였는데, 좌수(향정, 아관)는 이방과 병방을, 좌 별감은 호방과 예방을, 우별감은 형방과 공방을 각각 맡아 규찰하였습니다.
                                                                                                                    향청(鄕廳)  <참고자료>
향청(鄕廳)은 북문(北門)과 가까이 서쪽에 있으며 동쪽의 객사(客舍)와 나란히 위치하고 있습니다. 1600년대에 세워진 건물로 1870년 한응필(韓應弼) 목사(牧使) 재직시 향청의 문 6칸을 보수하였습니다. 1921년 홍주면사무소에서 임차해 사용하였으나 지금은 훼철되고 없습니다.

[참고사진]

 

고창읍성의 향청(鄕廳) <참고사진>

          

(27) 객사(客舍) : 홍양관(洪陽館)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객사(客舍)는 손님이 머무는 곳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이며 객관(客館)이라고도 불렀고, 지방을 여행하는 관리나 사신(使臣)의 숙소로 사용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객사 건물의 중앙인 정전에 전패(殿牌)를 모시고, 출장차 내방한 관원들이나 고을의 수령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그리고 나라에 경사와 궂은일이 있을 때 대궐을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건물 동서 양쪽 방은 조정에서 파견된 관원들의 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망궐례(望闕禮)전패(殿牌), 궐패(闕牌)

                                              

                                              

전패(殿牌)  <참고사진>
망궐례(望闕禮)란 조선시대에 궁궐이 멀리 있어서 직접 궁궐에 나아가서 왕을 배알 하지 못할 때 멀리서 궁궐을 바라보며 행하는 예를 말합니다. 삭망(朔望)인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지방관이 객사(客舍)에 봉안된 나무에 '전(殿)’자를 새긴 전패(殿牌)에 예를 행하는 의식이며, 또한 지방관으로 임명된 자로서 사정에 의해 조정에 하직을 하지 못하고 부임한 자도 부임지에서 망궐례를 가졌습니다. 망궐례 때는 외직에 근무하는 관찰사, 목·부사, 절도사 그리고 지방에 출장간 관원 등이 국왕이나 왕후의 탄일(誕日), 초하루,보름의 삭망(朔望), 정조(正朝),동지(冬至)에 국왕과 왕후·세자의 만수무강을 축원하거나 국왕의 붕어(崩御)시에도 근무지에서 아래 관원들과 함께 궁궐을 향해 절을 하였습니다. 조선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훔치거나 훼손시킨 자는 본인과 가족을 처형했으며, 그 고을은 혁파되고 지방관은 파면됩니다.
                                                        궐패(闕牌)  <참고사진>
태평관이나 왜관, 또는 사신이 지나가는 길목에 위치한 지방 관아의 객사(客舍)에는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궐(闕)'자를 새긴 나무 패(牌)인 궐패(闕牌)도 봉안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선비들이 회시(會試)나 정시(庭試)를 치르고자 한성에 왔다가 낙방하고 돌아가는 길에 궁궐을 향해 하직 인사를 올리는 예도 망궐례(望闕禮)라고 하였습니다.

 

                                                객사(客舍)  <참고자료>

객사(客舍)는 북문(北門)과 가까이 동쪽에 있으며 서쪽의 향청(鄕廳)과 나란히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도상으로 보면 객사(客舍) 건물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대문(大門)과 중문(中門)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1739년 정래주(鄭來周) 목사(牧使) 때 중수되고
1870년 한응필(韓應弼) 목사(牧使) 재직시에 크게 보수공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여러차례 중수를 거듭하여 임진왜란 이후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그 자리에 1921년 2월 홍성보통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1739년 에 쓴 정래주(鄭來周) 목사(牧使)의「객관중수기(客館重修記)」의 일화를 보면 '그 당시 한 기와가 문제가 생기면 연달아 몇 개의 기와장이 허물어지며 서까래 사이로 천장이 뚫리고 별이 보였다. 한 장의 기와장이 일연(一椽)의 서까래가 삭으니 기둥과 대들보가 쓰러지게 되어 수십칸의 큰 건물이 무너지기에 이르러 이의 보수(補修)에는 무한한 공력(功力)이 들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참고사진]

 

나주읍성의 객사(客舍) <참고사진>

 

 

(28) 사정(射亭)

 

활쏘기를 하는 활터에는 정자(亭子)가 있는데, 이를 사정(射亭)이라 하며, 활쏘기대회 때 진행을 맡아보는 장소나 사원(射員)들이 모이는 장소로 쓰입니다. 보통 사정(射亭)이라고 하면 활터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영(營), 부(府), 주(州), 목(牧)이 있는 곳이면 대부분 사정(射亭)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홍주목(洪州牧)에서는 일찍부터 활 쏘는 재주대회가 향속화(鄕俗化)되어 편사[便射: 편을 갈라 활쏘는 재주를 겨루는 것]가 널리 행하여졌습니다. 이곳에서 편사가 자주 행해지니 처음부터 10칸자리 사정(射亭)이 설치(設置)되었습니다. 왕성했던 사풍(射風)이 선조 때를 고비로 쇠퇴해져 약 70년 뒤에는 사정(射亭)이 8칸으로 줄어들다가 1876년 장소는 객사(客舍)의 남쪽 즉 남관(南館) 옆에 있었으나 지금은 훼철되어 없습니다.

 

[참고사진]

 

영암읍성의 사정(射亭)

<참고사진>



(29) 계풍루(繫風樓)

 

 

 

                        객사(客舍)의 동쪽 방향 참고도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현재 홍성에 존재하지 않는 계풍루(繫風樓)는 홍주의 누정(樓亭)중 하나로 1490년대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서는 1494년 충청관찰사로 와 있던 조위(曹偉 : 1454~1503)가 유서깊은 계풍루(繫風樓)라는 이름을 영훈루(迎熏樓)라 고쳤다고 전합니다. 계풍루(繫風樓)의 위치는 객관(客館) 즉  객사(客舍)의 동쪽에 있었으나 훼철되어 없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9권 
 
충청도(忠淸道) 홍주목(洪州牧)
【누정】 계풍루(繫風樓) 객관 동쪽에 있다. ○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구름은 가벼워지고 바람은 급히 불어 가을철 다가오는데, 먼 손 누정에 올라 보니 마음 갑절 어둡구나. 물 많은 고장에선 한창 농어회 맛나는 계절인데, 고향은 멀리 기러기 소식 전하여 주기 바라네. 천 겹 푸른 숲은 높고 낮게 나누어졌고, 한 줄기 푸른 산이 앞뒤를 싸안았구나. 행장 꾸려 돌아가려 해도 가지 못하는 이 몸, 그러므로 장계응(張季鷹)의 현명한 데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하였다. 『신증』 감사(監司) 조위(曺偉)가 영훈루(迎薰樓)로 이름을 고쳤다.----------------------------------------------------------------------------------------------------------------------------
洪州 繫風樓(홍주 계풍루: 바람을 붙들어 맨 누각) 
雲輕風緊近秋天。                    구름은 가벼워지고 바람은 급히 불어 가을철 다가오는데,
遠客登臨倍黯然。                    먼 손 누정에 올라 보니 마음 갑절 어둡구나.澤國正逢鱸膾美。                    물 많은 고장에선 한창 농어회 맛나는 계절인데,故鄕遙憶雁書傳。                    고향은 멀리 기러기 소식 전하여 주기 바라네.千重碧樹分高下                       천 겹 푸른 숲은 높고 낮게 나누어졌고一抹靑山擁後前。                    한 줄기 푸른 산이 앞뒤를 싸안았구나.命駕欲歸歸未得。                    행장 꾸려 돌아가려 해도 가지 못하는 이 몸,故應慙愧季膺賢。                    그래서 장계응(張季鷹)의 현명한 데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三灘 李承召(삼탄 이승소: 세조, 성종 조 문신)先生

 

 

계풍루와 관련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9권에 보면 1460년경 충청관찰사였던 이승소(李承召: 1422~1484)의 계풍루(繫風樓)에 관한 시가 있으며 또한 동국여지지(1662~1673)에 보면1591년 충청관찰사였던 이성중(李誠中 : 1539~1593)의 계풍루(繫風樓)에 관한 시도 있습니다.  

坡谷遺稾 / 七言律詩 / 繫風樓 四首 [한산군수 파곡 이성중]

 

繫風樓
湖西關險號稱洪。玉節南回到此中。多事向來雙鬢白。故人逢處百憂空。離絃怨別那禁酒。畫閣通凉不繫風。
要識昇平眞氣象。請觀分耦決雌雄。
호서의 관문 좁고 험한데 넓을 홍이라 부르니, 남쪽에서 돌아오는 봄도 여기로 이르는 중이고. 하는 일 많다 보니 양쪽 살쩍 희어졌으나, 옛 친구 만나 보는 곳에선 온갖 근심 비워두네. 거문고 소리 헤어짐을 원망하나 어찌 술을 금하랴. 그림 같은 누각 넘나드는 북풍 붙들어 매지 못하고 태평시절 진정한 기상 식견이 요구되는데 밭가는 소 암수 대결시켜 구경하네.

 

南州新府說饒洪。利盡魚鹽賦上中。天作樓臺淹玉節。地蒸氛祲射瑤空。桃花村靜人無事。白雉波恬海不風。
都督自知非雅望。勝筵猶是百夫雄。
새로 부임할 남쪽 고을 땅이 기름지고 넓다더니, 이득 없이 생선 소금 올려 보내는 중이고. 하늘에 지은 누대에 봄이 머물러 있으나 땅에서 증기 올라가니 먼 허공에 활을 쏘네. 복숭아 꽃 핀 마을 사람도 일도 없으나 바다 바람 불지 않으니 흰 꿩 눈빛도 편안해보이고. 도읍의 우두머리 청아한 인망 자신은 알지 못하나 승연의 뛰어난 사나이들 모두 인정하고 노래하네.

 

此身毫末聖恩洪。暇日偸閑積苦中。老健尙嫌弓力軟。興闌惟懼酒杯空。樓頭勝賞珠簾雨。座上淸談玉麈風。
賸欲留詩紅袖拂。愧無文字向來雄。
이 몸 털끝 하나도 임금의 크신 은혜이고, 휴일에 한가롭게 떼 지어 모여 쉬고 있는 중이고. 늙어도 오히려 건강하고 활 쏘는 힘 부드러워 미워하나, 술잔 비고 흥이 다하니 벌린 술자리 걱정하네. 훌륭한 누대 꼭대기 쳐다보니 주렴에 비 내리고 바람 부는데 옥주 들고 올라 앉아 청담 하고. 붉은 옷소매 떨치고 맴도는 시 남겨보려 하는 사나이 이제까지 문자 구하고 있어도 탓하지 않네.

 

紅紗籠燭焰成虹。寫出樓臺暗淡中。地比南昌誰最勝。尊如北海莫敎空。珠簾轉上玲瓏月。玉笛吹殘斷續風。
不醉無歸歸便睡。男兒到此亦豪雄。
희미한 무지개 이루는 붉은 사롱의 화촉 어둠속에서 누대 그려내며 아른거리는 중이고. 여기 창성한 남쪽 땅에서 가장 잘 견딘다는 누군 가르쳐 주지 않아도 북해 같은 술통 비우네. 영롱한 달은 주렴을 피하여 올라가고 그치지 않는 바람에 옥저 소리 끊어질 듯 이어지고 취하지 않아 돌아가지 못하고 돌아가면 다시 잠들고 사나이 이 정도면 이 또한 영웅호걸이 아니더냐.

 

※붉은 옷소매: 기생의 옷을 이름.
※玉麈: 옥주. 拂子. 먼지 떨 때 사용하는 도구. 번뇌 떨치는 표지.
※麈談: 불자를 들고 이야기함.

파곡 이성중이 1576-1580년 사이 한산군수 재직 중 홍주수령으로 선정을 베푼 친구가 한성부 관리로 가면서 벌인 송별연에 참석하고 홍성 계풍루에서 남긴 시. 당시 홍주목사는 서씨(파곡유고에 관련 시 4편, 이름 미상)로 나이가 많음. (徐起? 당시 인근 서천 군수로 있던 식암 황섬의 식암집에 보인다.) 옛날에는 흐릿한 기운이 계속 감돌면 불길하게 여겨 허공에 활을 쏘아 쫓아냈다.

 

그리고 충청감사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동악집(東岳集)에도 실려있습니다. 


東岳先生集卷之七. 洪陽錄.

登擊風樓 (계풍루에 올라)

高閣荒城裏。登臨異古今。秋陰垂大野。朔吹響寒林。
황폐한 성 안에 받아들인 높은 누각 올라와 내려다보니 옛날과 다른 지금가을은 큰 들판에 음산하게 끝나가고 삭풍에 나무들 오돌 오돌 떠는 소리 내네.
奉母南來日。懷君北望心。時危百憂集。搔首一長吟。모친 봉양하러 남쪽으로 온 날 임금 그리운 마음에 북쪽 바라보며위태로운 시기 백가지 근심 모인 머리 매만지고 길게 한 번 읊어보네.
※李安訥: 1571년 선조4년-1637년 인조15년.  충청감사, 예조판서 예문관 제학 역임.선조40년 1607년 丁未 8월 홍주목사로 부임한 이안눌이 12월 떠나기 전에 홍주성 안에 있던 계풍루에 올라 남긴 시. 37세 작.
朔吹: 삭풍.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 겨울바람.奉母: 모친 봉양 즉 부모를 위해서 원치 않는 벼슬도 사직하지 않고 받음을 이름.搔首: 머리를 긁거나 매만지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모습.



(30) 군기청(軍器廳)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군기청(軍器廳)은 병기(兵器), 기치(旗幟) 기타 군수품(軍需品)을 만드는 일을 맡아보는 관청으로 1760년 여지도서(與地圖書)에 홍주 영장은 무관 정(正)3품인데 그에 속한 군관(軍官)이 51명, 군노(軍牢)가 20명, 전영진군이 44명, 대장 병졸 수는 보통 600명이 넘는다 하였습니다. 군기조(軍器條)에는 홍주는 호서의 웅부(雄府)로 서남해진의 요충(要衝)지요 동북육로로는 서울의 인후(咽喉)에 위치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군기청(軍器廳)  <참고자료>

 

1872년지방지도에 의하면 위치는 객사(客舍)의 동쪽에 위치하였으며 3칸 규모로 그려져 있습니다. 현재는 모두 훼철되어 남아있지 않습니다.

(31) 군기고(軍器庫)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군기고(軍器庫)는 군기(軍器)를 관리 출납하며 병기(兵器)의 제료를 징발하여 제조하고 중앙의 군영과 지방의 진과 순영에 공급하는 창고 관리기관입니다.

 

 

                                      군기고(軍器庫) <참고자료>
여지도서(與地圖書) 군보구(軍保舊)조에 양군(良軍) 6298명 동오군(東伍軍) 855명이라 기록된 것으로 보아 군기고에는 무기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위치는 군기청의 동쪽에 있었으나 훼철되었습니다.


(32) 옥(獄)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오늘날 죄수 수감시설을 통칭해 흔히 감옥(監獄)이라 부르지만, 이 용어는 1908년 이후에 들어온 것이고 조선시대에는 ‘옥(獄)’이라 했으며 군,현 이상의 관서에는 죄인을 가두는 옥집(獄)이 따로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서는 죄인에 대한 형벌은 태장으로 볼기를 치거나, 일정 기간 노역에 처하거나, 종신 유배형을 내리거나, 심하면 사형에 처했지 오늘날처럼 감옥에 가두는 징역형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시대의 옥(獄)은 현재의 제도에 비추어보면 형벌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들이 수감되던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옥(獄) <참고자료> 
홍주성의 옥터는 관아에서 좀 떨어진 남쪽 숲안에 원형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나 훼철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감옥제도는 세종 때 본격적으로 정비되었는데 전국 각 군현 단위에 감옥을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1426년에 처음 감옥 설비의 지침을 담은 표준 감옥 설계도인 옥도(獄圖)를 반포하고, 이에 의거해 옥을 짓거나 개수하도록 했습니다. 이후 옥도(獄圖)는 1439년에 한 차례 수정되었는데, 죄수들이 무더위와 강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감옥 안에 여름용 냉옥(冷獄)과 겨울용 온옥(溫獄)을 따로 짓도록 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외에도 남자용과 여자용, 중죄수용과 경죄수용 옥사(獄舍)를 구분하도록 했으며, 모든 옥사는 평지보다 높게 짓되 옥사의 문벽(門壁)은 두꺼운 판자로 막고, 옥사(獄舍) 바깥벽에는 창문을 내어 통풍이 잘되게 했습니다. 아울러 감방 안에는 판자를 덮고, 사방 처마에는 모두 차양을 달아 죄수들이 낮에는 처마 밑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을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 복원된 옥(獄)

 

 

 복원된 홍주성 옥(獄) <참고사진> : 2012년 역사공원 조성사업을 추진하면서 현재의 위치에 복원되었습니다.

 

 

 

 

     

 

      홍주읍성의 감옥은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터이기도 합니다. <참고사진>

 

 

 

 

 원형담장 안에는 태형 형틀과 죄수를 가두는 옥사 1동이 있습니다. <참고사진>

좌측 감방에는 순교자 '방 프란치스코'의 형상의 죄수가 칼을 쓰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가운데 칸에는 포졸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참고사진>

 

 오른쪽 감방에는 일본 침략에 저항하는 여자죄수의 모습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참고사진>


(33) 경의문(景義門 : 西門)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홍주성 서쪽에 있는 문을 경의문(景義門)이라 했습니다. '초가을의 햇볕이 가을곡식을 여물게 비친다'는 뜻의 문 또는 '크게 의로운 문'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문은 1823년 이헌규(李憲圭) 목사가 중수하였고 1870년에 한응필(韓應弼) 목사가 문루를 개축하였습니다. 대원군이 경의문(景義門)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하였으나 동학난과 병오항일전 때 파손되었고 경의문(景義門)은 일제강점기 때(1913년) 훼철되었습니다.
                                                                   서문(西門)인 경의문(景義門)  <참고자료>

          홍주성의 서문인 경의문이 있던 자리입니다. 문루는 없어지고 도로가 지나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34) 남문(南門)

 

 

1872년지방지도, 남문 추정위치 (O<참고자료> 
홍주성의 높은 지대에 남문이 있었습니다. 남쪽에서 계단으로 올라 오는 지형이기 때문에 이 문루를 아취형인 홍예문(虹霓門)으로 구성하였습니다. 그래서 남문(南門)은 문루(門樓)가 없었고 홍예문(虹霓門)의 모양은 문얼굴의 윗머리가 무지개 같이 반월형(半月形)이 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1823년 이헌규(李憲圭)목사(牧使)가 세웠으나 훼철되었고 위의 지도상에는 위치표시가 되어있지 않습니다.

 

              남문(南門) 추정위치 <참고자료>
             남문(南門) 주변에 송림(松林)을 만들어 풍수지리상 나쁜 기운을 막으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문 위치 <참고사진> 

● 복원된 남문, 홍화문(洪化門)

 홍화문(洪化門), 성 안에서 본 모습 <참고사진>
홍주읍성(洪州邑城)은 조선 초기 지방 읍성을 새로운 규정에 맞추어 쌓게 되었을 때 새로 쌓아 1451년(문종1)에 완성하였습니다. 이때의 기록에 '홍주읍성은 문이 4개소에 그 중 1개는 옹성(甕城)이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후 홍주읍성은 여러 차례 보수 확장하였고 1870년(고종7) 홍주목사 한응필이 대대적으로 홍주읍성을 보수하고 새로 정비하였고, 같은 해 흥선대원군이 직접 써서 내려준 홍주읍성의 문 현판을 받았는데 남문(南門) 이름은 빠져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는 남문이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2007~2009년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남문(南門)이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는 성문으로 확인되었고 옹성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빈터로 남아있던 남문 터에 2013년 남문(南門)을 복원하고 홍화문(洪化門)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참고사진>

 

                       남문의 깃발 <참고사진>

 

붉은 색의 깃발에 초관(哨官)이라 쓰여있고 붉은색은 남쪽을 가리킵니다. 초관(哨官)은 조선시대 종9품 무관직으로 약 100명을 통솔합니다.
      홍화문(洪化門) / 남문(南門) <참고사진>

                                        <참고사진>
홍화문(洪化門)이란 '크고 넓게 사방을 덮고 교화(敎化)가 만방에 미친다'라는 뜻으로 아마도 나라의 위엄과 문화를 만방에 떨치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홍화문(洪化門), 성 밖에서 본 모습 <참고사진>
       홍주읍성 남문 중건 상량문(洪州邑城南門重建上樑文) <참고사진>
충청남도 서북부에 위치한 洪城(홍성)은 山川(산천)이 靈秀(영수: 신령스럽고 빼어나서)하여 옛부터 수많은 仁人忠士(인인지사)가 배출되었다. 또 運州(운주)라는 옛 이름이 示唆(시사)하듯 서해의 關門(관문)이요 교통의 중심지요 국방의 要衝地(요충지)로 알려졌다. 內浦(내포)의 으뜸인 이 곳에 충청남도 도청이 자리잡은 것은 이유있다고 하겠다.홍주읍성의 四方門(사방문)은 고려시대 고을터를 닦을 때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33년(1757)에 나온 輿地圖書(여지도서)의하면 본디 읍성의 남쪽은 지대가 높아 문을 따로 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순조 23년(1823)에 홍주목사 李憲圭(이헌규)가 읍성을 대대적으로 修築(수축)하면서 남문을 세웠으니 무지개 모양의 虹霓門(홍예문)이었다. 이 후 1870년을 전후한 시기에 남문이 邑基(읍기)를 확장시키는데 방해가 되므로 폐하였다. 또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다른 삼문도 크게 훼손되어 온전하지 못하였다. 그 뒤 1975년에 동문인 朝陽門(조양문)이 복원된 것을 시발로 2013년에는 남문을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홍주읍성은 홍성군의 자랑이요 사방문은 홍주읍성의 꽃이다. 읍성의 복원이 郡의 현안이 되어 내려오다가 2012년 11월 남문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13년 8월 30일[음7月24日 戊辰(무진) 巳時(사시: 10시)에 上樑式(상량식)을 갖게되었다. 또 새 이름을 洪化門(홍화문)이라 命名함으로써 이름없이 내려오던 지난날의 아쉬움을 씻게 되었다. 이에 복원된 남문의 무궁함을 빌고 공사에 종사한 役員(역원)들의 芳名(방명)을 적어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白月(백월)이 鎭山(진산)되어 東向(동향)으로 터 잡았네.
南面(남면)을 마다함은 朝陽(조양)이 좋아선가.
烏棲山(오서산) 森嚴(삼엄)한 기운 朱鳥(주조) 불러 풀어라.
時運(시운)이 到來(도래)하여 닫힌 문 다시 열렸네.
彩虹(채홍)이 鮮姸(선영)하니 瑞祥(서상)이 자주 내리네
南門(남문)아! 洪化(홍화)를 도와 永遠無窮(영원무궁)하여라

撰文(찬문)   : 韓國傳統文化大學校 敎授 崔英成(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 최영성)
글씨   : 書藝家 長江 卞壽吉(서예가 장강 변수길)

남문 앞에서 바라본 성안 풍경 <참고사진>



(35) 조양문(朝陽門 : 東門)

 

1872년지방지도, 동문 위치 <참고자료> 
조양문(朝陽門)은 홍주성(洪州城)의 동문(東門)이요 홍성군(洪城郡)의 관문으로 조선(朝鮮) 고종7년(1870)에 목사 한응필(韓應弼)이 홍주성(洪州城)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하고 동서남북의 문루(門樓)도 다시 세웠습니다. 그 후 일제강점기 때 서문(西門)과 북문(北門)이 파괴되어 없어질때 조양문(朝陽門) 또한 파괴되었으나 부분적인 보수로 퇴락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門樓)를 완전 해체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동문(西門)인 조양문(朝陽門)  <참고자료>
원래 동문(東門)은 홍주의 관문(關門)인 관계로 크고 화려하고 정교한 문루(門樓)를 세우고 망일문(望日門)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문(西門)은 망월문(望月門)이라 하였고 북문도 서문과 같은 규모로 세웠으며 남문은 지형이 높아 자연적으로 국방의 요새가 되어 홍예문(虹霓門)을 세웠습니다. 추후에 대원군(大院君)이 서문은 경의문(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 동문은 조양문(朝陽門)이라 하여 친필로 쓴 편액을 하사하였으나 병오년(丙午年) 항일의병과 6.25 양난 때 망실되었습니다.

● 해체후 복원된 동문(東門), 조양문(朝陽門)



 

 

조양문(朝陽門): view, 서쪽동쪽[성안성밖]

 

 

조양문(朝陽門): view,

서쪽동쪽[성안성밖]

 

 

일제강점기때인 1913년에 서문(西門)을 철거하고 다음 해인 1914년에는 북문(北門)을 철거한 다음 다시 동문(東門)도 철거하려고 하였으나 홍성읍민들의 결사적인 반대로 동문만은 겨우 철거를 면하였습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풍우(風雨)로 인해 문루가 퇴락하여 파손되자 1973년 문화재관리국(文化財管理局)은 홍주서지와 조양문, 홍주아문을 문화재 제231호로 지정하고 성곽의 일부와 홍주아문을 보수하였습니다. 이어서 1974년 문루를 중심으로 반경(半徑) 30m내의 가옥과 대지(垈地)를 매수하여 로타리를 조성하고 동문을 해체 복원하고 단청을 새롭게 하였으며 1991년에도 보수하고 조양문을 중심으로 원형 석조물을 설치하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조양문(朝陽門) 현판

 

 

 

 조양문(朝陽門): view, 남서쪽

 

조양문(朝陽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홍주성(洪州城) 동문(東門)의 문루(門樓)입니다. 원래 옹성이었으나 일제때 훼철되었는지 지금은 없습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조양문의 현판을 친필로 하사하였으나 망실되었고 지금의 현판은 김희영(金希英)의 글씨입니다.

 

 

 조양문(朝陽門): view, 남쪽

 

 

 조양문(朝陽門): view, 동남쪽

 

 

 

 

 

조양문(朝陽門): view,

→서쪽[성밖성안]

 

동문(東門)의 문루(門樓)  조양문(朝陽門)은 안팎으로 똑같은 현판을 달아놓았습니다.

 

 

                                 조양문(朝陽門): view, →서쪽[성밖성안]

 

                                 60년대 말까지 차도 손수레도 사람도 조양문을 통과해 오갔다고 합니다.

 

 

 조양문(朝陽門): view, →서쪽[성밖성안]

 

고종 광무10년(1906) 항일의병이 일어나 일본군과 홍주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그 때의 흔적이 조양문(朝陽門) 곳곳에 보입니다.

 

 

 조양문(朝陽門): view, 북동쪽

 

 

                                       朝陽門新建記(조양문신건기) / 韓應弼(한응필) 
邑以城稱은 東其其防守之意라 故有邑에 必有城하고 有城必有關은 宜萬古簿四海하야 備預之通規也라 小邑도 猶然이어늘 況雄府巨防乎아  州는 西海濱海하야 爲水梱之輔車하고 爲畿甸之喉이라 自設邑之初에 肇有 郭而古制草創하야 延-之里에 僅用土築而塗하니 周不過一千三百尺이요 堞未滿四百  然地利之險阻와 兵甲之殷富는 保障於湖右라 故土寇猖獗之時에 晩全洪公이 興崔節度湖로 合兵堅守以此孤城으로 遂 賊 島夷龍蛇之變에 梧里李公이 興天將陳璘으로 駐箚大軍하야 折衡要路則洪陽七里之城이 豈非五十三邑(按忠淸道爲五十三邑)之最重地乎아 歷五滋久에 風標雨渺하야 漸至於傾頹러니 往在癸未主牧李公이(按李公憲圭) 體城之補完者七里六十尺이요 女墻之新築者二千三百餘尺이요 北門則固城爲樓하고 南門則累 爲虹矣라 余之來守是邦이 五十稔之間이라 蕭然無復舊容하고 但見頹垣敗礫과 蕪沒沔菜而已라  遺蹟而-躇하고 感成毁之省時하고 遂因州衙營建之役하야 伐石而修城하고 鍊鐵而建關하며 或 其闕典하고 或增其舊制하니 石城之新築者凡五百六十七尺이오 城上之雉-이 凡六百十五-高凡 尺城이오 門之新建者爲東西北三面하니 門上에 各設 樓而丹-之하고 乃以 十月十五日에 告厥成功하니 大院閣下特書門 而寵異之할새 西曰景義오 北曰望華오 東曰朝陽이라하니 取鳳首山之當關也라 於是乎石虹之穹宏과 丹-之壯麗始可謂雄州氣像이오 大都式廓이오 東西之行過是都者莫不由是而出入하고 因是而瞻行하야 咸曰大哉라 我聖上萬歲大爺一下筆하시니  釣鐵索參造化而鎭關墜하야 將與不鄙鐵關으로 同其-天리니 然則以洪都大作新府하야 庶幾少補於防守備-之策者는 實-我 國家固 之洪祚云爾로다
按景義望華及南門今皆撤毁無遺形但朝陽門卽今城東門一棟現存而朝陽門三字楣額兵火中遺失無傳

 

 

현재의 조양문은 1870년에 홍주목사 한응필(韓應弼)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할 때 중건되었고 그 내용은 조양문신건기(朝陽門新建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시 홍주목사 한응필은 조양문과 홍주성을 보수한 이유에 대해서 홍주(현재 홍성)가 대읍(大邑)으로써 갖고 있는 지리적 중요성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읍(邑)을 성(城)이라 말하는 것은 지키고 방비하는 뜻을 중하게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읍(邑)이 있으면 반드시 성(城)이 있고 성(城)이 있으면 반드시 관(關)이 있으니 만고에 사해(四海)를 지키고 방비함에 적의한 법규이다. 작은 읍(邑)도 그러하거늘, 하물며 큰 읍[雄府]의 방비함의 큼이랴! 주(州)는 서남의 바닷가에 있으니, 충청 수영(水營)과 보거(輔車, 위턱과 아래턱)와 같으며, 경기(京畿)의 목(項)이 되는 곳이다』

 

실제 홍주성은 이런 위치의 중요성때문에 임진왜란, 이몽학의 난 중에도 백성들을 든든히 지켜낼 수 있었으니, 홍주목사 한응필이 “(홍주성이) 충청도 53읍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했던 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봉수산(鳳首山)의 관문에서 뜻을 취한 조양문은 지금이야 수많은 고층건물들을 보고 자란 현대인들에게는 그 웅장함이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당시 이 지역에서 가장 크고 웅대한 건물이었던 조양문은 그 시대 사람들의 경외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조양문신건기(朝陽門新建記)에도 잘 드러나 있는데 관련 구절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홍예를 두른 것이 크고, 단청의 장엄하고 화려하니 가히 큰 고을의 기상이도다, 대도(大都=한양)와 같은 성곽은 동서를 두르니 이 성을 지나는 자는 이를 경유하지 않고는 출입할 수 없으니 이를 우러러 보고 모두 말하기를, “크도다. 우리 임금의 만세를 위하여 대원군께서 한 번 하필(下筆)하니, 낚시의 철사 줄의 조화를 부려서 추락하는 관문을 일으키셨네. 장차 철관(鐵關)과 함께 오래 지속될 것이다.”고 하니, 홍주(洪州)에 크게 새로지은 관청은 지은 것이 거의 방비하는 비책에 도움이 되는 것이니, 이는 실로 우리나라를 견고하게 하는 큰 복이 된다고 말할 것이다.』 <이상 참고자료>

 


(36) 망화문(望華門 : 北門)

 

                                   1872년지방지도, 북문 위치 <참고자료> 

 

홍주성의 북문이 망화문(望華門)입니다. 사대주의 사상이 팽배하던 시기였기에 중국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망화문(望華門)이라 했습니다. 1823년 이헌규(李憲圭) 목사(牧使)가 중수하였고 1870년에 한응필(韓應弼) 목사(牧使)가 문루(門樓)를 신축하였습니다. 대원군이 망화문(望華門)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였는데 동학난과 병오항일전 때 파손되고 일제강점기 때 훼철되었습니다.
                                            북문(北門)인 망화문(望華門) <참고자료>

 

원래 북문은 역대 목사(牧使)들이 이 문루에서 사형수의 처형을 감시하던 곳으로 갑오동학란(甲午東學亂)때에는 동학군들을 여기에서 처형하였습니다.

 

 

   북문(北門)인 망화문(望華門)이 있었던 곳과 아직 남아있는 성돌

<참고사진>

  홍주읍성 지정구역 내 토지를 지속적으로 매입하고 2016년 2억원의 사업비를 투입, 홍주읍성 북문 복원 발굴조사를 할 예정입니다.

 

 

                                                          
                                                            <충남일보 참고자료>
 
충남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4- 7번지 일원 도시계획도로 확장공사구간내 발견된 유적 발굴조사 결과 홍주읍성의 북쪽 성벽과 함께 북문지와 관련되는 옹성의 일부로 판명됐습니다. <충남일보 자료>

 

 

(36) 전영내아(前營內衙)

 

 

                           전영내아(前營內衙)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조선 후기 홍주(洪州)에는 목사(牧使)가 전영장(前營將)을 겸할 수도 있었지만, 대개는 문관(文官)인 목사와 함께 무관(武官)인 전영장(前營將)이 별도로 파견되었고, 목사의 동헌(東軒)과 전영(前營)의 동헌이 별도로 존재했듯이 내아(內衙)도 별도로 존재하였습니다.
                                                                                                              전영내아(前營內衙)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37) 전영내삼문(前營內三門)

 


                           전영내삼문(前營內三門)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위 지도에 보면 전영내삼문(前營內三門)은 5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전영동헌(前營東軒)전영(前營)의 외삼문(外三門) 격인 폐문루(閉門樓)와 직선상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영내삼문(前營內三門)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그림으로보아 솓을대문 형식으로 가운데3칸과 양쪽 각1칸씩의 구조로 이루어진 건물로 보입니다.

 

 

(38) 전영폐문루(前營門樓)

 



                            전영폐문루(前營閉門樓)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전영폐문루(前營閉門樓)는 전영(前營)의 외삼문(外三門) 격으로 전영(前營)의 바깥담에 세 칸으로 세운 대문으로 그림으로보아 문 앞에는 세칸으로 구분된 계단이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전영(前營)의 위치는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위치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개인의견>

 

 

                                                    전영폐문루(前營閉門樓)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참고사진]

 

 

관풍루(觀風樓) / 대구달성공원 <참고사진>

 

전영폐문루(前營閉門樓) 앞에는 위의 사진과 같은 길다란 계단이 양옆으로 하나씩 더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개인의견>

 

 

 

 

(39) 수문(水門)

 

 

 

                     수문(水門) [1872년지방지도] <참고자료> 

 

                               1872년지방지도에는 2개의 수문(水門)이 그려져 있습니다.

 

 

                        동쪽 수문(水門)    <참고자료>                                                  서쪽 수문(水門)  <참고자료> 

 

[참고사진]

 

 

이간수문(二間水門) <참고사진>

 

 

 

 

홍주읍성(洪州邑城) 내 영조물(營造物) 보수 내용(1870년)

 

 



                              고지도(古地圖)의 홍주성 [1872년 지방지도(地方地圖)]  <참고자료> 
홍주 성내(城內)는 고려에서 조선시대 한말에 이르기까지 충남 서해안의 거진(巨鎭)으로서 관청의 청사로 사용하던 영조물(營造物)이 많았으나 역대의 전란으로 파괴되어 사적(史蹟)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고종7년(1870) 홍주목사 한응필이 각 영조물이 점차 퇴폐하여 감을 통탄하다가 대수선을 결심하고 정부에 상신한 결과 많은 하사금을 받게 되어 대대적인 수리사업을 벌였습니다. 먼저 성지(城池)를 수축하기 위하여 남포에서 30명 보령에서 20명 온양에서 15명 서산, 태안, 해미, 결성, 덕산, 청양, 비인 등지에서 각 10명의 석공을 동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830척에 560척을 증보하여 석축(石築)하였고 그 나머지는 신축하였습니다. 그와 함께 615개의 첩(堞)과 130개의 치(雉), 2개의 곡성(曲城,) 4개의 샘(泉)과 못(池)4개소를 다시 만들었습니다.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동서에 수문(水門)을 신설하여 서편 수문을 동수문으로 끌어 금마천에 흐르게 하였습니다.

또한 성곽의 문루(門樓)공사로 남문의 홍예문(虹霓門)을 제외한 동, 서, 북 세 곳에 문루를 증수하였습니다 그해 10월15일 대원군이 휘호한 문액(門額)이 하사되어 서문은 경의문(景義門), 북문은 망화문(望華門,) 동문은 조양문(朝陽門)으로 명명(命名)되었습니다. 갑오년 동학란과 병오의 항일전으로 문액은 파손되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조양문 하사 문액은 6.25후에 없어졌고 지금 걸려 있는 문액은 김희영(金希英)의 글씨입니다. 다음으로는 동년 2월27일 성내에 있는 24개(戶) 건축물 보수공사에 들어가 같은 해 10월15일에 준공하였습니다. <홍성군 참고자료>

 

 

 

 

 

▶ 현재의 홍주읍성(洪州邑城)

 

 

● 홍주읍성(洪州邑城)

 

  홍주읍성(洪州邑城)  <참고사진>

 홍성 홍주읍성(洪城 洪州邑城)

 

충남 홍성군 홍성읍 아문길에 위치한 홍주읍성(洪州邑城)은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에 있는 읍성이다. 1972년 10월 14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31호 홍주성(조양문, 아문, 산성)으로 지정되었다가 2011년 7월 28일 홍성 홍주읍성으로 명칭변경되었습니다. 현재의 성은 조선 문종1년(1451년)에 수축한 것으로 길이 약 1,772m의 성벽 중 약 800m의 돌로 쌓은 성벽의 일부분과 동문인 조양문(朝陽門), 동헌인 안회당(安懷堂), 여하정이 남아있습니다. 이 곳은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읍성으로 이어졌으며, 조선 초기 새로운 형식에 의해 쌓은 성이 남아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홍주읍성의 성곽을 쌓은 기록은 없고, 다만 최초로 성의 주위가 1,300척의 토성(土城)으로 성첩(城堞)이 400에 불과하였다는 기록이 전하고 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고려 때에는 백월산 중복(中腹)에 해풍현(海豊縣) 고을이 있었는데 현재의 위치로 고을을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때에 성을 축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뿐입니다.

 

 

 

산성은 주위가 최장 1,772m에 달하였으나, 많은 구간이 전면 훼철되고 810m의 구간만이 남아있고, 성내에 있던 관아의 건물이 36동에 이르렀으나, 그 중 조양문, 홍주아문, 안회당(동헌), 여하정 등 4동의 건물만이 현존하고 있습니다.

 

 

 

1983년에는 성곽 주변 정리(잔디, 안내판, 표석 설치 등)를 완료하였고 또한 최영 장군, 성삼문 선생, 한용운 선생, 김좌진 장군의 흉상(동상)을 세워 구국충설의 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좌진 장군상

 

 

 한용운 선생상

 

 

                                                 손곡(蓀谷) 이달(李達) 시비(詩碑)

 

이달(李達)은 조선조 중기 선조 때의 시인으로 본관은 신평(新平)이고 자는 익지(益之)이며 호는 손곡(蓀谷)입니다.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매성공(梅城公) 이기의 후손인 이수함(李秀咸)과 홍주 관기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한시의 대가로 문장과 시에 능하고 글씨에도 조예가 깊었으나 신분적 한계로 벼슬은 한리학관(漢吏學官)에 그쳤습니다.

 

 

 

 

 

 

 

 

 

 

● 홍주읍성(洪州邑城) 내 주요문화재

 

 

 

홍주읍성(洪州邑城) 내 주요문화재 중 홍화문(남문), ④ 홍주성역사관, ⑤ 우물터, ⑥ 옥사, ⑦ 홍주아문, ⑧ 안회당, ⑨ 여하정, ⑩ 오관리 느티나무는 위 내용 중 제목 '홍주관아(洪州官衙)' 및 아래 내용 중 제목 '홍주읍성(洪州邑城) 복원 계획 및 진행'이란 항목 에서 소개하였습니다.

 

 

홍주성(洪州城) 수성비(修城碑)

 


왼쪽 홍주성(洪州城) 수성비(修城碑)인 홍주수성기적비(洪州修城紀蹟碑)와 홍주목사(洪州牧使) 선정비(善政碑)들 <참고사진>

홍화문 근처에 모여있는 5개의 비석 중 가장 앞쪽[정면에서 왼쪽]에 있는 비석은 홍주성수성기적비(洪州修城紀蹟碑)로 원래는 홍성읍 고암리에 있었는데 순조 24년에 홍주성(洪州城)을 고쳐 지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비의 뒷면에는 공사를 감독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도 기록되어 있어 당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홍주성 수성비 옆으로 4개의 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이것은 조선 시대 홍주 목사들의 선정비를 모아놓은 것인데 홍성 곳곳에 흩어져 있었지만, 지금은 수성비와 함께 한곳에 모아두었습니다.

                                                               <참고사진>


 

 

③ 병오항일의병기념비

 

 

                           병오 항일의병 기념비(丙午抗日義兵紀念碑) <참고사진>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을 일으킨 민종식 등이 이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덕산으로 격퇴시킨 일을 기념하고자 이비를 세웠습니다. 광복 전에는 이곳에 무려 36년 동안이나 매국노 이완용이 항일의병들에 의해 죽은 일본군을 기리는 글을 새긴 애도비가 있었습니다. 광복 후 이 비를 부숴 땅에 묻고 병오항일의병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참고사진>

 

 

 

홍주읍성(洪州邑城) 복원 계획 및 진행

 

 

 

 복원 후의 홍주성 모습

 

1) 동문  2)서문  3)남문  4)북문  5)동헌  6)내아  7)책실  8)급창방  9)사령청  10)관청  11)공고  12)내삼문  13)외삼문  14)전영동헌 

15)전영내아  16)전영내삼문  17)전영문루  18)향청  19)작청  20)장청  21)관노청  22)토포청  23)집사청  24)장관청  25)사창고  26)도청

27)군기청  28)군기고  29)옥  30)객사  31)남관  32)사달정  33)여하정  34)홍주성역사관  35)민속마을  36)흉상  37)수문  38)연지  39)전통민속마을  40)수성비  41)관리사무소

 

 

                                                 홍주성 복원 및 홍성고도역사문화관광개발 사업

 

 

충남 홍주성이 복원됩니다. 홍주성 지정지역과 미지정 북문지역까지 모두 5만4384평에 걸쳐 원형 복원 동학혁명과 을미의병, 병오의병 등 구한 말, 이 땅에 소용돌이 친 역사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일제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 홍주성이 원형 복원됩니다. 이 성은 지방비와 국비로 2005년부터 2024년까지 20년 동안 단기계획(2005∼2009년), 중기계획(2010년∼2014년), 장기계획(2015년∼2024년)에 따라 홍성군 홍성읍 오관리 220-2번지 사적231 홍주성 지정구역과 이직 지정되지 않은 북문까지 모두 17만 9780입방미터(5만4384평)이 원래 모습으로 복원됩니다. '홍주성 복원기본계획'을 세운 충청남도 역사문화원의 기본계획에 따르면 조양문과 동헌, 여하정(연못), 잔존성곽은 그대로 보존하고 내아, 책실, 급창방, 사령청, 내삼문, 전영동헌, 관노청, 군기고, 군기청 등 관아의 27채의 모든 건물이 빠짐없이 복원됩니다. 성내에는 또 민속마을, 체험공간, 특산물 매장, 놀이마등 등과 홍주역사관, 민속마당 등이 만들어집니다. 성곽도 보수, 복원해 현재 남아있는 810미터의 성곽을 보수하고 962미터를 복원 성곽길이가 1772미터가 옛 모습을 그대로 되찾게 됩니다. 구한 말 격동의 와중에서 불타 없어진 서문루와 북문루, 남문도 원형복원됩니다. 새로 조성되는 역사교육공간에는 서문과 남문 사이의 성곽 밖에 만들어 세운 성삼문, 김좌진, 한용운 등의 흉상을 남산 공원지역으로 이전 정비하고 병오항일기념비, 한용운 시비, 김좌진 장군비 주변을 정리하고 홍주성 수성비는 원래 위치인 동문 앞으로 이전합니다.

 

홍주성이 언제 조성되었는지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세종실록지리지의 읍성조에 이미 존재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조선시대 이전부터 축성되어 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성은 고종7년(1870년)에 당시 목사였던 한응필이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여 흥선 대원군으로부터 동문(조양문), 서문(경의문), 북문(망화문)의 편액이 내려지기도 했으나 동학혁명 때 남문이 훼손되고 서문과 북문이 모두 불타 없어졌을 때, 동문의 편액도 함께 불타 없어졌다. 홍주성이 결정적인 훼손을 당한 것은 전국 최초의 의병인 '을미의병'이 성안에서 거병하는 것을 시작으로 병오의병으로 이어지자 일제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동헌 등 몇 개의 관아건물만 남겨놓고 모두 헐어버리거나 일본사람들에게 팔고, 관아건물 앞에 군청건물을 세우면서 부터입니다. 일제는 이후 이도 부족하다고 여겨 홍주라는 지명을 강등시켜 홍성으로 만들고 성곽까지 헐어내려 민족자존을 잘라버리려 했습니다. 조선시대 후기 홍주는 충청도의 4목(충주, 청주, 공주, 홍주)의 한 곳으로 진영이 설치돼 내포지역 10개 고을을 관장하였습니다. 이후 성내에는 법원, 검찰청, 읍사무소, 홍주초등학교, 민가건물 등이 들어서 옛 모습을 잃은 채 100여 년을 내려오고 있습니다. 홍성군 관계자는 "홍주성은 우리 나라 읍성 중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으나 일제시대 훼손된 이후 대부분의 유적이 소실되고 공공기관, 민가 등이 들어서 있어 역사적 가치를 상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발굴조사와 문헌, 고지도 등을 통해 원형복원하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2005년, 참고자료)

 

 

 

 

                 

 

 

 

 

 

● 홍주성벽복구사업 [2012.02 / 2015.02] 

 

 

 

 홍주성벽 해체보수사업

 

2010년 집중호우로 인해 홍주성 남문지여 일부가 붕괴되어, 군에서는 문화재청에 긴급보수예산을 신청하고, 수차례의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붕괴지역 및 유실이 우려되는 총 93m 구간의 성벽에 대해 성벽돌 해체, 속채움석 쌓기 등 해체보수사업을 실시해 2012년 2월에 공사를 완료하였습니다.


 

 

 홍주읍성 성곽정비 조감도 <참고사진: 홍성신문>


홍성군은 홍주읍성 종합정비계획에 따라 성곽 정비사업을 오는 11월까지 추진한다고 밝혔습니다. 군에 따르면 홍주읍성 성벽 배부름 현상(성곽을 구성하는 돌이 어긋나 균형을 잃고 돌이 튀어나오는 현상)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돼 총 13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 긴급 해체보수에 들어갔습니다. 성벽 긴급 해체보수가 끝나는 대로 여장(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성 위에 낮게 덧쌓은 담) 설치 및 성상로 조성 등 주변 정비사업도 함께 추진합니다. 이번 성곽 정비사업은 성벽해체보수, 도로구간 성곽연결, 여장 설치, 주변정비 등으로 현재 군은 공사 및 주민 안전을 위해 가설구조물을 설치했습니다. 우선 홍주읍성(서문 쪽 도로~여하정 구간) 177m 구간의 성벽의 돌을 빼내 다시 쌓는 성벽 해체보수를 진행합니다. 이어 성곽이 끊어진 서문 쪽 도로 구간의 성곽연결 공사는 통과높이 4.5m, 성벽 상부높이 5.2m, 13.3m 길이로 단절된 성곽의 연계성을 회복합니다. 성곽을 연결한 상부에는 높이 1.2m, 길이 32m의 여장을 설치합니다. 여장 설치가 끝나면 읍성을 따라 산책할 수 있도록 주변 정비도 진행할 계획입니 이달 안으로 성벽해체 및 발굴조사를 실시한 후 보수공사를 진행할 예정이며, 오는 10월 여장 설치 및 성상로 정비를 추진한다는 계획입니다.   <홍성신문 / 2015.02.12>

 

 

홍주성역사관 건립 [2011.05.06 개관]

 

 

 

 

      홍주성역사관조감도 <참고자료>

 

충남 홍성지역의 역사자료를 한 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홍주성역사관'이 2011년 5월6일 개관하였습니다. 홍주성역사관은 옛 홍성세무서 자리에 지상 1층ㆍ지하 2층, 건물면적 1천669㎡의 규모로, 기획전시실과 자료보관실, 학예연구실, 체험학습실, 수장고, 문서고 등 홍성지역의 역사와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공간을 갖추고 있습니다. 전시홀 입구에는 1871년 규장각 지도를 참고해 만든 홍주성복원모형도를 만날 수 있습니다.

 

 

 

홍주성역사관 <참고사진>

 

역사관 관계자는 "홍주성의 완만한 구릉지대에 위치한 홍주성역사관은 지역적 특성과 주변 자연풍광과의 괴리감이 들지 않도록 설계됐다"고 밝혔습니다.

 

 

<참고사진>


 

                <참고사진>


전시홀로 들어서면 홍주성복원모형도가 관람객을 반기는데, 이 복원모형도는 1871년도 규장각 지도를 참고해 홍주성복원계획도의 실측대로 만들어 진 것입니다.

 

 

 <참고사진>


홍성의 연표와 복원모형도를 지나면 본격적인 전시공간이 드러나는데, '내포의 중심 홍주'라는 주제로 최영 장군, 성삼문 선생, 청난5공신, 김복한ㆍ이설 선생, 한용운 선사ㆍ김좌진 장군 등 홍성이 배출한 위인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홍성의 위인들 옆으로 '홍주와 부보상'이라는 주제 하에 부보상 유품들이 진열되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전시관 한 켠의 좁은 복도는 홍성에서 벌어졌던 천주교 박해의 역사를 보여주는데, 전시공간을 지날 때 발밑의 센서를 밟으면 비명소리가 울려 박해 당시의 끔찍했던 상황을 실감나게 재현했습니다.

 

 

<참고사진>


 

<참고사진>


 홍주성역사관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홍주의병과 홍성의 독립운동 등 조선말에서부터 일제 강점기까지의 애국정신입니다.

 

 

홍주성 역사관 개관기념으로 홍성 출신 소리꾼 장사익씨 축하공연 무대

 

홍주성역사공원 조성사업 [2012. 3~9.] 

 


 

 

  홍성 홍주성내 역사공원 2012년 9월 개원 <참고사진>


충남 홍성군이 홍주성 복원사업의 하나로 2012년 3월부터 추진해 온 홍주성내 역사공원 조성공사가 2012년 9월 초 마무리됩니다.
홍성군에 따르면 홍주성 역사공원은 홍성읍 오관리 옛 법원, 검찰청 터 1만5천300㎡에 옥사를 복원하고 우물터와 육각형태의 전통 정자, 산책로 등을 설치해 주민들의 역사 체험 및 휴식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입니다. 원형 돌담으로 둘러싸인 형태의 옥사의 경우 홍주지도(1871년, 서울대 규장각)를 근거로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구조로 복원됐습니다. 또한 군민들이 자유롭게 오갈수 있는 산책로가 조성되며 주변으로는 소나무, 백목련, 산수유 등 전통수목 120여종이 식재돼 도심내 군민들의 새로운 휴식공간으로 조성될 것입이다.

 

⊙ 옥사(獄舍)

 

 

 복원된 홍주성 옥사(獄舍) : 상기 홍주관아(洪州官衙) 내용 중  '(32) 옥(獄) / 복원된 옥(獄)' 참조바랍니다. <참고사진>

 

⊙ 우물터

 

 

 우룰터 <참고사진>

 

 

      <참고사진>

 

 

 

 

⊙ 전통정자

 

 

 

 <참고사진>

 

 

⊙ 산책로

 

 

 

<참고사진>

 

 

남문(홍화문) 복원사업 [2013.12.03 준공

 


   

 

남문(南門) 복원 준공식 : 상기 홍주관아(洪州官衙) 내용 중 '(34) 남문(南門) / 복원된 남문, 홍화문(洪化門)' 참조바랍니다. <참고사진>

 

 

 

<참고사진>


사업비 15억원이 투입된 홍주성 남문 복원사업은 문루 약 40㎡, 여장 55m를 복원하는 것으로 소광장 346㎡, 남문진입로 122m, 배수로 석축 정비 등이 함께 진행됐습니다. 군은 2007년부터 2009년까지 남문터 발굴조사를 벌여 과거 남문의 형태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는 성문으로 존재했음을 확인했습니다.

 

 

 

                                   

홍주읍성(洪州邑城) / 홍성(洪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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