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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성/태안

케인스 2016. 7. 14. 18:16



안흥성(安興城) / 태안(泰安)

 

 

 

충청남도(忠淸南道) 태안군(泰安郡) 안흥성(安興城)

 


안흥성(安興城) 위치



안흥성(安興城) 위치 <참고자료>

 

안흥성(安興城)은 충청남도(忠清南道) 태안군(泰安郡) 근흥면(近興面) 정죽리(程竹里) 해안의 안흥성마을 뒷산에 있는 진성(鎭城)으로, 처음에는「안흥진성(安興鎭城)」이었으나 후에 「안흥성(安興城)」이라 고쳐 불렀습니다. 진성(鎭城)이란 주로 수군(水軍)들이 전투를 위하여 해안 근처에 쌓는 성곽으로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로 태안지역의 지형적 특성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태안군은 전체가 서해를 향해 돌출되어있어 그 자체가 반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만큼 육로 교통보다는 해로 교통이 일찍부터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고려, 조선시대를 통하여 삼남(三南: 충청, 전라, 경상)지역의 세곡선(稅穀船) 및 조운선(漕運船)이 안흥성(安興城)에 정박하거나 안흥량(安興梁)을 지나 개경(開京: 개성)과 한양(漢陽: 서울)으로 운송되는 조운(漕運)항로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중국의 산동반도와 315km의 근거리로 뱃길이 가장 빠른 곳이었던 안흥성(安興城)은 조선시대 중국 명나라에서 오가는 사신을 맞이하고 환송했던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참고사진>


이와같은 지형적 여건때문에 고려, 조선시대에는 해구(海寇) 출몰이 잦았습니다. 당시 해적이나 왜구(倭寇)들의 피해가 가장 심하였던 충청, 전라, 경상 지역에는 진성(鎭城)이 각 해안의 중요 장소에 설치되었습니다. 안흥진성(安興鎭城) 역시 서해안을 지키는 관문인 안흥량(安興梁)에 위치하며 남, 서, 북면[현재는 간척지]이 바다와 접해 있어 서해가 훤히 내다보이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要衝地)로서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안흥량(安興梁)



 안흥량(安興梁)  <참고사진>


안흥량(安興梁)은 충청남도 태안군 신진도(新津島)와 마도(馬島)를 거쳐 관수각(官首角)과 가의도(賈誼島)에 이르는 해역(海域)을 말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예로부터 난행량(難行梁: 선박의 통행이 어려운 곳)이라 불려왔는데 바닷길이 험하여 조운선(漕運船)이 이곳에 이르러 여러 번 뒤집혔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하여 안흥량(安興梁)으로 고쳤다." 라고 적혀있습니다. 한편 잦은 난파사고로 인해 무사 항해를 비는 뜻으로 한동안 안행량(安行梁)으로도 불렀다가 언제부터인가 다시 원래대로 안흥량(安興梁)이라고 불렀습니다.


 안흥량(安興梁)  <참고사진>


안흥량에는 암초가 많고, 좁은 수로때문에 조류가 빠르며,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조운선(漕運船)이 자주 난파되던 곳으로 유명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조선 태조4년(1395)부터 세조1년(1455)까지 60년 동안 선박 200 여척이 안흥량에서 부서지거나 침몰했고, 인명도 1,200여 명이나 희생되었으며 세곡 1만5,800섬도 바다 속에 가라앉았습니다. 그야말로 안흥량(安興梁)은 조운선(漕運船)의 무덤이었습니다. 



안흥진성(安興鎭城) 




안흥진성(安興鎭城) = 안흥성(安興城) <태안군지참고사진>


안흥진성(安興鎭城)은 약360여년 전인 조선조(朝鮮朝) 제17대 효종(孝宗) 6년(1655)에 축성(築城)을 시작하였으며 넓이­70,806㎡, 둘레 1,714미터, 높이 3.5미터에 이르는 포곡식(包谷式) 석성(石城)을 10여년에 걸쳐 쌓았습니다. 축성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17세기 당시 조선은 임란(壬亂)과 호란(胡亂)을 겪고 난 후이며, 중국은 명(明)이 쇠퇴하고 청(淸)이 등장하는 혼란기여서 주변국에 대한 위기의식 하에 축성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포곡식(包谷式): 성곽 안에 계곡을 감싸고 축성된 성으로 성곽내에 물자원이 풍부하고 활동 공간도 넓어 장기간의 전투에 용이함.


  

   <참고사진>


조선말엽까지 성내에는 동헌(東軒), 책방(冊房), 장관청(官廳) 등 16개의 청사 외에 영사대(永思臺), 연습대(練習臺), 객사(客舍) 등과 동문 밖에 오리정(五里亭), 서문밖에 육모정(六茅亭), 남문밖에 작물고(作物庫) 등 많은 건물이 온전한 형태로 보전돼 왔으며 고종(高宗)31년(1894) 동학농민전쟁의 농민군과 관군의 충돌과정에서 성내(城內)의 건물이 일부 소실(消失)되고 폐성(廢城)되기까지 200여년 동안 사용되었습니다. 그후 광무(光武)5년(1901) 일부 남은 건물을 뜯어다 동학혁명 당시 소실된 태안읍성 내의 목애당(牧愛堂: 관아 내 동헌건물) 건축에 사용되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민가(民家)와 태국사(泰國寺)가 있습니다.  현재는 성벽 둘레를 따라 동, 서, 남, 북으로 4개의 성문이 남아있으며 그 중 서문(西門)과 수홍루(垂虹樓)가 복원되었고 나머지 성문은 형체만 남아있는 상태입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문(東門)은 '국방과학연구소' 부지 안쪽에 있어 일반인은 볼 수 없습니다.    <태안문화원자료참고>



★ 참고사항: 안흥성(安興城)의 축성시기


남벽구간 성돌 명문(銘文) <참고사진>                                    남벽구간 성돌 명문(銘文) 탁본 <참고사진>


위와같이 안흥성의 축성시기가 효종대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최근 안흥진성에 대한 정밀 지표조사[2006]에서 남쪽 성벽에서 "萬曆十一年銘"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 성돌을 발견하였습니다. 명문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 정확한 내용은 알 수없지만, 만력(萬曆)11년[선조16년 1583년] 이고조(李鼓祖)라는 사람이 축성 감독관이 되어 일정구간의 축성을 감독한 것으로 풀이되는데, 그렇다면 이미 효종6년(1655)에 본격적으로 축성하기에 앞서 이미 이 지역에 일정한 형태의 성곽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안흥진성이 축성되기 이전 이 지역에 대한 중요성으로 일찍부터 성곽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안흥진성의 초기 모습과 대대적인 축성이 이루어지고 난 후의 모습에 대해서 구체적인 현황을 살피기는 어렵습니다. 조선시대 축성된 단일시기의 성벽이지만 초축성된 이후 개보수(改補修)가 이루어졌음이 기록을 통해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흥성이 "萬曆十一年"이라는 명문에 나타나는 것처럼 16세기부터 존재하던 것인지 혹은 문헌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효종 6년인 17세기 중반에 축성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현황입니다. <안흥진성성벽절개조사보고서/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 <참고자료>


안흥진성(安興鎭城)은 효종(孝宗)6년(1655) 경기도 선비 김석견(金石堅)이 안흥진(安興鎭)을 축조해서 강도(江都: 강화도)의 외권(外圈)이 되게 하기를 조정에 상소(上訴)한 바 있는데, 왕이 이 말을 듣고 지경연사(知經筵事)* 이후원(李厚源)에게 물으니, 이곳은 바다 가운데로 약 10여리쫌 돌출하여 있는 천연적인 요충지(要衝地)이므로, 이곳에 석성(石城)을 축조하여 군대를 주둔시키고 호서(湖西: 충청도)의 양곡(糧穀)을 비축하여 두면 안으로는 강도(江都)의 표리(表裏)가 되고, 밖으로는 호령(湖嶺: 호남과 영남) 지역을 제어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효종은 즉시 충청감사(忠淸監司)에게 성(城)을 축조하게 하였습니다. <서산군지, 태안문화원>


※  지경연사(知經筵事): 조선시대 경연청(經筵廳)에 둔 정이품(正二品) 관직인 지사(知事).


 안흥성 축조를 위해 백성이 동원된 지역( 표) <참고자료>


안흥성(安興城)을 축조하기위해 태안(泰安), 서령(瑞寧)*, 해미(海美), 덕산(德山), 예산(禮山), 당진(唐津), 면천(沔川), 홍주(洪州)*, 결성(結城), 보령(保寧), 남포(南浦), 서천(舒川), 한산(韓山), 임천(林川), 은진(恩津), 홍산(鴻山), 청양(靑陽) 등 인접지역과 좀더 먼 지역인 청주(淸州), 충주(忠州) 등 19개 지역의 군민(郡民)이 동원되어 10년만에 축조된 것이라고 합니다. <태안문화원참조>


※  서령(瑞寧): 서산(瑞山)의 옛 이름            ※  홍주(洪州): 홍성(洪城)의 옛 이름



안흥진(安興鎭) 




          안흥진(安興鎭)위치 [여지도(輿地圖),1736~1767발행] <참고자료>


안흥진(安興鎭)은 안흥성내(安興城內)에 두었고, 조선조(朝鮮朝) 세종(世宗)12년(1467)에 소근진 첨사(所斤鎭僉使)*의 파견대(派遣隊)*인 안흥량수(安興梁戌)*를 설치 하였는데, 186년 뒤인 효종(孝宗)4년(1653)에 이를 화정도(花亭島)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화정도로 옮긴 안흥량수는 2년 뒤인 효종(孝宗)6년(1655)에 시작한  안흥성(安興城)의 축조가 완성된 후 현종(顯宗)10년(1669)에 다시 안흥성내(安興城內)로 옮겨와 진(鎭)으로 독립함으로서 비로소 안흥진(安興鎭)이 설치 되었습니다. <태안군지참고>


※ 진(鎭): 신라 말, 고려, 조선시대에 둔전병(屯田兵)이 주둔하던 군사적 지방행정구역(특별행정구역).

※ 둔전병(屯田兵):  평상시에는 둔전 경작 및 군수와 군량을 공급하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동원되는 병사.

※ 소근진첨사(所斤鎭僉使): 중종 갑술년(1514)에 석성(石城)을 쌓은 소근포진(所斤浦鎭)의 첨사(僉使).

※ 첨사(僉使): 첨절제사(僉節制使)의 줄임말. 종3품 무관.

※ 소근진(所斤鎭): 소원면 소근리에 설치했던 진영(鎭營)으로 태안군내에서는 최초의 진이 되는 곳임.

※ 파견대(派遣隊): 작전상 임무 띠고 다른 으로 보내어 부대.

※ 안흥량수(安興梁戌): 안흥진(安興鎭)의 옛이름으로 소근포(윗지도의 북쪽) 첨절제사 분병지


광여도(廣輿圖: 1800년대 전반), 태안군(泰安郡)주기(注記) <참고자료>


'충청도읍지'에 기술된 안흥진(安興鎭)의 군비 실태를 보면 첨사(僉使) 무종3품(武從三品) 1명, 진방졸(鎭防卒) 87명, 지고관(知鼓官) 1명, 선창대장(船倉代將) 2명, 기패관(旗牌官) 10명, 교사(敎師) 2명, 포도관(捕盜官) 4명, 훈도(訓導) 2명, 화포교사(火砲敎師) 2명, 군졸(單卒) 304명 그리고 거북선(龜船) 1척, 병선(兵船) 1척, 방선(防船) 1척, 사후선(伺候船) 3척 등이 남문 밖 선창에 배치 되어 있었습니다.  <태안군지>


기패관(旗牌官): 조선시대 훈련도감에 소속된 무관직으로, 여러 군영에 두어 군기(軍旗)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던 군관직.

※ 포도관(捕盜官): 지금의 헌병 장교와 같다. 수군 함선 내의 군기와 범죄를 다루는 군관.

※ 훈도(訓導): 조선시대 군사 교육을 맡아보던 교관

※ 화포교사(火砲敎師): 각종 화약무기의 발사와 훈련을 담당.

※ 병선(兵船): 조선 후기의 무장선(武裝船).

※ 대변선 待變船: 조선 후기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연해의 요해지에 주둔시켰던 군선(軍船).

※ 사후선(伺候船): 조선 후기에 사용된 크기가 작고 속도가 빠르고 날렵하여 적의 동태를 파악하는 정탐선.

※ 방선(防船): 수영(水營)에 부속되어 있는 병선(兵船)의 하나. 뱃전에 방패를 설치하였음.

※ 전선(戰船): 군선(軍船)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대표적인 함선(艦船).



                            병풍에 그려진 사후선(伺候船) <참고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의하면 영조20년(1744)에 편찬한 법전 속대전(續大典)에서 "전선(戰船)은 가장 큰 대형 전투함이고, 병선(兵船)은 중형 무장함이며, 사후선(伺候船)은 대,중형함에 1척씩 부속되는 소형부속정(小形附屬艇)이고, 특히 거북선(龜船)은 전선(戰船)과 동일한 크기의 특수함(特殊艦)이며, 방선(防船)은 전선(戰船)보다 크기는 작지만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중형전투함(中形戰鬪艦)이라고 하였으며, 이들 군선의 편제는 전선(戰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2척을 묶은 4척을 기본 단위로 하여이들을 각 수영(水營) 산하의 각 진포(鎭浦)에 배치한 것이지만, 거기에 방선(防船) 1척을 첨가하거나 전선(戰船) 대신 거북선(龜船) 또는 방선(防船)을 대치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지방지도(1872), 충청도 태안군  <참고자료>


『 泰安의 歷史』 (박춘석, 1991 泰安文化院, 95)에 의하면 "안흥진의 규모는 동헌(東軒), 책실(冊室), 내아(內衙), 내관청(內官廳), 외관청(外官廳), 비자청(婢自廳), 막비청(幕裨廳), 중방청(中房廳), 감관청(監官廳), 통인청(通引廳), 급창청(及唱廳), 관노청(官奴廳), 사령청(使令廳), 헐수청(歇守廳), 작청(作廳), 형리청(刑吏廳), 장교청(將校廳), 대도안청(大道案廳), 교련청(敎鍊廳), 능로청(能櫓廳), 장대(將臺), 영사대(永思臺), 연습대(練習臺), 흥학대(興學臺), 객사(客舍), 홍살문(紅箭門), 오리정(五里亭), 대변정(待變亭), 반구정(反求亭), 어변정(邊亭), 육모정(六模亭), 팔모정(八模亭), 검소루(劍嘯樓), 폐문루(閉門樓), 제승루(制勝樓), 망해루(望海樓), 대장막(大將幕), 중군막(中軍幕) 등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건물들이 대부분 성안에 있었다면 안흥진(安興鎭)은 약 40여개의 건축물이 들어서 있던 대규모의 요새였던 것입니다. 이들 건물 오리정(五里亭)은 동문 밖에, 육모정(六模亭)은 서문 밖에, 작물고(作物庫)남문 밖에 있었던 것으로 다른 자료에 나타납니다. 



 지방지도(1872), 충청도 태안군  <참고자료>


1872년 발행된 지방지도에 보면 안흥진(安興鎭)에는 성곽과 관아 건물이 상세히 그려져 있는데 서문(西門), 북문(北門), 동문(東門), 남문(南門)을 포함해 성내(城內)에는 동헌(東軒: 관아), 책방(冊房: 문서보관), 내아(內衙: 수령거처), 장관방(官房:군관거처), 급창방(及唱房: 관노거처), 삼문(三門· 동헌정문), 사령방(使令房·사령거처), 작청(作廳: 아전들의 업무공간), 군기고(軍器庫·무기고), 군향고(軍餉庫·군량고), 제승루(制勝樓: 망루), 태국사(泰國寺) 등의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해동지도(1750년대초), 충청도 태안군  <참고자료>


1750년대 초에 발행된 해동지도에 보면 안흥진성(安興鎭城)에는 서문(西門), 북문(北門), 동문(東門), 남문(南門)을 포함해 성내(城內)에는 관사(官舍· 관리숙소), 장사(將· 군관숙소), 군기고(軍器庫) 2개소, 조총고(鳥銃庫), 서창(西倉· 창고), 남창(南倉· 창고) 등과 여러곳의 우물(井)이 나타나 있으며, 성(城) 남문(南門)밖에는 작물고(作物庫· 농작물창고)가 눈에 띕니다.



안흥성(安興城) 관련 역사기록



동국여도(東國輿圖) (1800~1822)  <참고자료>



1)『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卷第19, 泰安郡關防條.


          「安興梁戍所斤浦僉節制使分兵戍之


              "안흥량수(安興梁戍)는 소근포(所斤浦)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군병을 나누어 지킨다."



2)『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 卷第19, 泰安郡山川條.


          「安興梁在郡西三十里古稱難行梁海水險漕船到此屢敗人惡之改今名


              "안행량(安興梁)은 군(郡)서쪽 34리 지점에 있다. 옛날에는 난행량(難行梁)이라 불렀는데, 바닷물이 험하여 조운선이 누차 

               패몰(敗沒)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 싫어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3)『東國輿地志』(1670 추정) 泰安郡城郭條.


          「安興梁僉節制使鎭


              안흥진(安興鎭)이 어떠한 형태였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지만 성곽조(城郭條)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이미 축성이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4)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숙종실록(肅宗實錄)]: 1674~1720


              "호서(湖西)의 안흥은 수로의 요충에 있어 위급한 경우 강도(江都·강화도)를 성원할 수 있기 때문에 성을 쌓았다."


5) 『여지도서(輿地圖書)』(1700년대 후반), 忠淸道泰安郡城堡條.


          「安興鎭在郡近西面四十理僉使武從三品鎭防卒八十七名龜船一雙防船一雙兵船一雙伺候船三雙等在南門外船倉…


              "안흥진(安興鎭)은 (태안읍)으로부터 서쪽으로 40리 떨어진곳에 위치하며, 첨사(僉使) 무종3품(武從三品) 1명, 진방졸(鎭防

               卒) 87명, 거북선(龜船) 1척, 방선(防船) 1척, 병선(兵船) 1척, 사후선(伺候船) 3척 등이 남문 밖 선창에 배치 되어 있다."


6)『대동지지(大東地志)』(1861~66) 卷5, 忠淸道泰安郡鎭堡條.


           「安興鎭, 西四十里……孝宗四年移設花亭島六年士人金石堅請建置說鎭城周三千六百二十一尺 顯宗十年還于本鎭有制

              勝樓待變亭泰國寺倉三 水軍僉節制使一員」


             "안흥진(安興鎭)은 (태안읍)으로부터 서쪽으로 40리 떨어진곳에 위치, 효종(孝宗)4년(1653)에 안흥량수(安興梁戍)를 화정도

             (花亭島)로 옮겼는데, 효종(孝宗)6년(1655)에 사인(士人 :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김석견(金石堅)이 상소(上訴)하여 안흥진의

              설치를 청원(請願)하여 축조하였다. 성(城)의 둘레는 3,621척(尺)이며, 현종(顯宗)10년(1669)에 화정도(花亭島)로부터 진영을

              이곳으로 옮겼다. 제승루(制勝樓), 대변정(待變亭), 태국사(泰國寺), 창고 3개소가 있으며,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1명이 있다."



7) 이외에도 많은 기록이 남아있으며 읍지(邑誌) 등에도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안흥진성(安興鎭城)에 대한 발굴 및 학술조사



             1, 2차 성벽 절개 조사 지역도 <참고자료>


안흥성(安興城)은 지난 1993년 공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처음으로 학술조사로 진행된 바 있으며, 이후 지난 2006년 4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이 성벽 절개방식으로 1차 발굴조사를 진행해 성의 축성기법과 잔존현황을 파악한 바 있고, 또한 2012년 4월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 의해 2차 발굴조사를 진행해  성곽라인과 성벽 축조방법에 대해 파악하였습니다.



1] 안흥진성(安興鎭城)에 대한 구체적인 학술조사 [1993년]



                                       안흥진성(安興鎭城) 학술조사보고서 [공주대학교박물관, 1995발행] <참고사진>


안흥진성(安興鎭城)에 대한 구체적인 학술조사는 1993년 공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처음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학술조사는 정밀한 실측조사를 실시하고, 성의 정확한 규모와 구조를 파악하는데 중점을 두었는데, 그 결과 조사된 기초자료를 바탕으로 서문(西門)을 복원하게 되었습니다. 조사된 안흥진성의 현황을 살펴보면 문지 4개소, 건물지 6군데가 확인되었습니다. 문지는 성벽이 지나가는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낮은 능선에는 각각 4개의 성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복원된 서문을 제외하고 남문, 북문, 동문은 훼손된 채로 남아 있습니다. 건물지는 성내 곳곳에서 총 6군데가 확인되었습니다. 산을 에워싼 포곡식 산성의 지세에 따라 확인되지 않던 크고 작은 건물지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 성내에는 민가 48채가 자리잡고 있는 관계로 성벽 축성 당시 건물지의 배치 및 추정지를 모두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공주대학교박물관 학술조사보고서 참고>



2]  안흥진성(安興鎭城) 성벽절개조사보고서(城壁切開調査報告書)   [2006년 4월 1차 발굴조사]



                               안흥진성(安興鎭城) 성벽절개조사보고서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08년 발행] <참고사진>


안흥진성(安興鎭城)에 대한 성벽절개조사는 2006년 4월 1차 발굴조사가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성의 북문(北門)에서 태국사(泰國寺)에 이르는 성벽 가운데 3개소를 절개하여 성의 축성기법 및 잔존현황을 파악하였습니다. 조사결과 성벽은 아래에서부터 기저부(基底部), 성돌 및 뒷채움석, 내탁부(內托部)등 크게 3개 부분으로 구분되어 축성하였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성벽의 잔존현황도 매우 양호한 편이고 성벽은 조선시대 축성 및 사용되고 폐기된 단일시기 유적으로 확인되어 해당시기의 성벽 축성구조를 연구하는데 중요 자료로서 의미를 가집니다.  <충청남도문화연구원 성벽절개조사보고서 참고>


                                              출토유물 ① 전(전(塼: 벽돌), ② 토기, ③ 자기, ④ 동전 <보고서 참고사진>


출토유물 중 동전은 만주국(滿洲國)의 발행주화로 보입니다. 동전에는 "大滿洲國"과 "大同三年"(1934)이 새겨져 있는데, 성벽의 폐기 이후를 보여주는 유물로 추정됩니다. <충청남도문화연구원 성벽절개조사보고서 참고>



3]  태안 안흥진성(安興鎭城) 2차 발굴조사보고서   [2012년 4월 2차 발굴조사]



                         안흥진성(安興鎭城) 2차발굴조사보고서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014년 발행] <참고사진>


안흥진성(安興鎭城)에 대한 2차 발굴조사는 2012년 4월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안흥진성 서문지 일원 300㎡에 대한 2차 발굴조사에서는 안흥성 성곽라인과 성벽 축조방법에 대한 발굴이 진행되었습니다. 성벽구간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1) 기저부는 암반면까지 굴착하지 않고 암반편이 섞인 생토면을 정지하여 성벽을 쌓아 올린 점. 2) 성돌 및 뒷채움석은 세장방형, 장방형, 방형, 부정형 등 다양한 모양의 할석을 이용한 점. 3) 내탁부 아래 내벽은 2단의 계단식 벽을 조성한 점. 4) 결합이 가능한 다량의 벽돌이 출토된 점 등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태안이 고려시대부터 현재까지 육로와 해로를 연결하는 중요지역임을 고려한다면 안흥진성은 해안방어를 위해 현존하는 관방 유적 가운데 진성(鎭城)의 구조와 성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습니다. 

<충청남도문화연구원 2차발굴조사보고서 참고>


                                  출토유물 '기와편' <참고사진>


성내(城內)에서는 많은 유물을 찾아볼 수 있는데, 모두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들뿐입니다. 또한 성내 곳곳에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곳은 당시의 건물지로 판단됩니다. 특히 성내에는 봉수대(烽燧臺)도 1개소 자리하고 있어 안흥진성의 축조 목적을 쉽게 짐작케 합니다.



안흥성지(安興城址)



안흥성지(安興城址) <google참고사진>


안흥성(安興城)은 태안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성곽 가운데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데, 형세는 안흥항의 뒤쪽에 솟아 있는 표고 80m 내외의 나지막한 4개의 봉우리를 에워싼 포곡식(包谷式)입니다. 조선 초기 성안에는 호화로운 집이 300여채 있었다 합니다.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사신들에게 잘 보이려고 만들었다는 설(說)[주강현 '관해기']이 있다는데 아마도 얕보이지 않으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명나라에 널리 알려져 "조선에 가거든 안흥성을 보고 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옛 시절에는 사신과 상인들이 성문 앞까지 배를 타고 들어왔다 합니다. 이제는 앞바다 매립으로 물길과 많이 멀어졌습니다. 10년 전에 바다를 끼고 컨트리클럽이 들어섰습니다. <조선닷컴>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2차발굴조사보고서 중 조사지역 현황도 <참고자료>


성은 4개의 봉우리를 에워싸고 있기 때문에 진성(鎭城)의 전체적인 평면 형태는 마름모꼴을 이루고 있으며,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의 낮은 곡부에는 각각 성문(城門)을 설치하였습니다. 다시말해서 성내에서 가장 높은 표고 80m의 산봉우리 정상부를 지나서 태국사 방향으로 내려가는 곡부(谷部)에 북문을 구축하였고, 태국사가 있는 표고 71.9m 의 산봉우리와 추정 봉수대가 있는 산봉우리 사이에는 서문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추정봉수대가 있는 산봉우리와 제일 남쪽에 있는 표고 75.5m의 산봉우리 사이에 있는곡부에는 남문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 제4봉우리와 제1봉우리 사이의 곡부에는 동문이 각각 위치해 있습니다.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발굴조사보고서 참고>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1차발굴조사보고서 중 조사지역 현황도 <참고자료>


성내의 지형은 북문쪽과 남문쪽은 거의 비슷한 반면에 동문쪽은 높고 서문쪽은 낮아서 전체적으로 동고서저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데, 동문쪽의 높이가 52m 인 반면에 가장 낮은 서문쪽은 평지에 가까운 12m 여서 동문쪽과 서문쪽의 고도 차이는 40m 로 매우 심한 편입니다. 이렇게 동고서저의 지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서문 쪽에는 성내의 모든 물이 모이게 되어있으므로, 이곳에는 배수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한 성내에서 가장 높은 제1봉우리와 서해바다를 감시하기에 용이한 제4봉우리 정상부에는 지형에 걸맞는 어떠한 시설물이 있었을 것으로추정되지만, 현재는 군사시설이 들어서 있어서 조사가 어렵습니다. <충청남도문화연구원 발굴조사보고서 참고>


   

   안흥성(安興城)  <참고사진>


    

      <안내판>



성곽(城郭)과 성문(城門)



      안흥성(安興城) 서문(西門)과 수홍루(垂虹樓) <참고사진>


안흥성(安興城)은 금북정맥(錦北正脈) 서쪽 제일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금북정맥은 경기도 안성(安城) 칠장산(七長山: 492m)에서 시작하여 태안 안흥진(安興鎭)에 이르는 금강(錦江) 서북쪽을 지나는 산줄기입니다.



 안흥성(安興城) 내에서 본 서문(西門)과 수홍루(垂虹樓) <참고사진>


현재 성곽(城郭)과 동(東), 서(西), 남(南), 북(北)의 성문(城門) 터는 비교적 원형(原形)대로 잘 남아 있습니다. 성문 위에는 누각(樓閣)이 세워져 있었으며, 동문(東門)은 수성루(守城樓), 서문(西門)은 수홍루(垂紅樓), 남문(南門)은 복파루(伏波樓), 북문(北門)은 경성루(頃城樓)라 불렀습니다. 현재는 서문(西門)과 수홍루(垂紅樓)만 복원되어 있습니다.



안흥성 탐방안내도 <참고사진>


안흥성의 구조는 둘레 1,714m, 높이 3.5m로 돌로 쌓았으며, 돌의 크기는 모두 다르지만 서로 짜 맞추어진 것처럼 정교하고 반듯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성벽(城壁)은 자연지형을 적절히 이용하여 능선상(稜線上)에 축조되었는데, 성의 바깥쪽만 돌로 쌓고 안쪽은 흙으로 쌓은 편축(片築)으로 되어 있고 성벽 하단에는 큰 성돌을 놓고 상부쪽으로 갈수록 점점 작은 성돌을 사용하여 조선시대 성곽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태안문화원자료참고>

                       

                       성벽 명칭 참고도 <참고자료>


성벽의 안쪽으로는 폭 8~10m 가량의 내호(內壕)가 만들어져 있고, 성벽 위쪽에는 여장시설을 마련하였습니다. 특히 여장은 남벽쪽에 뚜렷하게 확인되는데 길이 190cm에 폭 90cm의 크기를 하고 있으며 여장마다 원총안(遠銃眼) 2개와 근총안(近銃眼) 1개를 배치한 형태의 방어망을 구축하고 있습니다.  <태안문화원자료참고>



● 서문(西門)



      서문(西門)과 수홍루(垂紅樓) <참고사진>


서문(西門) 위에는 누각(樓閣)인 수홍루(垂紅樓)가 복원되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서문은 원래 바닷가와 접하여 위치하였으나 현재는 서문과 접해있던 바다가 매립되어 골프장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외부 → 내부                       서문(西門)<참고사진>                        내부 → 외부


서문(西門)은 높이 280cm, 넓이 235cm, 깊이 550cm의 규모이며, 양쪽으로 쌓아올린 육축(陸築)위에 수매의 장대석(長大石)을 얹어 놓은 평거식(平据式)의 형태입니다.


※ 육축(陸築): 성문을 짓기 위해 큰 돌로 만든 축.

※ 평거식(平据式): 성벽의 양벽을 쌓고 그 위에 장대석이나 판석을 놓아 개구부를 만든 형태.


                                                            성문(城門) <참고사진>



수홍루(垂紅樓)



 수홍루(垂虹樓) <참고사진>


수홍루(垂虹樓)는 '무지개 드리운 누각'이란 뜻으로 공주대학교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안흥진성에 대한 학술조사를 바탕으로 서문(西門)과 함께 1994년 복원하여 제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1970년대 까지만 해도 서문(西門)으로 우마차와 사람들이 지나다녔는데 새마을 운동으로 지붕개량을 하고 길을 내기위해 문의 한쪽 성벽을 헐어 도로를 낸바 있습니다.


                                                    ‘수홍루 현판’ 복원 <참고사진>


동학혁명 때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는 안흥성(安興城)에 자리한 수홍루(垂虹樓)의 현판을 2002년12월 복원했습니l다.


 수홍루(垂虹樓) 우측 위로 태국사(泰國寺) 가는 길이 보입니다. <참고사진>


 수홍루(垂虹樓) 내 마루판 <참고사진>


  

   수홍루(垂虹樓) 내부 가구(架構) <참고사진>



● 북문(北門)



북문(北門)과 북쪽 성벽 <참고사진>


    

                                       내부 → 외부                       북문(北門) <참고사진>                    외부 → 내부


 북문 밖 풍경 [북문 밖으로 보이는 농지는 과거에 바다였지만 간척사업으로 육지가 되었습니다.] <참고사진>


장대석(長大石)을 얹어 놓은 평거식(平据式) 형태 <참고사진>


 확돌(성문 받침 구멍돌) <참고사진>



  북쪽성벽 <참고사진>


     북쪽성벽 단면 [2006년 발굴조사] <참고사진>



▶ 경성루(頃城樓)



                       

                        북문(北門) 위에 있어야 할 경성루(頃城樓)는 아직 복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고사진>



● 남문(南門)



  남문(南門)과 남쪽성벽 <참고사진>


     

                                     내부 → 외부                       남문(南門) <참고사진>                     외부 → 내부



남쪽성벽 <참고사진>


석공(石工)의 출신지가 새겨진 성돌[청주사람] <참고사진>


남문 성벽에는 축성에 동원된 석공들의 이름과 출신지가 새겨진 성돌이 남아있습니다. 이러한 성돌은 실제로 성을 축조하기위해 멀리 청주, 은진 등에 사는 사람들까지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복파루(伏波樓)



남문 위 있어야 할 복파루(伏波樓) 주춧돌 <참고사진>



● 동문(東門)



                                   홍예식 성문과 누각 <참고사진>


동문(東門)을 중심으로 전체 성곽의 약 1/4 정도가 군사보호지역 내에 있어 현재는 동문(東門)과 주변 성곽의 실체를 볼 수는 없으며 비교적 파손이 심한 편이라고 합니다. 동문(東門)은 통로의 윗 부분을 둥글게 만들어 홍예식(虹霓式)*의 형태를 취하고있는 것이 특징으로 평거식(平据式)의 다른 문과는 다른 점입니다. 원래 동문(東門) 앞에는 영의정 김좌근(金左根)과 수군병마첨절제사 가행건(賈行健)의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있었는데 현재는 안흥항 입구 도로 가에 조성된 비석군(碑石群)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 홍예식(虹霓式): 문의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



▶ 수성루(守城樓)


역시 북문(北門) 위에 있어야 할 수성루(守城樓) 또한 아직 복원하지 못하고 있을 뿐더러 그 자취조차 볼 수 없습니다.



태국사(泰國寺)



 태국사(泰國寺) <참고사진>


태국사(泰國寺)는 안흥성 안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 수덕사(修德寺)에 딸린 작은 절이며, 안흥성 내 서북쪽 봉우리 정상에 위치해 있습니다. 백제 무왕 34년(633)에 창건되어 고려 공민왕 때 폐사(廢寺)되어 100여 년 간 내려오다  조선 세종2년(1420)에 재건했다고도 하고, 세종 1439년 지었다는 설도 있으나 입증자료가 없어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초가집의 모습으로 있다가 1982년 원통전(圓通殿)을 신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안내판>


태국사(泰國寺)는 안흥항을 드나드는 사신(使臣)들의 항해가 무사하기를 기원하였던 곳이라는 설과 물살이 센 안흥 앞바다를 지나는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세곡선의 무사항해를 위해 기원을 드렸던 곳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국란(國亂) 시에는 승군(僧軍)들이 머물며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서산군지(瑞山郡誌)에 따르면 왜구가 침략하거나 외적이 침입할 때 태국사의 주승(主僧)은 수막대장(守幕大將)의 지시를 받아 수군(水軍)이 있는 18개 읍의 사찰 승군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때의 군사적 직권은 첨절제사(僉節制使)와 같았다고 합니다.


     태국사(泰國寺)의 창건(創建) 설화(說話) <참고자료>


태국사(泰國寺)는 세종대왕 때 태안부사(泰安府使)가 꿈을 꿨는데 그 꿈에 보살이 나타나 안흥성 바닷가에 상자 하나가 떠내려 왔으니 즉시 이를 가져다가 잘 처리하라는 내용에 꿈에서 깬 부사는 반신반의 하며 바닷가로 내려가 보니 꿈대로 상자하나가 있었습니다. 상자를 열어보니 그 안에 금불상이 있고 금불상을 싼 보자기에는 기원(祈願), 태평(泰平), 국운(國運)이라 쓰여 있었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겨 국왕께 올렸더니 국왕의 특명을 받은 승려가 이곳에 내려와 터를 잡아 사찰을 세우고 보자기에 쓰여 있던 글자에서 태(泰)와 국()자를 따와 태국사(泰國寺)라고 이름 짓고 금불상을 안치하니 이것이 오늘의 태국사(泰國寺)라는 이야기입니다. <태안군지참고>



 원통전(圓通殿) <참고사진>


원통전(圓通殿)을 관음전(觀音殿)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불당에 석가여래가 아닌 관음보살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관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라는 뜻에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합니다.


                                            원통전(圓通殿) 현판 <참고사진>


'圓通殿'이란 현판에 "同治十一年壬申五月一日"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동치(同治)란 중국의 목종(穆宗)연호로서 우리나라의 고종9년(1872)에 해당됩니다. 이는 태국사의 중창 연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원통전(圓通殿) 불단 <참고사진>


     원통전 관세음보살상 <참고사진>



                 원통전 성광여래도(熾星光如來圖)와 산신도(山神圖) <참고사진>


                                              통전 동종(銅鐘) <참고사진>


관음전(觀音殿) <참고사진>



                                                 태국사사적비(泰國寺寺跡碑) <참고사진>



제승루(制勝樓)터(고려시대)



                                                              제승루 위치 <참고자료>


제승루(制勝樓)는 태국사(泰國寺) 남쪽에 세웠던 누각을 일컬으며 제승루에 오르면 전후 좌우가 탁 트여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어 이곳을 찾는 이들이 일년내내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승루는 고려 공민왕 원년(1352)에 안흥지역에 침입한 왜적선(倭寂船)을 김휘남(金暉南)이 격침시키고 포획(補獲)한 승리의 기념으로 세운 망루(望樓)였는데, 1894년 동학혁명 이후 안흥성의 폐성(廢城)과 함께 허물어지고 현재 그 터만 남아있습니다.



망해루(望海樓)터(조선시대)


망해루(望海樓)는 안흥성내 태국사 옆에 세웠던 누각을 일컫습니다. 망해루는 그 명칭이 말해주듯이 멀리 해상의 절경을 조망(眺望)할 수 있고 아울러 해구(海寇)의 침입을 감시하였던 기능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안흥성이 폐성(廢城)된 이후 오늘날에는 그 터만 남아있는데 태국사에서 남쪽으로 약 100여m 지점 잡초속에 당시의 초석이 남아있습니다.



☞  봉수대


성내에는 봉수대도 1개소 자리하고 있었는데 봉수대의 위치는 서문 남쪽의 산봉우리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안흥성(安興城) 마을



안흥성 마을 입구 <참고사진>


한때 관아와 민가 30여 호가 성안 마을에 함께 있었고 주민들이 사용하던 우물이 네 곳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관아의 흔적은 없어지고 세 개의 우물터만 남아 있으며 대를 이어 살아온 민가와 새롭게 이주해온 주민들과 북문 밖 주민까지 약 70여 가호가 살고 있습니다.


성안마을에서 바라본 서문(西門)과 안흥량(安興梁) <참고사진> 


성안마을과 멀리 남문(南門) <참고사진>


2014년 현재 성내에는 민가 48채가 자리잡고 있고 나지막한 산을 에워싼 포곡식 산성이기 때문에 이들 민가 외에도 성내에는 평탄 대지가 쉽게 눈에 띕니다. 특히 남문, 북문, 주변은 거의가 평탄 대지로 되어있어 현재 밭으로 경작되거나 휴경지로 남아있습니다.



성안마을과 북문방향 <참고사진>


성안 마을의 경우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는 지역 외에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 곳들은 대부분 옛 건물터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안흥성(安興城) 참고자료



● 조선일보 기사 [2016년 4월14일]


                               

                          태안 안흥성 위치도   


남쪽 다도해(多島海) 같다. 서해 태안반도 끄트머리 안흥성에서 바라본다. 섬 놓인 바다가 펼쳐진다. 신진도, 마도, 가의도, 옹도, 난도, 궁시도, 격렬비열도…. 10여개 섬이 줄을 잇는다. 더 가면 중국 땅이다. 격렬비열도에서 산둥반도까지 거리는 270㎞. 한반도 남쪽에서 중국에 가장 가깝다. 시속 100㎞로 달리면 3시간도 안 걸린다. 바닷길 고속도로다.


당연히 해상 교통 요지였다. 중국 사신과 상인들이 안흥항으로 몰려들었다. 바다 보이는 곳에 성을 쌓고 집을 지었다. 조선 초기 성안에는 호화로운 집이 300여채 있었다 한다. 태조 이성계가 명나라 사신들에게 잘 보이려고 만들었다는 설(說)(주강현 '관해기')이 있다는데 아마도 얕보이지 않으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명나라에 널리 알려져 "조선에 가거든 안흥성을 보고 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찻길 안쪽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다. 도로를 따라가면 놓치기 쉽다. 옛 시절에는 사신과 상인들이 성문 앞까지 배를 타고 들어왔다 한다. 이제는 앞바다 매립으로 물길과 많이 멀어졌다. 10년 전에 바다를 끼고 컨트리클럽이 들어섰다. 안흥성에서 바라보면 바로 앞쪽에 골프장 푸른 잔디가 보인다. 공 치는 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성문 누각과 성벽은 효종 때 새로 쌓았다. 인터넷 조선왕조실록(sillok.histo ry.go.kr)에서 '안흥성'을 검색하니 '호서(湖西)의 안흥은 수로의 요충에 있어 위급한 경우 강도(江都·강화도)를 성원할 수 있기 때문에 성을 쌓았다'(숙종실록)는 기록이 있다. 명 멸망 후 들어선 청을 내심 적(敵)으로 여기던 당시에는 군사 요충지로 바뀐 것이다. 교역하기 좋은 땅은 곧 최전선이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성 위쪽에는 국방과학연구소가 있다. 앞에 보이는 산정(山頂)에도 군사 시설이 보였다.


그 옛날 성안은 관청과 숙소, 주점과 기방(妓房)으로 흥청거렸을 터이다. 지금은 20여가구 사는 조용한 마을이다. 평일에 찾았는데 한 시간 넘도록 찾아오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 많던 집들은 동학농민전쟁 때 불타 사라졌다 한다.


누각과 석벽(石壁)이 남아 있다. 무지개 드리운 누각이란 뜻의 수홍루(垂虹樓)에서 언덕 방향으로 돌담이 이어진다. 둘레가 1.7㎞였다는데 일부만 남았다. 성벽을 따라 난 언덕길로 오르면 절집 태국사(泰國寺)가 있다. 조금 더 가면 이내 국방과학연구소 경계를 알리는 쇠로 만든 담이 막아선다. '접근 엄금'이라고 쓴 낡은 표지판이 보였다. 일반인이 갈 수 없는 국방과학연구소 안에는 안파사(安波寺)라는 절이 있었다 한다. 절 이름에도 나라의 안녕과 태평을 기원하는 뜻이 읽힌다.


옛 사신이 오가던 바닷길을 느끼고 싶었다. 다리(신진대교)로 이어진 신진도 항구(안흥 외항)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을 탔다. 마도, 가의도, 정족도, 목개도를 돌아오는 1시간30분 코스. 사자바위, 독립문바위, 돛대바위 같은 작은 바위섬들이 절경이다. 봄바람이 상쾌했다.


등대섬으로 불리는 옹도에 잠깐 내리는 코스도 있다. 전국 아름다운 등대 16곳 중 한 곳으로 선정됐다. 날씨 등에 따라 배편이 변동될 수 있으니 미리 확인한다. (041)675-1603


국제 항구였던 안흥항은 이제 낚시 명소라고 홍보한다. 옛 해상 교통 요지는 낚싯배 드나드는 외진 항구가 됐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가려면 KTX로 부산 가는 시간만큼 걸린다. 항구(내항·외항)는 낚시 어선 빌려주는 곳, 횟집, 건어물 노점 등이 늘어서 있었다.


가는 길

고속버스 서울 센트럴시티터미널에서 태안공용터미널까지 2시간 10분. 안흥 방면 지역 버스로 약 1시간. 안흥항에서 안흥성은 걸어서 20분. 승용차는 서해안고속도로→서산IC→서해로→근흥로 방면. 3시간20분.


조선닷컴




안흥성(安興城) 주위



지령산(知灵山: 205.9m)



   지령산 위치도 <google 참고사진>



    지령산(知灵山: 205.9m) <참고사진>


지령산(205.9m)은 근흥면 정죽리에 위치한 산으로 근흥면에서 제일 높은 산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지령산에는 안파사(安波寺)가 있었다고 합니다. "고려 때 수로가 험하여 조운선이 여러차례 실패를 보아 이 절을 세운 것인데, 중간에 왜적의 침입을 당하여 거의 다 파괴되었고, 조선 세조 때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지명은 이 산에 지란(芝蘭)이 야생하고 있는데서 유래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지란은 지초(芝草)와 난초(蘭草)를 말합니다. <태안군지>



▶ 용굴



 용굴 위치도 <google 참고사진>


안흥성(安興城) 서문 수홍루 북쪽 안흥항입구교차로에서 약30m 떨어진 곳에 안흥성 밑으로 굴의 입구를 볼 수 있는데 발견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이굴을「용굴」이라 부릅니다. 


                                          

                                            용굴 입구 <참고사진>


용굴에 얽힌 전설


옛날 신진도에는 100년 묵은 구렁이가 있었는데 이 구렁이는 용이 되고 싶었으나 도를 닦을 적당한 장소가 없었습니다. 어느날 이 구렁이는 산신령에게 자기의 처지를 말했습니다.


"산신령님 제가 100년을 살아왔는데 이대로 죽기는 억울합니다. 용이 되고싶습니다. 다시 100년동안 도를 닦아야 용이 될 수 있다는데 어디로 가서 도를 닦아야 할는지요?"  그러자 산신령은 이 구렁이에게 조건부로 도닦을 장소를 일러주었다. "좋다. 내가 그 장소를 알려줄 터이니 나와 약속을 하자." "네가 도를 닦아 용이 되면 안흥 앞바다에 풍랑이 심하여 좌초하는 배가 많아 그러니 네가 용이 된 다음 풍랑을 잠재워 주면 내가 그 장소를 알려주겠다."고 했다. 이렇게 하여 산신령은 바로 마주 보이는 안흥성 밑에 그런 장소가 있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 곳에 가면 사방 네 몸둥이 길이와 똑 같다니 제가 가서 제 몸길이와 같은 굴을 찾아보겠습니다. "


그 후 이 구렁이는 다시 100년동안 도를 닦고 승천했다 하는데 산신령과의 약속 때문인지 안흥 앞바다의 풍랑이 이때부터 한결 줄어들었고 난파선도 줄어들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태안군지 참고>


용굴에서 올려다본 하늘. 이곳으로 용이 승천하였다고 합니다. <참고사진>



육모정(六茅亭)과 비석군(碑石群)



   육모정 위치도 <google 참고사진>


             육모정과 비석군 위치 <참고사진>


안흥항 초입의 도로 가에 있는 옛 육모정터에는 복원된 육모정(六茅亭)과 선인들의 공로와 선행을 기린 송덕비(頌德碑), 선덕비(善德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늘어서 있습니다.


     안흥성 육모정과 비석군 <참고사진>


육모정과 백년갈증을 푼 유래비 등 그동안 안흥성 주위에 산재되어 있던 향토문화의 역사성을 간직한 비석 10여개를 이곳 안흥성 서문 앞 도로변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육모정(六茅亭): 2013년 8월, 70여 년 만에 안흥 육모정 복원건립 <참고사진>


육모정이라고 이름 붙여진 것은 건립 당시 띠끌로 이엉을 만들어 지붕에 씌워 띠모(茅)자를 써서 육모정(六茅亭)이라 이름지어 세운 것으로 전해 내려져 오고 있지만 고증이 이루어지지 않아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육모정에는 안흥역사에 대한 고증을 할 수 있는 서적이 보관되었다고 전해 내려오기는 하지만 단지 구전으로만 전해지고 있으며, 태국사의 종소리(泰國鐘聲)를 제1경으로 하는 안흥팔경이 서각돼 육모정에 걸려있었다는 것은 목격한 주민들이 많아 신빙성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육모정’ 현판 서체는 김성진 복원 추진위원장이 직접 썼습니다.


육모정 복원건립기념비 <참고사진>

  







     김좌근(金左根)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참고사진>


철종4년(1854)에서 14년까지 세 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김좌근(金左根)의 불망비(不忘碑)는 원래 안흥성(安興城) 동문(東門) 앞에 세워져 있었는데 1985년 안흥성 서문 밖 안흥항 입구 오른쪽 길 옆에 옮겨 세웠습니다. 비문(碑文)에 의하면 안흥지역의 주민들이 전복을 채취하여 임금께 진상하여 왔으나, 해마다 그 양이 증가되고 따라서 어려움이 겹쳐 괴로운 곤경에 처해 있으므로 이를 선처해 달라는 진정을 올렸는데, 이를 당시 영의정이었던 김좌근이 받아들여 전복 진상을 철폐하였고, 주민들이 이뜻을 고맙게 여겨 김공의 덕을 기리기 위해 비를 세우며, 후임자는 이를 본 받으라는 내용입니다. <태안군지 참조>


가행건(賈行健)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참고사진>


조선 헌종 때의 명신 가행건(賈行健)이 충청도 안흥진(安興鎭)의 수군병마첨절제사(종3품) 시절, 안흥 지방은 전복과 해삼이 지방 특산으로 궁중에 올리는 진상품이었습니다. 바다가 흉년이거나 엄동설한에도 백성들은 차가운 바닷물에 들어가 해삼, 전복을 따다 관가에 바쳐 서울로 올려야했습니다. 가행건(賈行健)은 이 같은 민폐의 시정을 중앙에 강력히 건의해 영의정 김좌근(金左根)이 이를 받아들여 진상공납을 폐지, 백성들의 고달픔을 덜게 했습니다. 훗날 고을주민들은 돌(石)과 구리(銅)로 각각 비석을 새겨 안흥성 동문(東門) 앞에 세웠습니다. 동비(銅碑)는 일제강점기 약탈되어졌고, 1978년 현재의 오석(烏石)으로 재건립 되었습니다 <태안군지 참조>


     백년 갈증을 푼 유래비 <참고사진>




                                            안흥성(安興城) / 태안(泰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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