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法住寺) / 보은(報恩)
☞ 충청북도(忠淸北道) 보은군(報恩郡) 법주사(法住寺)
보은군 법주사 위치 <google참고사진>
● 세계문화유산 보은 법주사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충북 보은 법주사]
법주사(法住寺: 충북 보은)는 2018년 6월30일 대한민국의 산사(山寺) 7곳과 함께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山寺, 韓國의 山地 僧院·僧園)’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습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산사(山寺) 7곳의 사찰은 경남 양산 통도사, 경북 영주 부석사, 충북 보은 법주사, 전남 해남 대흥사, 경북 안동 봉정사, 충남 공주 마곡사, 전남 순천 선암사입니다.
<참고사진>
● 교통편: 고속버스 이용
센트럴시티↔속리산 왕복 고속버스
- 센트럴시티 출발시간: 07:05 AM, 속리산터미널 도착시간: 10:00 AM [경유지: 청주, 보은]
- 속리산터미널 출발시간: 16:20 PM, 센트럴시티 도착시간: 19:30 PM [경유지: 보은, 청주]
▶ 법주사(法住寺): 사적 제 503호, 명승 제 61호
법주사(法住寺) 전경 <참고사진>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속리산(俗離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는 신라 진흥왕14년(553)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의신(義信)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습니다. 그후 성덕왕19년(720)에 절을 중수했고 혜공왕12년(776) 진표(眞表), 영심(永深) 스님 대의 중창을 거쳐 왕실의 비호를 받으며 8차례의 중창을 거듭하였고, 조선조 중기에 이르러서는 60여동의 건물과 7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로서의 위용을 자랑했습니다. 영심(永深) 스님 대의 중창 이후 법주사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법상종(法相宗) 사찰로 자리매김하였습니다.
법주사의 창건설화 <참고사진>
법주사의 창건에 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 사적기(寺跡記) 등에 적힌 내용에 "천축(天竺: 인도)으로 구법(求法) 여행을 다녀온 의신조사(義信祖師)는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절 지을 터를 찾아다녔는데 지금의 법주사터에 이르자 나귀가 더 가지 않고 제자리를 맴돌았다. 의신조사가 주변을 살펴보니 절을 지을만 했으므로 이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에서 사명(寺名)을 법주사(法住寺)라 했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진표율사(眞表律師)의 행적이 가장 자세히 적힌『삼국유사』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관한 기록을 요약해 보면,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떠나 속리산으로 가는데 길에서 달구지를 타고오는 사람들을 만났다. 달구지를 끌던 소들이 진표율사 앞에 무릎을 꿇고 울자 달구지 주인이 ‘이 소들이 무슨 까닭으로 스님을 보고 우는 것이며,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것입니까?’ 하고 물었다. 율사가 말하기를, ‘나는 금산사(金山寺)의 진표라는 중이요. 미륵·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戒法)을 받아 절을 지어 길이 수도할 자리를 찾고자 오는 것이오. 이 소들이 내가 계법 받은 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이요.’ 그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짐승도 오히려 이러한 신심이 있는데 하물며 나는 사람으로서 어찌 그런 마음이 없으리오.'하며 그는 즉시 제 손으로 낫을 쥐고 자기 머리털을 잘랐다. 진표율사는 자비심으로 다시 그의 머리를 깎아 주고 제자로 삼았다. 그들은 속리산 골짜기에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에 표시를 해 두고 금강산으로 가서 발연사(鉢淵寺)라는 절을 세웠다. 그 후 진표율사는 영심(永深)으로 하여금 길상초가 있는 곳에 절을 짓고 길상사(후에 법주사로 이름이 바뀜)를 세우게 하였다."
속리산 깊숙한 골짜기에 위치하고 있으면서도 평지에 자리잡은 법주사 <참고사진>
선조30년(1597) 정유재란 때 충청도 지방 승병의 본거지였던 이 절은 왜군의 방화로 모조리 불에 타버렸습니다.그후 사명대사(泗溟大師) 유정(惟政)이 법주사의 중건을 주도하여 선조35년(1602)에 팔상전을 재건하기 시작한이래 인조4년(1626)까지 주요 전각과 요사를 복원하는 등 중창이 일단 마무리되었고 이후 여러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릅니다. 일반적으로 조선 인조 때 법주사를 중창한 것은 벽암대사(碧巖大師) 각성(覺性)으로 알려졌지만 대웅보전과 팔상전의 상량문에서 불사에 관여한 인물들을 조사한 결과 벽암대사나 그 제자들이 아닌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법주사 전경(1920년대) <참고사진>
법주사는 미륵신앙(彌勒信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성립한 불교의 한 종파인 법상종(法相宗)사찰에서는 미륵불을 주존으로 모시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석가모니불이 멸한 후 56억 7천만 년이 지나 마침내 부처가 된 미륵은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세번에 걸쳐 인연없는 사람들에게 설법을 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인간은 일심으로 미륵(彌勒)을 믿고 철저히 수행하고 선근(善根)을 쌓아서 세번의 설법에 참가하여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미륵신앙입니다.
법주사 전경(1960년대초) <참고사진>
속리산과 법주사에는 많은 설화가 전해집니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즉위하기 전 법주사(法住寺)의 산내암자 상환암(上歡庵)에서 백일기도를 올렸으며, 조선의 7대 임금 세조는 왕위를 찬탈하고 어린 조카 단종을 죽인 후 마음의 병과 몸에 생긴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속리산으로 비접을 떠났습니다. 법주사 복천암(福泉庵)에서 세조는 3일간 기도를 하고 신미대사로부터 3일 동안 설법을 들은 후 샘물을 마시고는 마음의 병을 고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몸의 피부병은 낫지 않았는지 다시 오대산(五臺山) 월정사(月精寺)로 가서 병을 고쳤다는 전설이 함께 전해지고 있습니다.
속리산은 최고봉인 천왕봉(1,057m)을 중심으로 비로봉(1,032m), 문장대(1,054m), 관음봉(983m), 길상봉, 문수봉 등 9개의 높은 봉우리로 형성되어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리다가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법주사는 천황봉,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 등 8개의 봉우리(峰)와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신선대, 봉황대, 산호대 등 8개의 대(臺) 그리고 내석문, 외석문, 상환석문, 비로석문, 금강석문, 추래석문, 상고내석문, 상고외석문 등 8개의 석문(石門)이 있는데, 이들이 연꽃잎처럼 감싸고 있는 터에 둘러싼 속리산은 산 그 자체로 불국토의 형상을 취하고 있습니다.
법주사(法住寺)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현존하는 '법주사사적(法住寺事蹟)'이 최초로 쓰인 것은 1630년인데, 여기에 임진왜란 이전 조선 초기에 있었던 건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건물 60여 동, 석조물 10여 점, 암자 70여 개소가 기록되어 웅장한 규모였음을 증명해 줍니다. 그 가운데 예불용 전각 등 중요 건물은 대웅대광명전 (2층 28칸). 산호보광명전 (2층 35칸), 팔상오층전 (36칸), 비로전 (17칸), 약사전, 극락전 (6칸), 원통전 (6칸), 지장전, 연경전, 영산전, 도솔전, 응진전, 대양문 (7칸), 천왕문, 조계문, 해탈문, 동행랑, 서행랑 등 이었습니다.
가람의 배치 <참고사진>
현재 법주사는 팔상전이라 불리우는 1기의 목탑과 더불어,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용화전, 원통보전, 명부전, 능인전, 조사각, 진영각, 삼성각 등 8개의 전각과 일주문, 금강문, 사천왕문, 종고루, 부도전 등 5개의 부속건축, 그리고 선원, 강원, 염불원 등 3개의 원이 또한 염화당, 용화당, 미룡당, 용주전, 사리각, 종무소를 포함한 10여채의 요사채들이 남아 있어 도합 30여동의 건물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한편 법주사는 통일신라부터 고려, 조선시대 등 각 시대의 중요 불교문화유산이 전해지는 대찰로서 국보 3점, 보물 12점 등의 중요 불교문화유산과 많은 수의 충청북도 유형문화재가 있습니다.
법주사 가는길 <google참고사진>
10:02 / 터미널 출발
오리숲길: 표지석 뒤에는 용머리폭포
‘오리숲’길은 법주사 입구의 참나무와 소나무, 전나무들이 우거진 숲길이 5리(2km)에 달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참고사진>
용머리폭포 <참고사진>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살아가던 나무꾼 가족의 행복한 시절을 표현해 놓았습니다. 수달과 하늘다람쥐, 꿩, 사슴, 까치가 어우러진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폭포에 흘러내리는 물줄기는 인공이지만 기암절벽은 오랜 세월을 두고 이곳을 지키고 자연그대로의 암벽입니다.
소나무숲
속리산 조각공원
달천(達川)을 가로지르는 다리
탐방지원센터
카페 '美 갤러리'
오리숲
10:19 / 법주사 매표소
오른쪽 길은 차도이므로 왼쪽의 '속리산 자연관찰로'로 진행합니다.
오리숲속에서 일주문이 보입니다.
10:29 / 일주문(一柱門)
일주문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문으로, 기둥이 한 줄로 되어 있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일심(一心)을 상징합니다. 청정한 도량에 들어가기 전에 세속의 번뇌를 말끔히 씻고 일심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일주문 현판「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호서(湖西)는 호서지방으로 충청북도 제천(堤川)의 의림지(義林池)라고 하는 삼한시대때 인공적으로 축조한 호수의 서쪽으로 충청지방을 일컫는 말이고, 가람(伽藍)은 산스크리트어 ‘상가람마’에서 비롯된 말로 스님들이 모여서 수행하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일주문(一柱門) 뒷면
일주문 지나 '세조길'의 시작지점
세조길과 법주사로 들어서는 삼거리
부도전(浮屠殿)
세조길, 법주사 갈림길
화소(火巢) 비(碑)
화소(火巢)란 산불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능원이나 묘 등의 울타리 밖에 있는 풀과 나무와 같이 불쏘시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들을 미리 불태워 버린 곳을 말합니다. 그 곳에 세워둔 석비(石碑)를 화소비(火巢碑)는 화소표석(火巢標石)이라고도 합니다. 이 곳에 화소표석이 있는 이유는 부근에 순조대왕태실(純祖大王胎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표석 뒷면에는 아래 사진과 같이 하마비(下馬碑)라는 글자도 새겨져 있습니다.
앞뒷면의 하마비(下馬碑)와 화소비(火巢碑) <참고사진>
조선왕조시대 능과 원 혹은 태실을 조성하면 화소(火巢: 산불금지)비(碑) 금양(禁養:땔깜채취금지)비, 금표(禁標: 벌목금지)비, 하마(下馬: 승마금지)비 등이 세워지게 됩니다. 이것은 시설물 보호와 존경의 표시로 통제구역을 설정, 그 경계의 요소요소에 세웠습니다.
속리산법주사 안내도 <참고사진>
속리산법주사 안내도 <참고사진>
‘벽암대사비’와 ‘속리산사실기비‘
법주사 어귀에는 법주사를 중창했다고 하는 벽암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벽암대사비’와 속리산의 내력을 소개하고 있는 ‘속리산사실기비‘ 두기의 비석이 있습니다.
● 보은 법주사 벽암대사비(報恩 法住寺 碧巖大師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1호
법주사(法住寺)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
법주사 입구 수정교(水晶橋) 앞 바위 위에 있는 조선 중기의 벽암대사의 석비입니다. 조선 현종 5년(1664)에 세운 것으로, 규모는 높이 2.1m, 폭 1.1m, 두께 35cm, 비개석은 우진각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비는 넓직한 받침돌 위에 홈을 파서 비몸을 세운 후, 제법 묵직하고 투박한 머릿돌을 얹은 모습입니다. 비문(碑文)은 부승지 지제교 정두경(副承旨 知製敎 鄭斗卿)이 짓고, 선조의 손자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쓰고, 복창군(福昌君) 이정(李禎)이 새겼습니다.
법주사(法住寺)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 그 옆은 봉교비(奉敎碑)
비문(碑文)은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던 법주사의 전각들을 인조2년(1624)에 중창불사를 한 벽암대사(碧巖大師)의 행적이 적혀 있습니다. 벽암대사(1575∼1660)는 보은(報恩) 출신의 승려로 법명은 각성(覺性)이며, 벽암은 그의 호입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해전(海戰)에 참여하였고, 인조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을 때 8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되어 승려들을 이끌고 3년만에 공사를 완성시켰습니다. 인조14년(1636)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도승(南道僧) 수천명을 모집 ‘항마군(降魔軍)’이라 하고 북진하던 중 전쟁이 끝나자 승려들을 돌려보내고 지리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인조24년(1646)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熙彦)과 머물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가 수도(修道)하다가 현종1년(1660) 86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하였습니다.
봉교비(奉敎碑)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 옆에는 작은 봉교비(奉敎碑)가 있는데 이 비(碑) 우측에 씌어진 봉교(奉敎)란 왕이 내린 명령으로 '임금이나 웃어른의 가르침을 받든다'는 뜻입니다. 또한 봉교비(奉敎碑) 좌측에 씌어진 비변사(備邊司)는 조선 중·후기 의정부를 대신하여 국정 전반을 총괄한 실질적인 최고의 정무기관이었으며, 비석 중앙에 씌어진 금유객제잡역(禁遊客除雜役)은 (1851년)왕명에 의해 속리산에 들어와 놀지 말고 승려들에게는 함부로 잡역(부역)을 시키지 말라는 내용입니다.
● 보은 속리산사실기비 (報恩 俗離山事實記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
속리실기비각(俗離實記碑閣)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는 법주사(法住寺) 수정교(水晶橋) 앞에 있는 높이 1.63m, 너비 0.65m의 비(碑)로서 보호각내에 세워져 있습니다. 비각(碑閣)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입니다.
속리실기비각(俗離實記碑閣) 현판
보은 속리산사실기비(報恩 俗離山事實記碑)
보은 속리산사실기비(報恩 俗離山事實記碑)는 조선 현종7년(1665)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명필 송준길(宋浚吉)이 글씨를 썼습니다. 내용은 속리산은 매우 아름다워 사람들이 소금강산이라고도 불렀으며, 그 이름이 중국에도 널리 알려져 중국사람들도 우리 나라에 태어나 한번쯤 구경하기를 원하는 명산임을 밝히고, 세조가 이 곳에 행차한사실을 기록한 김수온의 사실기록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수정봉 거북바위 <참고사진>
또한 속리산사실기비(報恩 俗離山事實記碑)에서는 속리산 수정봉(水晶峯: 556m) 위에 있는 거북바위의 내력을 쓰고 미신을 타파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수정봉 정상에 거북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데 이를 본 중국의 술객(術客)이 거북의 머리가 중국이 있는 서쪽을 향하여 번쩍 쳐들려 있는 형상이 중국의 재화(財貨)를 모두 실어 내갈 영물(靈物)이라면서, 거북바위의 머리를 깨뜨리고 등 위에 10층 탑을 세워 그 기운을 진압했습니다. 그때 거북이가 흘린 피 때문에 수정봉 정상의 흙은 붉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효종 4년(1653) 옥천군수 이두량(李斗梁)은 다시 거북의 머리를 붙이고, 1665년 충청병마절도사가 관찰사에게 알려 탑을 헐어버렸다는 사실이 적혀있는데, 이러한 사실을 미신적 행위로 경계한 내용입니다.
수정교(水晶橋)와 달천(達川)
법주사 입구 수정교의 이름은 수정봉에서 유래되었으며, 다리 아래에 흐르는 수정같이 맑은 물을 바라보며 마음을 가지런히 하라는 의미도 포함된 것입니다. 이 물은 남한강으로 흘러가는 달천(達川)의 최상류입니다.
사찰 입구 오른쪽의 석주(石柱)와 비석
수정교(水晶橋)를 건너면 우측에 어떤 용도에 사용하는 것인지 모를 돌기둥 하나가 서 있고, 그 석주 옆에는 작은 비석 하나가 있는데 남석교(南石橋)라는 다리를 세우는데 시주한 사람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강희28년(숙종15년, 1689년) 시월에 비석을 세웠고, 건릉15년(영조26년, 1750년)에 비석을 다시 세운다는 각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한국NGO신문 참조>
금강문(金剛門)
가람과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가 지키고 있는 금강문(金剛門)을 통해 법주사 경내로 들어섭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이고 좌우에 풍판(風板)을 달았습니다. 중앙 어칸은 통로로 이용하고 양쪽 칸에는 1974년에 조성한 금강역사(나라연금강, 밀적금강)라 불리는 호법신장과 사자를 타고 앉은 문수보살상, 코끼리를 타고 앉은 보현보살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흔히 사찰의 삼문(三門)이라고 하면 一柱門, 天王門, 不二門을 말하는데, 금강문을 세우지 않은 사찰도 많이 있습니다. 금강문이 있는 사찰은 금강문이 사찰의 대문 역할을 하지만, 금강문이 없는 사찰은 천왕문이 대문 역할을 합니다.
사자를 타고 앉은 문수보살상(文殊菩薩像)과 나라연금강(那羅延金剛)
코끼리를 타고 앉은 보현보살상(普賢菩薩像)과 밀적금강(密迹金剛)
●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지주(幢竿支柱)
철당간(鐵幢竿), 찰주(刹柱), 찰간(刹幹)이라고도 불리어지기도 하며 불교 의식 때 불당(佛幢)을 걸어놓는 용도로 씁니다. 고려 7대 목종9년(1006)에 높이 16m로 주성되었으나 조선 26대 고종3년(1866)에 파괴되었으며, 순종 때 높이 22m로 다시 조성된 것입니다.
기단부(基壇部)
지주부(支柱部)
● 석연지(石蓮池): 국보 제64호
석연지(石蓮池)
금강문을 들어서면 서쪽에 위치한 돌로 만든 작은 연못으로 연꽃을 띄워 두었습니다. 연꽃은 네 가지의 덕을 가진다고 하였는데,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 설명하기를 “향(香, 향기), 결(潔,고결), 청(淸, 맑음), 정(淨, 깨끗함)이 그것이다”라 하였습니다. 비록 중생이 사는 세상이 탐욕으로 얼룩져 있지만, 진리를 상징하는 연꽃은 청정하고 깨끗하여 맑은 향기를 전한다는 의미입니다.
석연지(石蓮池) <참고사진>
국보 제64호로 지정되어 있는 높이 1.95m, 둘레 6.65m의 석연지(石蓮池)는 신라 성덕왕19년(720)경에 조성된 것으로서, 8각의 지대석 위에 3단의 괴임을 만들고 다시 복련을 두른 굄돌을 올렸으며, 그 위에 구름을 나타낸 동자석을 끼워 연지를 받치고 있습니다.
석연지(石蓮池) <참고사진>
몸돌은 커다란 돌의 내부를 깎아 만들었는데, 반쯤 피어난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 쓰임과 잘 어울리며, 외부의 곡선과도 아름다운 조화를 이룹니다. 표면에는 밑으로 작은 연꽃잎을 돌려 소박하게 장식하였고, 윗부분에는 큼지막한 연꽃잎을 두 겹으로 돌린 후 그 안으로 화사한 꽃무늬를 새겨두었습니다.
상부 난간석(欄干石)
석련지 몸통 상부에는 세로로 세운 짧은 동자주를 세우고 둥글게 난간을 둘렀는데, 그 위로도 짧은 기둥을 새긴 후 난간 모양이 되도록 조각되어 마치 난간이 두 줄로 된 듯합니다. 윗난간에 세워진 기둥은 불국사 다보탑에 새겨진 돌난간의 기둥과도 비슷하여 예스러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난간 아래의 벽에는 천인상(天人像)과 함께 보상화문(寶相華紋)을 돋을새김 하였습니다.
<참고사진>
석연지(石蓮池)는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과 함께 옛 용화보전을 향해 한 줄로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철당간 옆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원래 이 석연지(石蓮池)는 법주사의 본당이었던 용화보전(龍華寶殿)이 있었을 때 그 장엄품을 설치했던 것으로 극락정토의 연지를 상징하며 화강석으로 조각한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습니다.
● 보은 법주사 애여래의좌상 (報恩 法住寺 磨崖如來倚坐像): 보물 제216호
수정암 가는 길목의 추래암(墜來岩) <참고사진>
수정암(水晶庵) 가는 길목에 거대한 바위가 세개있는데, 동쪽을 향해 있는 바위에는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고, 세 바위 중 가장 작고 남향을 하고 있는 바위에는 마애여래의좌상(磨崖如來倚坐像)이 새겨져 있습니다. 원래 추래암(墜來岩)은 뒤쪽의 수정봉(水晶峯)에 있었으나 제멋대로 자리를 바꾸었다가 이를 밉게 본 산신(山神)이 아래로 밀어 떨어뜨렸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추래암(墜來岩) 각자(刻字)
마애여래의좌상(磨崖如來倚坐像)
마애여래의상은 높이가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돋을새김으로 조각되어 있습니다.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연꽃 대좌에 두 다리를 올려 놓고 앉아 있는 미륵불상(彌勒佛像)입니다.
마애여래의좌상(磨崖如來倚坐像)
불상의 머리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나발(螺髮)]을 촘촘하게 새겼습니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에는 뭉퉁하고 긴 코와 둥근 눈썹, 뚜렷한 눈두덩과 함께 두꺼운 입술이 잘 표현되어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왔고 목에 있는 3줄의 주름이 고려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가슴 앞에 들어서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가운데 손가락을 구부려 엄지와 맞대었고 왼손은 앞에서 수평으로 들어 손바닥을 위로 향하고 있는 설법인(說法印) 또는 전법륜인(轉法輪印)을 짓고 있는 모습입니다.
바위의 마모로 인해 설화도(說話圖)는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아래는 확대해본 사진입니다.
불상의 오른쪽 바위 면에는 짐 실은 말을 끄는 사람과 말 앞에 꿇어 앉은 소를 새겨 놓았습니다. 이것은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 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하는 모습 즉, 두 가지의 법주사 창건 설화와 관계되는 설화도(說話圖)로 알려져 있습니다.
마애여래의좌상(磨崖如來倚坐像) 바로 옆 바위에 조각된 지장보살상(地藏菩薩像)
추래암(墜來岩) 위의 폐탑(廢塔) <참고사진>
● 법주사 수정암(水晶庵) 가는 길
수정암(水晶庵) 가는 길의 추래암(墜來巖) 옆 부도전(浮屠田)
추래암(墜來巖) 옆 부도전에는 금오대종사(金烏大宗師) 부도와 부도비(浮屠碑), 석상대종사(石霜大宗師)의 부도가 있습니다. 석상스님(1872~1947)은 12년간 법주사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금오스님은 불교정화운동에 적극 참여해 종단을 바로 세웠습니다.
수정암(水晶庵) 석문(石門)
수정암(水晶庵)과 부도전(浮屠田)
수정암(水晶庵)은 법주사의 산내 암자(庵子)입니다. 신라 진흥왕14년(553) 의신조사(義信祖師)가 법주사와 함께 창건하였습니다. 1914년에 비구니 태수(泰守)스님이 이곳에 머물면서 그 개인의 원력으로 산신각, 칠성각 등 수십칸을 신축하였으며, 암자 입구에는 1925년에 세운 태수(泰守)스님의 부도(浮屠)와 탑비(塔碑)가 있습니다. 이 암자는 법주사 경내의 유일한 비구니 수도처이기도 합니다.
1925년에 세운 태수(泰守)스님의 부도(浮屠)와 부도비(浮屠碑)
태수(泰守)스님의 부도(浮屠)
바위 위에 세운 태수(泰守)스님의 부도비(浮屠碑)
추래암(墜來巖)과 부도전 담장
● 법주사 석조(石槽):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
석조(石槽)
능인전으로 오르는 계단 남쪽에 큰 석조(石槽: 충북유형문화재 제70호)가 하나 자리잡고 있습니다. 통일신라 성덕왕1년(720)에 제작된 것으로 봅니다.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법주사의 3천 승도(僧徒)가 살면서 사용되었던 물을 저장하는 돌로 만든 물탱크로 쌀 80 가마를 채울 수 있는 크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법주사 석조(石槽)
높이 130cm, 길이 446cm, 너비 242cm 크기의 석조(石槽)로 아래쪽 남쪽 벽에 너비 11cm의 원공이 있어 실제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조의 바닥면에서 구연부에 이르기까지 네 벽이 수직을 이루고 있으며, 안팎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꾸밈이 없어 단조롭고 간결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구연부의 윗면자리를 경사지게 깎아내어 모각이 없게 하였으며 벽체의 두께가 긴쪽은 23cm, 짧은쪽은
34cm 두께로 석조의 전체적인 비례와 균형을 고려하였습니다. 현재 모서리 일각에 약간의 파손이 있을 뿐 보존상태도 양호합니다.
● 세존 사리탑(世尊舍利塔) 구역
세존 사리탑(世尊舍利塔) 구역 <google참고사진>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입구 출입문: 세존사리탑은 능인전 뒤에 있습니다.
■ 능인전(能仁殿):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능인전(能仁殿):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2호
적멸보궁(寂滅寶宮)인 능인전(能仁殿)은 법주사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앞에 조성된 건물로서 조선 인조 2년(1624)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법주사 중건시 벽암대사(碧巖大師)에 의해 중창되었습니다.
이 건물은 진신사리(眞身舍利)의 예배 장소로 가운데 부분을 유리창을 내어 세존사리탑을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건물은 중창할 때부터 능인전(能仁殿)이라 불러 왔는데 ‘능인(能仁)’이란 말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별칭 중 하나로 '능히 일체 중생을 교화하여 이롭하게 하는 분'이란 뜻에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능인전(能仁殿) <참고사진>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지붕의 좌우에는 풍판을 달았고 장대석으로 2단의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건물을 세웠으며, 정면에는 4단의 석재 계단을 두었습니다. 건물이 옛 형태대로 잘 유지되고 있어 조선시대 건물로 보존가치가 높습니다.
불단 중앙 좌로부터 갈라보살, 석가여래, 미륵보살 <참고사진>
조선후기 호영(呼映)스님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알려진 「법주사전경도」에는 사리각(舍利閣)이라 표기되어 있어 이 전각이 원래 사리탑 적멸보궁의 예배처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건물 내에는 석가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미륵보살과 갈라보살(竭羅菩薩)이 협시하고 있으며 또 그 좌우에 각각 8구씩 연대 미상의 16나한(羅漢)이 모셔져 있습니다.
16 나한상(羅漢像)
능인전 뒷면: 진신사리가 봉안된 세존사리탑을 볼 수 있도록 건물 뒷면 가운데 부분에 유리창을 내었습니다. <참고사진>
■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충청북도 유형문화제 제16호
세존사리 1과를 봉안한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참고사진>
8각원당(角圓堂)의 기본형을 보이는 높이 3.5m, 둘레 4.7m의 부도로서 그 구성은 상, 중, 하 3단으로 이루어진 기단(基壇) 위에 탑신(塔身)을 올리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하였습니다. 기단에서 하대석은 윗면에 비스듬히 경사를 주었고, 중대석은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으며, 상대석은 솟은 연꽃무늬로 장식하였습니다. 둥근 탑신의 몸돌은 아무런 장식이 없고, 옥개석은 윗면에 흐르던 급한 경사가 끝부분에 이르러 완만해 졌습니다. 상륜부는 큼직한 원받침을 두어 그 위에 보주(寶珠:꽃봉오리모양의 장식)를 놓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아담한 모습으로 고려 말기의 부도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앞에는 배례석(拜禮石)이 있습니다.
■ 사리각(舍利閣)
사리각(舍利閣)
이 건물은 근대에 세워진 건물로 보이며 현재는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다. 현재 진행중인 적멸보궁 복원 계획에 따르면 이 건물은 철거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법주사 회주 혜정(慧淨) 스님이 2011년 2월 이곳에서 열반하신바 있습니다.
■ 적멸보궁 복원계획
<법보신문사진자료>
능인전 앞 마당에는 1363년 전 고려 공민왕12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세존 사리각’ 이 위치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존사리각 발굴현장 <불교방송사진자료>
충북문화재연구원은 ‘이곳 법주사에서 사리를 모셔뒀던 전각이 있었다‘는 옛 고문헌 자료를 토대로 2017년 10월 발굴 작업 결과 세존 사리각 건물지, 북쪽을 제외한 3개의 '양 끝 기단' 등도 발견됐고, 초석과 종으로 연결된 ‘적심’ 등도 세상에 드러났으며, 거의 ‘세존 사리각’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법주사측은 지금까지 드러난 주춧돌로 봐서는 정면 7칸의 전각이므로 법주사 대웅전 규모(정면 7칸, 측면 4칸의 2층)에 준하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건물이 1층이었는지, 2층이었는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학계의 고증이 마무리되면 지금의 사리각은 철거하고 그 자리에 능인전을 이전하고 현재의 능인전 자리에 적멸보궁을 신축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능인전 앞 보리수나무
● 사천왕문(四天王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사천왕문(四天王門): 사천왕문 앞 키 큰 전나무가 인상적입니다.
금강문(金剛門)을 들어서면 앞에 두 그루의 키 큰 전나무가 사천왕문을 보호하듯 나란히 서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사찰에 전나무가 많이 자라는 것은 절을 고쳐 지을 때 기둥으로 쓰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곳의 두 그루의 전나무는 언제 왜 심었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46호
사천왕문은 신라 진흥왕14년(553)에 처음 세워진 법주사의 정문입니다. 그 후 몇 차례 다시 지어졌다가 조선 인조2년(1624)에 벽암선사가 지은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장대석으로 2단을 쌓은 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겹처마 맞배지붕이고 좌우에 풍판을 달았습니다. 정면의 벽은 판벽을 하였고 중앙 어칸은 통로로 이용하고 좌우 2칸씩은 사천왕을 2구씩 배치하였습니다.
사천왕문(四天王門) 현판
사천왕문(四天王門)의 뒷면
국내의 천왕문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큰 사천왕문은 불법을 수호하는 사천왕을 안치한 건물로, 천상계의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하는 사천왕천(四天王天)의 동서남북, 네 지역을 관장하는 천왕들 즉,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을 모셨습니다.
용을 잡은 서방 광목천왕(廣目天王)과 보탑(寶塔)을 든 북방 다문천왕(多聞天王)
비파를 든 동방 지국천왕(持國天王)과 칼을 든 남방 증장천왕(增長天王)
사천왕상(四天王像)은 1624년에 흙으로 빚어 만든 것으로 높이가 약 5.7m의 대형으로 우리나라 최대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55호
보은 법주사 팔상전 (報恩 法住寺 捌相殿) :국보 제55호
팔상전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나라의 탑 중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며 하나뿐인 유일한 목조탑 입니다. 팔상전은 사찰 창건 당시에 의신대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며, 신라 헤공왕 12년에 진표율사가 중창했으나 정유재란 때인 1597년에 소실됐다가 1605년에 사명대사 주관으로 22년에 걸친 공사 끝에 조선 인조4년(1626)에 다시 지어진 건물입니다.
팔상전(捌相殿): 국보 제55호
현존하는 팔상전의 총 높이는 22.7m, 평면은 8m의 정방형으로, 전체적인 기단의 형태는 붉은빛 화강석을 네모반듯하게 가공한 장대석을 맞춰 높이 1.34m의 기단부를 형성하고, 그 위에 목조로 5층 탑신부를 짜고, 가장 위쪽에는 철재로 제작된 상륜부를 두고 있습니다.
기단(基壇)
지상에는 상층의 기단이 있으며, 지면에는 하층의 기단 상면(上面)이 보입니다. 지상에 서 있는 상성기단(上成基壇)은 4단의 장대석이 수평으로 쌓여 있으며, 각 면의 가운데에 돌계단을 두었으며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의 문을 내어 출입을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평면형식은 1층과 2층은 정면과 측면 각5칸, 3층과 4층은 정면과 측면 각3칸, 5층은 정면과 측면 각2칸씩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붕은 사모지붕이며, 지붕 위로 머리장식이 달려 있습니다. 머리장식의 유무에 따라 전각인지 탑인지 구분합니다. 팔상전 상륜 높이는 3.9m이며 최하단에 석재의 이중 노반이 있고, 그 상부에 복발이 간략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상부 찰주에는 5륜이 설치되어 있고, 찰주의 상단은 보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찰주의 상단으로부터 쇠줄을 늘여서,5층의 네 모서리 추녀 끝을 철재로서 돌출시켜 이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4개의 쇠줄 중간에는 각각 풍경을 달아 두었습니다.
<참고사진>
건물의 양식 구조가 층에 따라 약간 다른데, 1층부터 4층까지는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짠 공포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고, 5층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설치한 다포 양식으로 꾸몄습니다.
팔상전 현판
팔상전(捌相殿) 현판
내부 벽 면에 부처의 일생을 8장면으로 구분하여 그린 팔상도(八相圖)가 그려져 있어 팔상전(捌相殿)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여기서 捌은 '깨트릴 팔'이 아니라 八(여덟 팔)의 '갖은자'입니다. 한자로 숫자를 표기할 때는 함부로 고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같은 발음의 복잡한 글자로 기록하기도 합니다. 즉, 같은 뜻을 지닌 원 글자보다 획을 많이 하여 구성을 달리한 글자를 '갖은자'라 합니다.
팔상전은 561개의 기둥을 들여 5층 목탑을 완성하였습니다.
1층 공포대의 주간(柱間) 상의 연꽃과 귀면 모양의 화반(花盤) <참고사진>
공포
2층 추녀 끝에 있는 귀면와(鬼面瓦)와 귀공포(栱包) 끝에서 지붕을 머리위에 이고 있는 인물상 <참고사진>
팔상전 각 층의 지붕 추녀 끝에 토수를 끼워야 할 곳에 평면 귀면와(鬼面瓦)로 마감하였는데, 기와 표면에는 용면(龍面)을 선으로 정교하게 표현하였습니다. 사찰에서의 용면은 화마(火魔)를 막는 벽사(辟邪)의 기능을 갖기 위한 것입니다. 2층 네 곳의 추녀 중 세 곳에 난쟁이 상을, 한 곳에 용의 형상을 조각해 공포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두 개의 이 작은 인물상들은 불교 외호신중(外護神衆)의 하나로서 부처님을 찬탄(讚歎)하고 공양(供養)함과 동시에 불자(佛子)와 불전(佛殿)을 수호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팔상전 단면 구조도 <참고사진>
1968년 9월에는 팔상전을 해체, 수리하던 중 중앙의 거대한 심주(心柱) 밑 심초석(心礎石)에 마련된 네모꼴의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 조선시대[선조38년(1605)]가 발견되었습니다.
법주사팔상전사리장엄구(法住寺捌相殿舍利莊嚴具)
동판(銅版): 5장의 동판(銅版)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참고사진>
사리공(舍利孔) 안에서 네 벽과 위를 덮었던 명문(銘文)이 새겨진 5장의 동판(銅版 : 21.2×15㎝)이 발견되어 팔상전의 건립 경위를 밝힐 수 있었습니다. 동판에는 ‘萬曆二十四年丁酉九月日倭人盡燒(만력24년정유9월일왜인진소)’·‘乙巳年三月念九日上高柱入柱(을사년3월염구일상고주입주)’·‘朝鮮國僧大將裕淨比丘(조선국승대장유정비구)’ 등의 글이 남아 있습니다. 명문 중의 ‘만력24년’은 25년의 잘못된 기록으로서 선조 30년인 1597년에 해당되며, ‘유정비구’ 또한 유정(惟政)으로서 사명대사(四溟大師)를 일컫습니다. 이 기록으로 팔상전은 정유재란 중이던 1597년 왜군들에 의하여 불타 버린 뒤 선조38년(1605)에 승대장 유정의 주관으로 중건공사를 시작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원래 사방 3칸이던 규모가 현재와 같은 사방 5칸 규모로 바뀌었습니다.
은제 사리합과 받침 그리고 대리석 합(높이 6.1㎝ 지름 10.6㎝,)[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참고사진>
사리공 바닥에는 비단보자기로 겹겹이 싼 대리석 합(盒: 높이 6.1㎝ 지름 10.6㎝)이 있었고, 그 안에는 비단보자기에 싸인 은제 사리합(높이 3.3㎝)이 놓여 있었습니다. 합을 쌌던 보자기에는 각기 한글이 섞인 축원문(祝願文)이 먹으로 쓰여 있으나 상태가 불량하여 완전한 판독이 되지 않습니다.
심주 <참고사진> 사천주와 불단
팔상전 평면 중심에는 심주(心柱)가 있고, 그 주변에 사천주(四天柱)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사천주로 연결되는 네 변은 간벽(間壁)으로 막았으며 그 바깥에 불단(佛壇)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팔상전내부 <참고사진>
팔상전 내부에는 사리를 모시고 있는 공간과 불상과 팔상도(八相圖)를 모시고 있는 공간, 그리고 예불을 위한 공간으로 되어있습니다.
팔상도의 배치와 우요삼잡(右繞三匝)의 개념도 <참고사진>
사천주(四天柱)에 의해 형성 된 사방 네 면의 벽에 각각 2폭씩의 탱화, 불상과 나한상을 배치하여 우요삼잡(右繞三匝) 할 수 있는 예불공간으로 꾸몄습니다. 우요삼잡(右繞三匝)은 시계방향으로 세 바퀴 돌면서 예불하는 의례로 실내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탑에서는 탑 외곽을 탑돌이 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팔상전내부 <참고사진>
팔상전은 통층식 가구구조이기에 천장은 3층 높이에 가설되고, 내부 벽체는 l 층에서 3층까지만 보이고, 광창(光窓)과 포벽(包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3층의 천장은 일종의 격자천장(格子天障)으로 되어 있으며 격자 사이에는 연꽃, 국화 등을 그렸습니다.
팔상전내부 불단
불단에는 팔상도(八相圖)와 불상 그리고 오백나한상을 모셨습니다. 팔상도의 화기(畵記)에 기록된 탱화의 제작 년대는 1897년으로 비교적 늦지만, 팔상전 이름의 유래로 보아 17세기 초부터 팔상탱화가 존재 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팔상전내부 불단
팔상전 중건시 사방3칸에서 사방5칸으로 늘린 이유도 탱화를 걸면서 우요삼잡(右繞三匝)을 위한 공간을 실내에 확보하기 위함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팔상도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시계방향으로 팔상전을 한 바퀴 돌아 탑돌이를 하게 됩니다.
■ 팔상도(八相圖)
팔상도는 석가의 탄생에서부터 열반에 이르는 생애를 여덟 폭의 그림으로 그린 것입니다. ①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도솔래의상: 兜率來儀相), ②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에게서 태어나는 장면(비람강생상: 毘藍降生相), ③ 궁궐의 네 문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사문유관상: 四門遊觀相), ④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유성출가상: 踰城出家相), ⑤ 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설산수도상: 雪山修道相), ⑥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시키는 장면(수하항마상: 樹下降魔相), ⑦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장면(녹원전법상: 鹿苑轉法相), ⑧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장면(쌍림열반상: 雙林涅槃相)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법주사 팔상전에서는 동쪽의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이라고 하는 입태(入胎)를 시작으로 남쪽과 서쪽, 북쪽으로 회전하면서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의 입멸(入滅)에 이르기까지 8폭의 탱화를 배치했습니다.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 호명보살이 10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도솔천에서 머물고 있다가 중생을 제도 하고자 원을 세우고 자신이 태어날 장소와 가계, 어머니를 살핀 뒤 마야부인의 태에 들기로 결정했다. 마야부인은 정반왕과 결혼하여 20년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자를 잉태했다. =================================================================== 도솔래의상에서는 네 장면이 전개된다. 즉 탱화의 왼쪽에는 마야궁(摩耶宮)에서 마야 부인이 의자에 앉아 흰 코끼리를 탄 호명보살(護明菩薩)이 내려오는 꿈을 꾸는 장면이 묘사된다. 바로 그 위에 입태전(入胎殿)이 있어서 입태되는 장면이 묘사되고, 그 위에는 소구담이 도적으로 몰리어 죽는 장면이 묘사된다. 오른쪽에는 정반왕궁(淨飯王宮)이 있고 여기에는 왕과 왕비가 꿈꾼 내용을 바라문에게 물어보는 장면이 묘사된다. |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마야 부인이 출산을 하기 위해 친정으로 가던 중 룸비니 동산에 이르러서 산기를 느껴 무우수나무 가지를 잡는 순간 옆구리에서 아기가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 걸어가면서, "하늘 위 하늘 아래서 내가 홀로 존귀하다. 삼계가 모두 고통 속에 헤매이니 내가 마땅히 편안케 하리라."하고 외쳤다. 그 때 아홉 마리의 용이 감로수로써 태자를 씻겨 주었다. 그리고 태자가 태어나자 히말라야 산에서 아시타 선인이 내려와 태자를 배알 하고는 "왕자는 출가하면 부처님이 되실 것이고, 왕위를 계승하면 전륜성왕이 되실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러한 기쁨도 잠깐, 태자가 태어난지 칠일 만에 마야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 비람강생상에서는 여섯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마야 부인이 궁전을 떠나서 친정으로 가던 도중 룸비니 동산에서 무우수(無憂樹) 나뭇가지를 잡고 서서 오른쪽 겨드랑이로 아기를 낳는 장면, 둘째 태어난 아기가 한 쪽 손은 하늘을, 한 쪽 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외치는 장면, 셋째 제천(諸天)이 기뻐하면서 갖가지 보물을 공양하는 장면, 넷째 용왕(龍王)이 탄생불을 씻겨 주는 장면, 다섯째 왕궁으로 돌아오는 장면, 여섯째 아지타선인의 예언 장면 등으로 묘사된다. |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태자가 12세 되던 해 동문 밖으로 나가서 늙은 노인을 보았고, 남문 밖에서는 병자를 보고 늙고 병든 모습을 보았다. 또 서문 밖에 나가서는 장례식을 치루는 것을 보고 인생의 무상을 뼈저리게 느꼈으며, 북문 밖에서는 출가 수행자의 평안한 모습을 보면서 출가 수행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태자가 열두 살 되던 어느 날 부왕 몰래 성문 밖을 나가게 되었다. 동문 밖에서는 지팡이를 짚고 가는 늙은 노인을 보았고, 남문 밖에서는 얼굴이 파리하고 뼈만 앙상한 병자를 보았다. 또 어느 날 서문으로 나가 시체를 앞세우고 슬피 울며 가는 장례행렬을 보면서 태자는 여기서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은 왜 태어나서 늙고 병들고 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며칠 뒤 북문에 나가서 출가 수행자의 평안한 모습을 보면서 태자의 가슴에 한 줄기 빛이 비치는 듯 했다. 출가수행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 사문유관상에서는 네 장면이 묘사된다. 태자가 동문으로 나가 노인의 늙은 모습을 보고 명상하는 장면, 남문으로 나가 병자를 보고 노고(老苦)를 느끼는 장면, 서문으로 나가 장례 행렬을 보고 죽음의 무상을 절감하는 모습, 북문으로 나가 수행하는 사문(沙門 : 출가한 중)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 등이다. |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 성문 밖에서 늙고 병든 이를 본 뒤 태자는 늘 깊은 사색에 잠겼다. 정반왕은 이런 태자를 위해 19세가 되던 해 야소다라비와 혼례를 올려 주었다. 그 후 10년간 태자는 봄의 궁전, 가을의 궁전, 우기 겨울의 궁전 세 곳에서 춤과 노래로 즐거운 생활을 하였다. 29세가 되면서 아들 라훌라가 태어나자 드디어 출가를 결심하였다. 인생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낀 태자는 부왕의 만류와 아내의 간청을 뿌리치고 밤중에 몰래 마부와 성을 넘어 왕궁을 빠져 나갔다. 성을 나온 태자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출가 사문이 되었다. 당시 가장 훌륭한 수행자로 부터 선정에 이르는 가르침을 얻었다. 즉, 정신 통일을 하여 고요한 경지에 도달하여 해탈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선정도 깨어나면 전과 똑같은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자는 두 스승을 떠나게 되었다. =================================================================== 유성출가상에서는 보통 세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태자궁에서 시녀들이 취하여 잠자고 있는 모습, 둘째 태자가 말을 타고 성문을 뛰어넘는 모습, 셋째 마부 찬다카가 돌아와서 왕비와 태자비에게 태자의 옷을 바치면서 태자가 떠났음을 보고하자 왕비와 태자비가 태자의 소재를 묻는 장면 등이다. |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출가한 태자는 여러 스승을 찾아가 도를 구했으나 모두 자기가 바라던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도를 깨닫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가야지방의 우루벨라 마을의 숲에 들어가서 맹렬한 고행을 하기 시작했다. 정신적 자유를 얻기 위한 육체적 고행이었다. 6년의 극심한 고행 끝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 태자는 육체적인 고행 만으로는 정신적 자유를 얻기가 어렵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니련선하 강물에 들어가 더러워진 몸을 씻고 나뭇가지를 잡고 언덕에 올라갔다. 그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수자타로 부터 우유죽 공양을 받고 기운을 회복한 뒤, 큰 보리수나무 밑에 앉아 "도를 이루지 않고는 결단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 는 굳은 결심을 하고 대용맹 정진에 들어갔다. =================================================================== 설산수도상에서는 보통 여섯 장면이 묘사된다. 첫째 태자가 삭발하고 사문의 옷으로 갈아입는 장면, 둘째 찬다카가 돌아가는 장면, 셋째 정반왕이 교진여 등을 보내어 태자에게 왕궁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하는 장면, 넷째 환궁을 거절하자 양식을 실어 보내는 장면, 다섯째 목녀(牧女)가 우유를 석가에게 바치는 장면, 여섯째 모든 스승을 찾는 모습 등이다. |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태자가 이제 깨달음을 얻으려 하자 가장 다급해진 자는 마왕 파순이다. 한 사람의 붓다가 출현하게 되면 자신의 왕궁이 무너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세 딸을 보내어 온갖 교태를 부리면서 태자의 마음을 산만하게 하려했다. 태자의 마음속에서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악마와 온갖 욕망, 나태해지려는 마음, 해이해지려는 마음과 악전 고투를 하였다. 그 싸움도 끝이 나고 새벽이 되어 샛별이 나오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 태자의 나이 35세, 12월 8일 새벽의 일이었다. =================================================================== |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도를 깨친 후 제일 먼저 함께 수도하던 다섯 비구가 있는 녹야원으로 갔다. 태자가 성도한 것을 알지도 못한 이들은 태자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태자가 곁에 오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를 권하게 된다. 그리하여 다섯 비구들에게 수행자는 욕락과 고행 두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해야 함을 가르치고 '사성제' 법문으로서 그들을 진리의 세계에 눈을 뜨게 하였다. 이 후 왕사성을 중심으로 가르침이 퍼져 수많은 제자가 생겼다. 국왕과 대신, 부호, 평민, 천민 등 각 층의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 |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 쌍림열반상은 보통 세 장면으로 묘사된다. 첫째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 모습, 둘째 금관에 입관된 부처님이 가섭의 문안을 받고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보이는 모습, 셋째 다비하여 사리가 나오자 8대왕이 차지하기 위하여 다투는 장면과 바라문이 이를 중재하는 모습 등이다. |
참고자료: 불교인드라망, 민족문화대백과. <참고사진>
● 금동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
금동미륵대불 위성사진 <google참고사진>
금동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 법주사와 금동미륵대불
미륵불(彌勒佛)을 주존으로 모시는 법상종(法相宗)의 근본도량으로 내려온 법주사(法住寺)는 불교의 진리가 머무는 절로서 그 진리는 법상종의 교리에 근거하고 그 상징적 신앙의 대상은 금동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입니다.
금동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
금동미륵대불은 용화정토에 이르러 깨달음을 설하시는 미래의 미륵부처님을 의미합니다.
사라져버린 미륵신앙축(彌勒信仰軸) <참고사진>
지금의 금동미륵대불은 옛 용화보전(龍華寶殿) 위치에서 남쪽으로 10m쯤 옮겨져 세워졌습니다. 그 불사과정에서 예전 용화보전과 팔상전을 잇는 축 위에 한 줄로 늘어서 있던 석연지, 사천왕석등, 희견보살상도 이곳저곳 흩어져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법주사의 가람구조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고려시대에 완성된 예전의 법주사 가람배치에서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하는 화엄 신앙축과 용화보전을 중심으로하는 미륵 신앙축이 팔상전에서 직각으로 교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구성요소들이 마당 곳곳에 흩어짐으로써 미륵신앙축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창건기의 법주사는 미륵신앙 도량으로서 미륵불을 모신 용화보전을 중심으로 하였지만 고려시대로 들어오면서 미륵신앙과 화엄신앙을 아우르는 이중적 신앙체계를 갖게되었습니다. 대웅보전과 용화보전이라는 두 개의 중심을 두고 두 중심에서 이어지는 축이 팔상전에서 직교하도록 한 구조는 이러한 복합적인 신앙체계를 가람배치에 구현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고려시대의 가람구조가 이어 지는 가운데 계속 여러 건물이 지어져 정유재란으로 불타기 전까지는 불전이 20여동에 다른 건물이 40여동, 석조물이 10여점, 암자가 70군데에 이르렀습니다. 근래 들어 산호보전, 청동미륵대불을 조성하여 다시금 미륵신앙의 중심지를 표상하고 있습니다.
용화보전(龍華寶殿) 위치
금동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 옆 이곳이 원래 미륵장륙상을 봉안했던 용화보전(龍華寶殿)이 위치하였던 곳입니다. 용화보전은 뒤쪽에 바다의 산호처럼 불그스레한 산호대(珊瑚臺)라 불리는 바위가 있어서 산호전(珊瑚殿) 또는 산호보전(珊瑚寶殿)으로도 불렀으며 사적기(事蹟記)에 따르면 정면7칸, 측면 5칸의 2층 건물로 대웅보전(大雄寶殿)보다 더 크고 웅장한 법주사의 중심 법당이었습니다.
산호대(珊瑚臺)
바위 앞 나무 높이 부근에 산호대(珊瑚臺)라고 새긴 음각글씨가 있습니다. 산호대 앞 용화보전 자리에는 무너져버린 용화보전의 초석과 미륵삼존의 연화대석 3개만이 남아있습니다.
■ 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의 변천
1) 청동으로 주조한 미륵장륙상(靑銅彌勒丈六像) | 신라 36대 헤공왕 때 진표율사가 주관하여 조성한 높이4.8m가 넘는 청동미륵장륙상(靑銅彌勒丈六像)이 정면 7칸, 측면 5칸, 2층의 용화보전(龍華寶殿) 내에 있었습니다. |
2) 금동미륵장륙삼존상(金銅彌勒丈六三尊像) | 최초의 미륵장륙상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사라지고 이후 중창하면서 다시 금동미륵장륙삼존상(金銅彌勒丈六三尊像)을 용화보전에 봉안했습니다. 그러나 이 미륵삼존상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을 위해 당백전(當百錢)을 만들려고 헐어갔고 용화보전도 무너졌습니다. |
3) (시멘트)미륵대불 4) 보관 제거된 (시멘트)미륵대불 5) (청동)미륵대불 <참고사진>
시멘트로 만든 미륵불입상은 1939년부터 대시주자의 후원과 조각가 김복진씨에 의해서 조성불사가 시작되었으나 6.25동란으로 인해 중단됐다가 1964년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최고회의 의장이던 박정희 대장과 신도들의 시주로 용화보전 자리 곁에 완성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조류의 피해 등으로 원래 있던 보관(寶冠)이 제거되었으며, 시멘트 불상에 크랙이 생겨 붕괴될 위험이 생기자 안전상의 이유로 시멘트 미륵대불은 1986년 해체되고 1984년부터 40억원을 들여 청동불상 제작에 착수, 1990년 4월 그 자리에 청동미륵대불(靑銅彌勒大佛)이 들어섰습니다. 이 대불(大佛)은 높이 25m, 청동 160톤이 소요된 당시에는 세계 최고의 불상이라고 하였으며, 시멘트 불상과 모습이 같으나 머리 위의 사각 보관(寶冠)이 없어지고 광배(光背)를 새로 달았습니다. 그리고 불상 기단부 높이를 8m의 원형 구조로 만들어 내부를 용화전(龍華殿)으로 꾸몄습니다. 1990년 청동대불을 완성하고 점안식(點眼式)과 회향식(廻向式)을 하던 날 마른 하늘에 무지개가 3개나 뜨고 서광이 불상을 비추는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었다고 합니다.
6) 2002년 완성된 금동미륵대불 <참고사진> 7) 2015년 다시 개금(改金)한 금동미륵대불
1990년 조성된 청동미륵대불에 3만여 불자의 시주금 12억원을 들여 지난 2000년부터 모두 80㎏의 순금을 사용해 개금공사를 시작하여 17개월만인 2002년 6월 금동미륵대불을 완성하였습니다. 이때 사용된 순금은 3미크론(0.003mm) 두께의 순금 금박지(금 99.99%)로 만들어 섭씨 80℃∼-30℃에서 견딜 수 있는 건식도금공법으로 광택을 유지할 수 있도록 특수 도금하였습니다. 그러나 50년 이상 광택이 유지되고 균열도 생기지 않는다던 2002년 완성된 금동미륵대불에 검푸른 녹과 부식이 발생하여 불상에 광채가 사라지고 풍화작용에 따른 탈색과 녹이 스는 현상이 나타나자 2015년 금박을 덧씌우는 개금(改金)을 새로이 하게됩니다. 다시 성금을 모아 개금을 하면서 불상에 햇볕이나 비바람에 잘 변색하지 않는 '골드 펄'이라는 인조금을 7∼8미크론(0.007∼0.008㎜) 두께로 칠한 새로운 금동미륵대불이 조성되었습니다. 이 금동미륵대불은 기단까지 합친 전체 높이가 33m나되고 기단부 안에는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兜率天) 의 모습을 형상화시킨 지하석실 법당 용화전(龍華殿)이 있으며, 용화전 벽면에는 13개의 미륵십선도(彌勒十善道)가 부조되어 있습니다.
금동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
법주사 경내를 내려다 보는 금동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
1976년 법주사 경내를 내려다 보는 (시멘트)미륵대불 <참고사진>
● 용화전(龍華殿)
금동미륵대불(金銅彌勒大佛) 지하, 석실 법당 용화전(龍華殿)
기단부 안에는 미륵보살이 머물고 있는 도솔천(兜率天) 의 모습을 형상화시킨 지하석실 법당 용화전(龍華殿)이 있으며, 용화전 벽면에는 13개의 미륵십선도(彌勒十善道)가 부조되어 있습니다.
미륵삼존불(彌勒三尊佛): 보현보살, 미륵불, 문수보살
용화전 내부 <참고사진>
용화전의 법당의 금동미륵반가사유상(金銅彌勒半跏思惟像) <참고사진>
전수법인상(傳授法印相) <참고사진>
용화전 벽면에는 부조되어 있는 미륵십선도(彌勒十善道)의 하나인 전수법인상(傳授法印相)은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성불하여 전불(前佛)인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인(法印)을 받으십니다. 석존의 제1 제자인 가섭존자가 기사굴산 낭적봉에 석가불의 전법인의 신표로 "가사와 발우"를 수지하고, 선정(禪定)에 들어 미륵불을 기다리고 있는 곳에 미륵부처님이 보처보살(補處菩薩)과 제자들을 데리고 나타나 법인의 증표인 가사와 발우를 받는 모습입니다.
● 청동미륵대불 봉안기적비(靑銅彌勒大佛奉安紀跡碑)와 미륵불상 조성기념비(彌勒佛像造成紀念碑)
속리산법주사(俗離山法住寺) 청동미륵대불봉안기적비(靑銅彌勒大佛奉安紀跡碑)
1991년11월 봉안된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의 청동미륵대불 봉안 기적비(記蹟碑)입니다. 청동미륵대불 오른쪽 옆에 세워진 이 기적비는 청동미륵대불의 완공을 후세에 기리기 위하여 화강암으로 된 거북등 위에 사자머리를 한 밑받침과 밑받침 위에 오석 기적비를 앉힌 너비 2.25m,두께 75㎝,높이 5m 규모로 조성되었습니다. 기적비문에는 청동미륵대불의 건립 연도와 복원내력을 비롯, 기존 콘크리트 미륵대불의 조성 내력, 조국의 평화통일과 민족화합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청동미륵대불봉안기적비 뒷쪽에 있는 미륵불상조성기념비(彌勒佛像造成紀念碑)
청동미륵대불이 조성되기 전 1964년 조성되고 현재는 철거되어 없어진 시멘트 미륵대불을 위한 미륵불상조성기념비(彌勒佛像造成紀念碑) 입니다. 1964년 6월14일 박추담 법주사주지스님이 글을 짓고, 일중 김충현선생이 글을 썼습니다.
●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79호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 위치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는 금동미륵대불 뒤쪽 수정봉 아래 커다란 바위에 길쭉한 직사각형의 모습으로 자연암반을 파내어 비몸을 세운 비석입니다. 국존(國尊)이란 고려 말기, 특히 원 간섭기에 덕행이 높은 고승에게 국가에서 주는 최고의 법계를 이르던 말입니다.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 <참고사진>
1270년 당시 법주사에 머물렀던 자정국존(慈淨國尊: 1240∼1327)의 행장(行狀)을 기록한 탑비로서 고려 충혜왕 복위3년(1342)에 세운 것으로 왕의 명을 받은 이숙기(李叔琪)가 비문을 짓고, 전원발(全元發)이 글씨를 썼습니다. 높이 2.13m, 폭 1.07m의 석비로 '속리산법주사자정국존비(俗離山法住寺慈淨國尊碑)'라 새겨져 있습니다. 비몸 앞면 아랫부분이 일부 파손되어 있습니다.
자정국존비(慈淨國尊碑):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79호 <참고사진>
비문에 의하면, 국존(國尊)은 경상북도 구미 출신으로 속성은 김(金)씨, 법호는 자안(子安)이었으며 뒤에 미수로 고쳤습니다. 13세에 출가, 19세에 승과 합격, 29세에 삼중대사(三重大師)에 올랐고, 충렬왕 말년에서 충선왕, 충숙왕 때 자은종(慈恩宗) 종사(宗師)로서 승통(僧統)의 지위에 올랐으며, 교학(敎學)에서도 활약했습니다. 웅신사(熊神寺), 장의사(莊義寺), 법주사(法住寺) 등을 거쳐 대구 동화사(桐華寺) 주지였을 때 국존의 칭호를 받았고, 말년에 법주사에 머물다 88세로 입적하셨습니다. 시호는 자정(慈淨), 탑명(塔銘)은 보명(普明)입니다.
● 원통보전(圓通寶殿): 보물 제916호
원통보전(圓通寶殿): 보물 제916호
원통보전(圓通寶殿)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을 모신 전각으로 건물 안에는 3m의 금색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座像)을 모시고 있습니다. 원통보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주심포 정사각형 1층 사모지붕 건물입니다. 기단은 통일신라 말 원통보전이 초창될 때의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은 임진왜란 후에 복원되었고 고종 때 중수되었으며,1974년과 2010년 해체 복원되었습니다.
원통보전(圓通寶殿) 현판
원통전이란 관세음보살을 모신 집을 뜻하는데, 관세음보살이 주원융통(周圓融通)하게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座像): 보물 제1361호
목조관음보살좌상(木造觀音菩薩座像) 머리에는 화염보주(火炎寶珠)로 호화롭게 꾸민 보관(寶冠)을 쓰고 있습니다. 관 가운데 작은 부처가 새겨졌는데 이는 관세음보살이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화신(化身)으로 이 세상에 나타나기 때문에 쓰고 있는 보관(寶冠)에는 아미타불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불상 안에서 나온 유물 중 불상조성기가 발견되어 순치12년(1655)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통보전, 건륭50년명 범종(梵鐘) <국립문화재연구소사진>
높이 68.6cm, 종입지름 48.8cm, 청동 재질의 이 범종에는「乾隆五十年 大法住寺 乙巳四月日俗離山 鐘二百五十斤[중략]都片手 李萬重」이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습니다. 건륭 50년은 정조(正祖) 9년(1785)인데, 1785년 4월 속리산 법주사의 250근짜리 중형 종으로만들어졌으며 주종장은 이만중입니다.
●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보물 제1417호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보물 제1417호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은 높이 약2m, 붉은 화강석 재료의 조각상으로 하부 대석과 신부(身部), 그리고 향로 받침까지가 1석이고, 그위에 발우형 향로가 올려져 있습니다. 현재 보호각 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희견보살상은 신라 33대 성덕왕19년(720)경에 조성된 전체 높이 2m에 이르는 입상(立像)으로 두툼한 판석과 커다란 향로를 머리에 이고 있으며, 향로 용기의 면에는 연화문이 조각되어 있고, 보살상은 얼굴부분이 심하게 파손되어 잘 알아 볼 수 없으나 볼록한 가슴, 굵은 다리와 팔에서 역동적인 분위기가 나타납니다. 어깨에 두른 겉옷은 팔을 들 때 자연스럽게 펼쳐지듯이 가슴을 활짝 드러내 옆으로 젖혀져 있으며, 속옷은 하의에만 표현하였는데 배꼽 아래로 띠 매듭이 보입니다.
조각상의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구원겁(久遠劫)토록 부처님께 향불을 공양하는 희견보살(喜見菩薩)의 모습을 조성해 놓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희견보살은 1200년 동안 향과 기름을 먹고 마시며 몸에 바른 후 다시 1200년 동안 자기 몸을 태워서 부처님께 소신(燒身)공양을 올려 약왕보살(藥王菩薩)이 되었습니다. 향 공양은 부처님께 드리는 공양(供養) 가운데 으뜸이기도 합니다.
한편 희견보살상을 가섭존자상(迦葉尊者像)으로 보는 견해도 있는데, 석가모니의 제자 가섭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받아 미륵불이 하생할 때 가사(袈裟)와 발우(鉢盂)를 받들고 여벌의 가사를 걸친채 미륵불을 기다리는 모습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원래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은 석연지(石蓮池),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과 함께 옛 용화보전을 향해 한 줄로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원통보전(圓通寶殿) 옆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 석등(石燈: 팔상전과 범종각 사이)
팔상전과 범종각 사이의 석등(石燈)
높이 2.9m의 이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복련(覆蓮)이 새겨진 원형의 하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앙련(仰蓮)이 새겨진 상대석을 얹고 그 위의 실제 사용된 흔적이 있는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屋蓋石)은 금이 간 상태이고 보주(寶珠)를 포함한 상륜부는 근대에 새로 만들어 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팔상전과 범종각 사이의 석등(石燈)
● 범종각(梵鐘閣)
범종각(梵鐘閣)
범종각은 팔상전(捌相殿)의 동쪽 정면에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6년 종무소를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 지었습니다. 안에는 범종(梵鍾), 운판(雲板), 법고(法鼓), 목어(木魚) 등이 있습니다. 이 네 가지의 법구(法具)가 불당 앞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이를 ‘불전사물(佛前四物)’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범종각 현판
범종각 내 불전사물(佛前四物) <참고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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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講院)과 요사(寮舍)
강원(講院)
강원(講院) 뒤 공양실(供養室):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
요사채
요사채
궁현당(窮玄堂):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4호
팔상전 동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스님들이 거처하는 승방(僧房)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조선 인조10년(1632)에 선당(禪堂)으로 건립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명확한 것은 아닙니다. 상량문(上樑文)에 의하면 철종 3년(1852)에 기존의 낡은 건물을 손질하여 고쳤다고 하였습니다. 1968년에 ‘일’자형 건물에서 또 다른 ‘일’자형 건물을 직각으로 연결하여 정면 15칸, 측면 4칸의 ‘ㄴ’자형구조로 바꾸었으며 1998년에 크게 보수하였고, 정면인 동쪽 면과 왼쪽 측면인 남쪽 면에는 툇마루를 두어 건물 안에서 쉽게 이동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 석옹(石瓮):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석옹(石瓮):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04호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자료>
석옹(石瓮)은 돌항아리 형태의 석조물로 조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법주사 3천여 승려들의 김칫독으로 사용된 것이라고 전해집니다.
석옹(石瓮): <한국학중앙연구원 사진자료>
석옹의 크기는 깊이 225㎝, 윗부분의 바깥지름 180㎝, 안쪽지름 85㎝ 정도이며, 석옹의 몸체를 중심으로 상하 항아리 모양의 돌을 3단으로 쌓아올린 형태입니다. 땅 속에 묻힌 석옹 주위에는 건물의 주춧돌과 지대석으로 보이는 잘 다듬어진 석재(石材)가 그대로 남아 있어 원래는 보호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형태의 돌항아리는 다른 지방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저장시설입니다.
● 염화실(拈華室)
염화실(拈華室)
염화실은 대웅전 서쪽에 있는 일련의 건물로서, 선원(禪院)에 부속된 것입니다. 현재 염화실은 법주사의 조실(祖室)이 기거하는 곳입니다. 조실은 선원의 최고 어른으로 스승 역할을 하는 분을 가리킵니다. 직책을 맡고 있지 않더라도 수행이 높고 덕망이 있으며, 연세도 많은 분이 조실이 됩니다.
염화실(拈華室) <참고사진>
염화실은 염화미소에서 나온 말로서 부처님께서 설법을 하다가 연꽃을 들어보였으나, 오직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지었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마음과 마음을 서로 전함, 불경의 글 이외의 가르침 등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 응향각(凝香閣)
응향각(凝香閣)
응향각(凝香閣)은 대웅전 동쪽에 위치하며 대웅전과 그 외 법당을 맡아보는 노전(爐殿)이라는 직책을 맡은 승려가 거처하는 곳입니다.
응향각(凝香閣) <참고사진>
● 선희궁 원당(宣喜宮願堂):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33호
선희궁 원당(宣喜宮願堂)
선희궁 원당(宣喜宮願堂)
대웅보전의 전면 동쪽(오른쪽)에 자리 잡은 자그마한 건물로 조선 21대 왕 영조(英祖)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곳으로, 조성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1765년으로 추정됩니다. 영빈이씨의 위패를 다른 곳으로 모신 후에는 법주사와 관련된 역대 큰스님들의 초상을 모셔둔 ‘조사각(祖師閣)’으로 사용하다가 1990년 대웅보전 서쪽에 진영각(眞影閣)을 따로 갖추면서 지금은 빈 상태입니다. 법주사에서는 ‘구(舊) 조사각’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선희궁 원당(宣喜宮願堂)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심포, 맞배지붕의 작은 건물로 한국 전통의 담장과 솟을삼문을 두어 경내의 다른 건물과 독립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형식은 사당이나 향교, 서원 등에서 사용되는 유교적 건축형식입니다. 옛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어 보존가치가 높습니다.
전면 담장은 와편과 둥근 돌들을 이용해 여러 가지 길상무늬와 별무늬를 장식화 하였습니다. 이는 조선후기 민화풍의 담장 장식이 잘 보존된 예입니다.
● 약사전(藥師殿)
약사전(藥師殿)
법주사 약사전은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안에는 약사여래좌상과 1997년에 조성한 약사후불탱을 봉안하였습니다. 동방의 정유리세계(淨瑜璃世界)를 교화하는 부처님인 약사여래는 보살도를 닦을 때, 열 두 가지의 크고 거룩한 원(願)을 세워서 모든중생들로 하여금 구하는 바를 다 이루게 하여 부처님이 되신 분입니다.
현판
약사전(藥師殿): 정면 3칸, 측면 2칸 주심포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약사여래좌상과 1997년에 조성한 약사후불탱화
약사전 뒷면과 측면
● 석등(石燈: 약사전 앞)
약사전 앞 석등(石燈)
약사전(藥師殿) 앞 석등은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것으로 원형의 하대석 위에 8각의 간주석을 세우고 앙련(仰蓮)이 새겨진 상대석을 얹고 그 위의 실제 사용된 흔적이 있는 금이 간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屋蓋石)을 올렸고 보주(寶珠)를 포함한 상륜부는 근대에 새로 만들어 올린 것으로 보입니다.
●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국보 제5호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국보 제5호
사찰에서의 석등은 일반적으로 등불을 밝히는 실용적인 의미와 함께 부처님의 말씀인 법을 표현한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전파하여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상징적인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은 통일신라시대의 석등(石燈)으로 사자(獅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신라시대 석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신라시대 석조예술품 중 뛰어난 걸작 중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과 함께 통일신라 석등을 대표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
신라시대의 석등은 대개 하대석과 중대석(주로 팔각기둥), 상대석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쌍사자석등은 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양식인 팔각석등에서 팔각기둥이 들어갈 부분을 사자 두 마리로 바꾸어놓은 석등입니다.
화사석, 옥개석과 상륜부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은 8각으로 높직하며, 네 면에만 장방형의 화창(火窓)을 내어 불빛이 새어나오도록 하였습니다. 옥개석은 처마 밑이 수평을 이루다가 여덟 귀퉁이에서 위로 살짝 들려 있습니다. 옥개석 꼭대기에는 연꽃문양이 희미하게 남아있고 그 위에 연꽃 봉오리 모양의 보주(寶珠)가 얹혀있습니다.
상대석(上臺石) <참고사진>
둥그런 상대석 아래 둘레에는 두 단의 팔각받침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 연꽃잎 열여섯장이두 겹으로 피어 올랐습니다. 아래 연꽃잎속에는 반원이 두 줄 새겨졌으며 위 연꽃잎 안에는 구슬무늬가 세 개씩 장식되어 있습니다.
쌍사자석등 하대석(복련), 중대석(쌍사자)과 상대석(앙련)
하대석(下臺石)과 상대석(上臺石)에는 각각 연꽃을 새겼는데, 상대석 주위에는 이중으로 연꽃잎이 조각되어 옛스러움을 풍기고 있습니다. 팔각지대석 위에 올려진 연화하대석과 쌍사자기둥, 연화상대석은 모두 한 돌에 조각되었습니다.
사자상(獅子像) 상세사진 <문화재청참고사진>
사자가 디딤한 하대석은 8각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여 있으며, 쌍사자로 조각한 중대석(中臺石)은 현재 남아있는 사자(獅子)조각들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 머리의 갈기, 다리와 몸의 근육까지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팔각의 지대석은 아래 위에 가는 테를 돌렸고, 사자의 조각은 매우 정교하여 크고 둥그런 눈, 머리의 갈기, 몸체의 근육 등이 마치 살아있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왼쪽 사자는 입을 다물고 있고, 오른쪽 사자는 입을 벌리고 으르릉대고 있습니다.<참고사진>
하대석 옆면에는 연꽃잎 여덟 장을 엎어새겼고 연꽃잎 안에는 다시 꽃 모양이 장식되었습니다. <참고사진>
●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 보물 제15호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 보물 제15호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은 높이 3.9m로 우리나라 석등(石燈)의 정형(定型)이라 할 수 있는 8각주(八角柱)의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 <참고사진>
4개의 사각형 돌로 맞춘 네모진 지대석(地臺石) 위에 놓인 하대석(下臺石)은 면마다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윗부분은 중대석(中臺石)을 사이에 두고 상대석(上臺石)과 대칭되게 연꽃을 조각하였습니다. 불을 밝히는 화사석(火舍石)은 4면에 창(窓)을 두었고, 나머지 4면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신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석등을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옥개석은 여덟 곳의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가 경쾌한 느낌을 줍니다. 각 부분의 양식이 정제되어 있고 조각수법이 우수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을 대표할 작품입니다. 제작시기는 조성양식과 수법으로보아 법주사 초창기인 통일신라 혜공왕(765~780)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천왕석등(四天王石燈) <참고사진>
화사석(火舍石)의 사천왕상 조각과 화창 <참고사진>
화사석(火舍石)은 4면에는 화창(火窓)이 있고 각 창(窓)의 주위에 방형(方形)의 테두리를 돌려 그 안에 작은 못 구멍을 있는데 이것은 창문을 부착시켰던 흔적으로 짐작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4면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였습니다.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채 악귀를 밟고 있는 사천왕은 사실적이고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상대석(上臺石) 앙련문(仰蓮紋) <참고사진>
하대석(下臺石) 복련문(伏蓮紋) <참고사진>
쌍사자석등(雙獅子石燈)과 사천왕상석등(四天王像石燈) <참고사진>
탑(팔상전)과 금당(대웅보전)사이 석등이 두 개(쌍사자석등, 사천왕상석등) 있는 이유는 확인할 수 없지만 쌍사자석등 뒤로 극락전(極樂殿)이 있었으나 1960년 철거되어 그 자리가 비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미륵신앙축(彌勒信仰軸) <참고사진>
사천왕석등은 지금 대웅보전(大雄寶殿) 앞으로 옮겨져 있으나 예전에는 용화보전(龍華寶殿) 앞에 있었고 사천왕석등 앞에는 향로(香爐)를 머리에 인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이, 뒤에는 석연지(石蓮池)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최상의 공양인 향(香)과 등(燈), 차(茶)를 용화보전의 미륵불(彌勒佛) 앞에 드린다는 뜻을 표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915호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915호
대웅보전은 아래층이 정면 7칸, 측면 4칸, 2층의 다포계 팔작지붕집입니다. 3단으로 쌓은 기단 위에 서 있는 2층인 이 건물은 총 120칸,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축물입니다. 바깥에서 보면 2층이지만 안쪽은 아래위층이 한 통으로 틔여있습니다. 정면에는 모두 살문을 달고, 좌우측면의 한칸과 후면 중앙칸에는 따로 문짝을 달아 출입구를 만들었으며, 그 외는 모두 판벽입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사찰 건물이며 2층건물로는 부여 무량사 극락전, 구례 화엄사 각황전, 공주 마곡사 대웅전 등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법주사 대웅보전, 무량사 극락전, 마곡사 대웅전이 모두 충청권에 있고 넓은 평지에 자리잡는 등 여러 공통점을 갖고 있어 아마도 이러한 중층건물이 백제계 건축의 전통일 가능성도 엿보입니다.
대웅보전(大雄寶殿) 현판
대웅보전 앞 보리수나무<참고사진>
귀공포 <참고사진>
처마 <참고사진>
답도(踏道)
기단 한가운데 널찍한 계단을 마련했는데 좌우에 둥글한 소맷돌을 세웠고 가운데 널찍한 돌 석 장을 나란히 하여 계단을 좌우 나누었습니다. 이는 부처님을 연을 태워 내 모시거나 할 때 그 위로 연(輦)이 지나가도록 한 답도(踏道)로 이해됩니다. <답사여행길잡이>
답도(踏道): 계단 소맷돌 위쪽에는 돌원숭이가 한마리씩 앉아 있습니다.
눈을 부라린듯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듯.. 그리 오래된 석물은 아니 것 같습니다.
소맷돌[태극무늬와 넝쿨무늬 그리고 연잎과 연꽃이 새겨져 있습니다.]
소맷돌
대웅보전 내부가구<참고사진>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塑造毘盧遮那三佛坐像): 보물 제1360호 <참고사진>
대웅보전 내부 불단에는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흙으로 빚어진 국내 소조불좌상 (塑造佛坐像)으로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三身佛)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중앙에 봉안한 불상은 법신(法身) 비로자나불상 이고, 좌측에 안치한 불상은 보신(報身)의 노사나불(아미타불)상이며, 우측은 화신(化身)으로 나투신 석가모니불상입니다.
석가모니불상 비로자나불상 노사나불(아미타불)상 <참고사진>
대웅전에 모셔진 부처님은 실내 좌불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불상입니다. 중앙의 비로자나불상은 네모진 얼굴에 건장하면서 굴곡이 없는 평판적인 몸체에 왼손은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지권인의 손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노사나불(아미타불)상은 본존불과 거의 동일한 유형의 불상으로 왼손은 가슴 위치에 올리고 오른손은 배 위치에 두었으며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석가여래상은 비로자나불상, 노사나불상과 체형, 얼굴 모습 등 동일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며, 손모양은 항마촉지인으로, 무릎 위에 올린 오른손 끝이 땅을 향하고 있습니다.
불신(佛身)을 세 종류로 표현하는 삼신설(三身說)에 따르면 법신불(法身佛)은 수행의 결과가 아니라 진리 그 자체를 인격화한 진리불이며, 보신불(報身佛)은 오랜 수행의 과보로 얻어지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부처이며, 화신불(化身佛)은 특정시대와 지역과 상대에 따라 특정한 중생을 구하기 위해 나타나는 부처입니다.
불상 안에 넣어둔 유물들이 대부분 도난당했으나 남아있는 연기문(緣起文)에 의하면, 조선 인조4년(1626)에 조성되었으며, 그 후로부터 121년이 지난 조선 영조23년(1747) 불상에 다시 금칠을 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대웅보전 후불도 (大雄寶殿 後佛圖):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6호
석가모니후불탱화 비로자나후불탱화 <참고사진> 노사나불후불탱화
대웅보전 내에는 모두 7점의 탱화가 있습니다. 이중 비로자나후불탱화는 가로 348cm, 세로 616cm의 색채화로서 내용은 비로자나불이 중앙에 크게 자리잡아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신라시대 전통적인 비로자나인과는 달리 왼손은 오른손이 감싼 모양을 짓고 있는데 고려 후기에 나타나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불상을 중심으로 상하단에 문수, 보현보살, 2성중, 4동자가 있습니다. 노사나후불탱화도 비로자나탱화와 모든 것이 같으나 크기만 가로 210cm, 세로 616cm인 것이 다릅니다. 중앙에 결가부좌의 모습으로 앉아 있으며 두손을 들어 설법인을 짓고 있으며 상하 좌우에 두 보살과 가엽(迦葉), 아란존자(阿難켖者)와 두 성중이 있습니다. 석가여래후불탱화는 노사나후불탱화의 보살 성중 배치 내용의 인물들이 모두 같습니다.
● 명부전(冥府殿)
명부전(冥府殿)
명부전(冥府殿)은 정면 3칸, 측면 3칸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입니다. 지장(地藏)보살과 명부세계의 10대 대왕을 동시에 모시고 있는 전각으로서 일반적으로 지장전(地藏殿)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명부전 현판
명부전(冥府殿)의 주존불상인 지장보살님은 중생이 죽은 후의 고통으로부터 모두를 해방시키겠다는 대원(大願)은 부처님의 뜻과 같다는 의미에서 명부세계(지옥세계)의 구세주로서 이해되어지기도 합니다.
지장(地藏)보살과 명부세계의 10대 대왕
● 삼성각(三聖閣)
삼성각(三聖閣)
삼성각은 산신(山神), 칠성(七星), 독성(獨聖) 등 세분의 신앙대상을 탱화로 모셔놓은 복합 종교건축물입니다. 보통 독성각, 칠성각, 산신각을 따로 지어 각각의 탱화를 모시는게 일반적인 관레이지만 이곳은 한 전각에 같이 모셔져 있습니다. 중국 도교의 칠성, 우리 고유종교의 산신, 불교 고유 신앙 속에서 부처님 제자 중 독성 나반존자를 모신 전각입니다.
삼성각 현판
삼성각(三聖閣) 내부
불단 뒤 벽에는 독성(獨聖), 칠성(七星), 산신(山神)탱화가 걸려 있습니다.
● 진영각(眞影閣)
진영각(眞影閣)
진영각은 고승대덕(高僧大德)의 영정을 봉안한 곳입니다. 대웅보전 동쪽에 위치한 선희궁원당(宣喜宮願堂)에서 법주사의 개산조인 의신(義信)조사로부터 금오(金烏)스님에 이르기까지 고승의 영정을 모시고 있던 것을 1992년 이곳에 새로이 진영각(眞影閣)을 지어서 27분의 영정을 모셨습니다.
진영각 현판
27분의 고승대덕(高僧大德) 영정(影幀)
● 괘불지주(掛佛支柱)
괘불지주(掛佛支柱)
일반적으로 괘불을 걸기 위한 괘불지주(掛佛支柱)는 대웅전 앞에 석조로 한쌍이 서있는데 이곳 법주사에는 진영각(眞影閣) 앞에 최근에 조성한 듯한 괘불지주가 서 있습니다. 법주사의 배치도에는 당간이라고만 표시되어 있습니다.
● 원주실(院主室)
원주실(院主室)
원주실이 범종각 동쪽에 있습니다. '신행상담소'라는 간판이 옆에 함께 붙어 있습니다. 사찰의 원주실은 사찰의 사무를 주재하는 스님이 계신곳을 말합니다.
● 종무소(宗務所)
사찰의 업무를 맡아보는 종무소
● 감로천(甘露泉)
감로천(甘露泉)
● 철확(鐵鑊): 보물 제1413호
철확(鐵鑊): 보물 제1413호
큰 사발(大鉢)의 형상을 한 법주사의 철확(鐵鑊)은 철솥, 쇠솥이라고도 합니다. 신라 성덕왕 때 주조되었다고 전해오며 높이 1.2m, 직경 2,87m, 둘레 10.8m, 두께 10.8cm의 거대한 크기로, 상부의 구연부는 둥글게 처리하였고 기벽(器壁)의 두께는 3∼5㎝ 정도이며 무게는 약 20여 톤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경내 냇가에 인접해 있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주철로 주조된 대형 주물 솥이면서 완벽한 조형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 희소성 등에서 가치가 큰 유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비교적 단순한 구조에, 몸체에는 아무런 문양이나 기록이 주조되지 않아 제조연대, 제작자 및 제조방법 등을 알 수 없지만, 용해온도가 청동보다 훨씬 높은 주철로 주조된 대형의 주물솥이라는 점에서 기술사적 측면에서 귀중한 자료입니다.
솥의 몸체가 반원 모양으로 마치 모자를 뒤집어 놓은 것과도 같은 이 철솥은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커서 한꺼번에 승려 3,000명이 먹을 수 있는 장국을 끓였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승려들이 이 솥을 이용하여 배식하기도 했다고 전해 오기도 합니다.
● 기타
순례기념식수(2010년, 108산사순례기도회)와 평화의불 봉안기념비(2015년, 선묵혜자 스님과 마음으로 찾아가는 108산사순례기도회)
당겨본 속리산 문장대
12:35 / 법주사 답사를 마치고,,
▶ 세조(世祖)길
산책로 세조길 <참고사진>
2016년 9월 개통한 세조길은 세조(世祖)가 요양 차 스승인 신미대사(信眉大師)가 머물던 복천암(福泉庵)으로 순행 왔던 길로, 천년고찰 법주사에서 세심정 간 약 2.5㎞ 구간입니다.
법주사 답사를 마친 후 우측의 세조길을 지나 세심정(洗心亭)까지 트레킹 한 후 되돌아 나와「정이품 소나무」를 향해 계속 걸을 예정입니다.
12:42 / 법주사 어귀 삼거리에서 세조길을 따라 세심정 방면으로 이동합니다.
작은 문장대[문장대 모형]
법주사 템플스테이
12:47
세조의 뉘우침
눈썹바위
상수도 수원지
13:09 / 세조길
13:12 / 달천
세조의 순행길
13:27 / 목욕소(沐浴沼)
목욕소(沐浴沼)
목욕소(沐浴沼)
13:29 / 세조길 계곡의 막바지는 목욕소 아래에서 끝납니다. 다리를 건너면 임도로 세심정까지 길은 이어집니다.
세심정 입구
13:34 / 세심정[소박한 정자(亭子)를 기대했는데 음식점. 실망스럽습니다]
13:38 / 되돌아갑니다.
14:10 / 멀리 수정봉
수원지 반대편
취수탑(?)
14:17 / 세조길
14:24 / 법주사 입구 안내판
산채비빔밥 그릇
14:38 / 조각공원
14:51 / '정이품 소나무'를 향해..
14:57 / 장승
은구석(恩救石)
은구석(恩救石)의 유래
15:01 / 은구석공원
▶ 보은 속리 정이품송 (報恩 俗離 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
15:10 / 보은 속리 정이품송 (報恩 俗離 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
<참고자료사진>
정이품송 (正二品松)
정이품송(正二品松)은 속리산을 대표하는 명품 나무로서 조선 세조로부터 정이품 품계를 받은 소나무입니다. 정이품송은 오랜동안 각종 재해를 입었는데, 특히 1980년대 초 솔잎혹파리의 피해 때문에 대규모 방충망을 설치하기도 했습니다. 이 소나무는 원래 삿갓 또는 우산을 편 모양으로 단정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1993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져 그 모습이 많이 상하였습니다.
정이품송 (正二品松)
정이품송은 나무의 모양이 매우 아름다우며, 크고 오래된 나무이어서 생물학 및 생물유전자원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크고, 임금에게 섬기는 그 시대상을 잘 전해주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등 문화적인 가치 또한 크므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습니다.
15:15
15:19 / 달천
15:30 / 은구석(恩救石) 공원
속리산국립공원 기마순찰대
15:36 / 속리산터미널
16:01 / 속리산터미널 출발시간은 16:20 PM
법주사(法住寺) / 보은(報恩)
(2019.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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