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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산리 고분군(松山里 古墳群)/공주(2018.10.27)

케인스 2018. 11. 8. 22:00



       송산리 고분군(松山里 古墳群) / 공주(公州) 

 


☞ 충청남도(忠淸南) 공주시(公州市) 송산리 고분군(松山里 古墳群)/무령왕릉(武寧王陵)

  


공주시 위치도 <google 참고사진>


송산리 고분군 위치도 <google 참고사진>



                             여행사버스 이용


        - 운영코스: 마곡사(09:30) - 송산리고분군(11:20) - 산성전통시장(12:30) - 원도심투어(14:30) - 공산성(16:00)

        - 오는길: 공주 출발(17:00) ~ 서울도착(20:30)




고분 위치도 <google 참고사진>  

 

 공주송산리고분군(公州宋山里古墳群) 안내판






백제역사유적지(百濟歷史遺跡地區) 안내판







웅진백제역사관 엘리베이터 승하차장 돔(Dome)식 지붕


웅진백제역사관 엘리베이터


                                  웅진백제역사관 시설 안내도





▶  송산리 고분군(松山里 古墳群)/무령왕릉(武寧王陵)



  송산리고분군(宋山里古墳群), 무령왕릉(武寧王陵) 매표소


 세계유산 기념비


송산리고분군(宋山里古墳群): 사적 13호 <참고사진>


백제시대의 왕과 왕족의 무덤으로 높이 130m의 나지막한 구릉인 송산(宋山)에서 이름을 땄기에 예전에는 송산리였지만 지금은 금성동인 이곳에는 구릉 중턱 남쪽 경사면에 동서로 3기과 4기로 나누어져모두 일곱기가 남아있습니다. 동북쪽에 1~4호분,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이 있습니다. 그밖에도 봉분이 분명치 않은 것이 지하에 많아 사적 제13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1~5호분은 굴 모양의 돌로 만든 무덤[굴방식 석실묘]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터널형벽돌로 쌓은 무덤[전축묘]으로 중국 묘제(墓制)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 웅진(熊津)이란 백제시대 공주(公州)시의 이름이고 한글로 쓰면 곰나루 혹은 '고마나루'입니다.




  제22대 문주왕 [474~477년]

     - 475년 10월 / 문주왕 즉위, 웅진으로 천도

     - 476년 4월  / 탐라국(현 제주도)이 방물을 바침 


  제23대 삼근왕 [477~479년]

     - 475년 9월   / 삼근왕 즉위

     - 478년         / 해구 죽임 

     - 479년 11월  / 삼근왕 죽음

  제24대 동성왕 [479~501년]

     - 479년       / 동성왕 즉위

     - 493년 3월 / 신라와 혼인동맹

     - 500년       / 임류각 지음

     - 501년       / 동성왕 백가에 의해 시해

  제25대 무령왕 [501~523년]

     - 501년 12월 / 무령왕 즉위

     - 507년 10월 / 고구려군과 말갈군을 한성에서 격퇴

     - 513년 6월   / 오경박사 단양이를 왜에 파견


  제26대 성 왕 [523~554년]

     - 523년 5월 / 성왕 즉위

     - 538년       / 왜에 불교 전파, 사비로 천도 


         

                             




■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



송산리 고분군 모형전시관 위치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무령왕릉 및 5,6호분을 정밀한 모형으로 재현해 복원한 전시관입니다. 실물 크기와 동일하게 제작하였고, 직접 내부로 들어가 관람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으며 내부에는 무령왕릉의 모형과 함께 출토유물모형, 사이버진열장, 정보검색시스템, 무령왕릉의 축조방법 및 송산리고분군 관련 영상물을 통해 백제의 역사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며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어 살아있는 역사교육이 가능합니다.

<공주시 자료>




바닥에 깔아둔 타일형 석수(石獸: 돌로 만든 동물의 형상)









백제고분의 분포도 <참고사진>

 

무덤축조[무령왕릉 축조과정 미니어처]



  발굴과정



● 송산리 5호분 모형




송산리5호분 모형 <참고사진>


                                                 


 송산리5호분 내부 모형[굴식돌방무덤]


송산리 5호분 (宋山里 5號墳)은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되어 조사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입니다. 널방은 남북 길이 3.45m, 동서 너비 3.26m의 정사각형 모양으로 바닥에서 1.3m 높이까지는 벽면을 수직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쪽부터는 안으로 기울어지게 쌓은 후, 정상부에 판석 1매를 얹어 천장을 돔(Dome) 형태로 둥글게 처리한 것이 특징이며 벽면에는 강회를 발랐습니다. 이것은 한성 시대부터 내려오던 백제식 무덤축조 방식에 따른 것입니다. <백과사전 자료>


  송산리5호분 내부 모형


바닥에는 목관을 올려놓는 관받침대 2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으며, 도굴로 인하여 토기 1점과 약간의 장신구, 그리고 관못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백과사전 자료>


 굴식돌방무덤 단면도(예시) <참고자료>

                                   



● 송산리 6호분[송산리 벽화 고분] 모형



                              송산리6호분 모형 <참고사진>



  6호분 사면을 펼쳐 놓은 모습


 

                                    동쪽 벽면의 청룡                               <참고사진>                           서쪽 벽면의 백호


                                      남쪽 벽면의 주작                          <참고사진>                            북쪽 벽면의 현무


                        송산리 6호분(宋山里 6號墳) 내부 모형<참고사진>


송산리 6호분은 1932년에 우연히 발견된 벽돌무덤[塼築墳]으로 널방의 크기는 남북 길이 3.7m, 동서 너비 2.24m이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는 등감(燈龕)을 설치하였으며, 네 벽면에 진흙과 호분을 바른 위에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四神?)와 동그랗게 표시한 해와 달, 별들이 그려져 있어 '송산리 벽화고분'이라고도 부릅니다.


         송산리6호분 내부 모형<참고사진>


목관을 올려 놓았던 관받침대가 하나인 것으로 보아 한 사람만 묻혔던 것으로 보입니다. 벽돌에 새겨진 명문의 내용을 통해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송산리6호분 내부 모형<참고사진>


송산리6호분은 무령왕릉과 관련지어서 그 전왕인 24대 동성왕릉으로 보기도하고, 그 후대 왕인 26대 성왕릉으로 보기도 합니다.


                                                    

                                                                          벽돌무덤 예시도 <참고자료>




일제강점기 공주 고등보통학교 교사를 하면서 백제사 연구를 한 가루베지온(輕部慈恩)이 1930년대에 촬영한 송산리6호분


                                    동쪽 벽면 청룡                         <참고사진>                              서쪽 벽면 백호


                                    북쪽 벽면 현무                         <참고사진>                                     널길





● 무령왕의 무덤[무령왕릉] 모형



                                  무령왕릉 모형 <참고사진>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의 무덤양식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여 당시 두 나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벽돌무덤 예시도 <참고자료>


무령왕릉의 구조


자연 암반을 파내어 공간을 만든 뒤에 벽돌을 쌓았는데 먼저 입구에서 널방까지 사이에 널길을 만들어 안쪽에 부부를 합장한 방을 꾸며 놓았습니다. 입구에서부터 둥글게 모아지는 궁륭형 천장을 하고있어 벽돌 쌓는 기술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무령왕릉 내부 모형


이 무덤은 왕과 왕비의 합장묘로서 왕비가 무령왕보다 3년 뒤인 526년에 돌아가자 마찬가지로 삼년상을 치르고 이곳에 함께 묻었습니다. 무덤 안에는 왕과 왕비가 입구 쪽인 남쪽에 머리를 두고왕의 관이 동쪽, 왕비의 관이 서쪽에 놓여 있었습니다. 시신은 본래 나무관 안에 있었으나세월이 오래 되면서 관이 무너져 유물들이 많이 흩어진 채로 발견되었고, 시신이나 천은 이미 삭아 없었고 주로 금동제 유물이 남아 있었습니다. <문화유산답사회자료>


 무령왕릉 내부 모형

시신을 안치한 뒤 입구를 벽돌로 막았는데 발굴 도중에 그 가운데에서 '壬辰年作'이라는 글씨가 발견되어 이 무덤이 무령왕 통치기인 512년부터 이미 준비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문화유산답사회자료>


무령왕릉 북쪽 벽 모형


연꽃 모양을 새겨 구운 벽돌은 특히 두 장을 맞대야 한송이가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 특이합니다.  벽면에는 등잔을 올려 놓았던 등감(燈龕)과 창문시설을 설치해 두었습니다.


          




                 

                   유물 발견 위치도


 묘지석(墓誌石)


왕릉 입구에 왕과 왕비의 지석(誌石)이 나란히 있어 이 무덤의 주인공이 무령왕과 왕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묘지석(墓誌石)  <참고사진>


 의 묘지석(墓誌石)은 복제품이지만 진품[공주박물관 소장: 아래 사진 참조]은 국보 제163호 입니다.


                                                              [국립공주박물관 전시자료]

 

 무령왕릉 지석(武寧王陵 誌石), 국보 제163호 


지석은 무덤에 묻힌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일대기를 기록한 돌판을 말합니다. 무령왕릉 지석은 삼국시대 고분 중에서는 유일하게 발견되었는데, 무덤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연도 입구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고 합니다. 이름과 사망일, 안장한 날짜 등이 새겨져있고 토왕, 토백, 토부모에게 땅을 사서 왕릉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공주시 자료>



   무령왕 묘지석(墓誌石) 앞면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참고사진>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은 무령왕 21년(521) 양(梁)나라 고조(高祖)로부터 받은 작호(爵號)로서 양(梁)나라의 무산계(武散階: 무관의 위계제도)의 하나로 정3품직의 장군을 의미합니다. 사마왕(斯麻王)은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무령왕(武寧王)의 이름이 사마로 되어있어 무령왕임을 알 수있습니다.



 무령왕 묘지석(墓誌石) 뒷면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참고사진>


                                     간지도(干支圖) <참고사진>


직선을 음각하고 그 선위에 방향을 가리키는 십간, 십이지를 세 변에 안쪽을 향하여 새기고 서쪽을 가리키는 부분에는 간지(申, 庚, 酉, 辛, 戊)를 쓰지않고 비워두었으며 이부분은 왕릉의 입구 쪽을 향하여 놓여있었습니다. 이것은 무령왕이 산 무덤 부지가 '서쪽 땅'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또한 방위도(方位圖) 또는 능역도(陵域圖)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무령왕의 매지권(買地卷), 앞면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참고사진>



"돈 1만매, 이상 1건
을사년(525년) 8월12일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土王), 토백(土伯), 토부모(土父母) 천상천하 2천석의 여러 관리들에게 문의하여 남서 방향의 토지를 매입하여 능묘를 만들었기에 문서를 작성하여 증명으로 삼으니 율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발굴당시 묘지석 위의 오수전(五銖錢) <kbs 자료사진>


묘지석에는 작은 구멍이 나있는데 이것은 무령왕이 지하 신들에게 묘지(墓地)를 구입하고 지불한 돈 꾸러미를 끼웠던 흔적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실제 발굴시 묘지석 위에는 위 사진과 같이 돈꾸러미[오수전(五銖錢)]가 있었습니다. 오수전(五銖錢)은 고대 중국 한무제(漢武帝) 원수4년(元狩四年 : 서기전 119)에 처음으로 주조한 화폐로 양나라를 비롯한 여러왕조에서 유통되었으며, 질량이 당시 도량형으로 5수(銖)였기 때문에 오수전이라고 불렸습니다.


 무령왕비 묘지석(墓誌石), 뒷면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참고사진>



"병오년(526년) 11월 백제국왕태비가 천명대로 살다 돌아가셨다. 서쪽의 땅에서 (빈전을 설치하여) 삼년상을 지내고 기유년(529년) 2월12일에 다시 대묘로 옮기어 장사지내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발굴 당시 무령왕릉 석수(石獸) <kbs 자료사진>


중국 신화에 나오는 상스러운 동물을 형상화한 석상으로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鎭墓獸)라고 합니다. 무덤이나 궁전 앞에 세워두어 나쁜기운이나 악귀(惡鬼)를 쫓아내는 벽사(僻邪)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석수(石獸), 국보 제162호 [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참고사진>


석수는 묘를 지키는 수호신으로 당시의 부장문화(副葬文化)를 엿볼 수 있는데 네 다리를 가진 이 짐승은 상상의 동물임에도 불구하고 한쪽 다리에 금을 그어, 다리를 부러트렸다고 한다. 달아나거나 도망가지 않고 무덤을 굳건히 지키라는 의미에서입니다. 무령왕릉 석수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석수로, 머리에는 쇠로 만든 뿔이 하나 있고, 몸뚱이 양측면에는 불꽃같은 날개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크기는 높이 30cm, 길이 47cm이며 뭉툭한 입을 한껏 벌리고 있는데, 입술에 붉게 칠한 흔적도 남아 있습니다.




                        발굴 당시 유물들[복제품]



 무령왕비 금제관식[왼쪽]과 무령왕[오른쪽]의 금제관 장식들


 청동거울, 허리띠와 고리장식 칼



                                            [국립공주박물관 전시자료]

 

 

    무령왕 금제관식(武寧王 金製冠飾), 국보 제154호


  금으로 만들어진 한 쌍의 왕관 장식으로, 왕의 머리부분에

  서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얇은 순금판에 인동당초

  무늬와 불꽃무늬를 기본 문양으로 예리한 조각도로 도려내

  었으며, 127개의 달개들을 금실로 꼬아 매달았습니다. 불꽃 

  이 중앙으로 모인 형태로, 올라가면서 타오르는 모양을 하 

  고 있으며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합니다. <공주시 자료>

 

  무령왕비 금제관식(武寧王妃 金製冠飾), 국보 제155호


  왕비의 머리부분에서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으며 왕의 것과 마

  찬가지로 금판을 오려내어 인동당초무늬와 불꽃무늬로 장식

  하였습니다. 좌우 대칭구도로 되어 있다는 점과 둥근 달개가

  매달려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차이를 보이며, 왕의 관 장식보다

  규모가 조금 작고 간결한 인상을 줍니다. <공주시 자료>


 

  

             무령왕 금제귀걸이, 국보156호 <참고사진>


  하나의 중심고리에 작은 고리 2개를 연결고리로 하여 두 줄의

  귀걸이를 매달았습니다.

 

             무령왕비 금제귀걸이, 국보157호 <참고사진>


  2쌍의 귀걸이는 굵은 고리를 중심으로 작은 장식이 연결되어

  왕의 귀걸이에 비해 간결합니다. 귀걸이 길이: 11.8㎝와 8.8㎝.


              

               무령왕 금제뒤꽂이, 국보159호 <참고사진>


  왕의 머리에 꽂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몸체부와 꽂이부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전체모양은 날개를 펴고 나는 새의 모습과

  사하며, 아래쪽 꽂이부는 세 개의 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금속판을 형틀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리는 타출기법으로

  무늬나 모양을 나타내었습니다.


 

                무령왕비 목걸이, 국보158호 <참고사진>

          [금제아홉마디목걸이 / 금제일곱마디목걸이]


  왕비의 목걸이로 9개, 7개의 특이한 고리로 연결하여 만들었으

  며 길이는 각각 16㎝, 14㎝입니다.

  

                  무령왕 허리띠 장식 2벌 <참고사진>


2벌 모두 금과 은을 사용하여 만들었으며, 1벌은 띠고리와 띠끝장식, 과판, 드리개 등으로, 다른 1벌은 띠고리와 과판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무령왕비 은제팔찌, 국보160호 <참고사진>


  왕비의 왼쪽 팔 부근에서 발견된 한쌍의 은제팔찌로 바깥지름

  8cm, 고리지름 1.1cm입니다.팔찌의 안쪽에 '다리(多利)라는 장

  인이 왕비를 위해 팔찌를 만들었다' 는 기록이 남아있어 역사

  적 가치가 큽니다.

                                                                                  

 

                                무령왕 금동신발 <참고사진>

 

                                무령왕비 금동신발 <참고사진>


  왕의 신발과 크기나 모양이 비슷하지만 무늬가 서로 다릅니

  다. 안쪽, 바깥쪽, 바닥의 3판이 서로 붙어 있으며 바닥은 네모

  뿔 모양의 못이 박혀 있습니다.


 

                       왕 나무머리받침 <참고사진>


  왕의 머리를 올려 놓도록 큰 나무 토막의 중간부분을 U자형으

  로 만들었습니다.

 

           왕비 나무머리받침, 국보 제164호 <참고사진>


  왕비의 머리를 올려놓도록 큰 나무 토막의 중간부분을 U자형

  으로 만들었습니다. 봉황 두 마리가 좌우로 앉아있습니다.


             왕 나무발받침, 국보 제165호 <참고사진>


  왕의 두 발목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발 받침의 중간부분을

  W자형으로 만들었습니다.

 

                                 왕비 나무발받침 <참고사진>


  왕비의 두 발목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발 받침의 중간부분을

  W자형으로 만들었습니다.


        

      환두대두/용봉무늬자루큰칼, 길이 82cm <참고사진>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둥근 고리 장식을 한 칼자루로 고리에

  는 왕을 상징하는 용과 봉황무늬가 있으며 거북등 무늬, 인동

  무늬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섬세한 무늬를 나타낼때 금속바탕

  에 가는 금선이나 금알갱이를 붙여 사용하는 누금기법을 사용

  하였습니다.


 

       청동거울 일괄(銅鏡一括), 국보 161호 <참고사진>


   (좌) 수대문경(獸帶文鏡): 길이 18.1cm

   (중) 방격규구 신수문경(方格規矩 神獸文鏡): 길이 17.8cm
   (우) 의자손명 수대문경(宜子孫銘 獸帶文鏡): 길이 23.2cm


                           오수전(五銖錢) <참고사진>


  무령왕과 왕비가 묻힐 땅을 구입한 돈으로 묘지석 위에  523년

  양나라에서 발행한 90여개의 오수전(五銖錢)이 놓여 있었습니

  다. 중국과의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철제 오수전은 중

  국 한대(漢代)에 발행되어 수대(隋代)까지 900여년간 사용되었

  습니다.  초기에는 동(銅)으로 만들었으나 양무제(梁武帝)4년

  (523)에는 철(鐵)로 만들었습니다.


 

                       동탁은잔(銅托銀盞) <참고사진>


  무령왕비의 머리 부근에 놓여 있었으며 은으로 만든 잔과 뚜껑

  그리고 동으로 만든 받침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동탁은잔(銅

  托銀盞)에는 산과 계곡, 구름, 연꽃과 고사리, 신선, 용의 얼굴

  에 동물의 몸을 지닌 인면조신(人面鳥身)을 새겨 왕비의 극락

  왕생(極樂往生)을 기원하였습니다.


 

                        목재관(木材棺) <참고사진>


  무령왕과 왕비의 목재관은 일본에서 자생하는 금송(금송)으로 

  만든 것으로 보아 일본과 빈번한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

  니다.


 

                              동제수저 <참고사진>


  숟가락 손잡이 부분이 넓은 편이며, 젓가락에 고리를 만들어

  끈으로 묶을 수 있게한 것도 있습니다.





송산리고분군 모형전시관 출구



■ 송산리 고분군(松山里 古墳群)




 송산리 고분군(松山里 古墳群)





 송산리고분군



송산리 6호분(松山里 6號墳)



 송산리 6호분(松山里 6號墳)




                                           



송산리 5호분(松山里 5號墳)



 송산리 5호분(松山里 5號墳)


                                      



● 무령왕릉(武寧王陵)



 무령왕릉(武寧王陵)



 무령왕릉(武寧王陵)


1971년 7월5일 공주시 송산리고분군 안에서 역사적인 발견이 이루어졌습니다. 송산리 6호 무덤의 배수로 공사 도중 벽돌이 눈에 띄면서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무덤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무덤에서 무덤의 주인을 알려 주는 묘지석이 발견되었고 이를 근거로 이곳이 백제 제25대 왕인 무령왕(武寧王)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확인 되었으며, 이 묘지석의 발견으로 무령왕릉은 우리나라 삼국시대 무덤 가운데 유일하게 그 주인을 알 수 있는 왕릉이 되었습니다. 무령왕릉은 벽돌을 쌓아 만든 전축분(塼築墳)으로, 벽돌에는 주로 연꽃 문양이 새겨져 있다. 무덤 안에서는 왕과 왕비를 안장한 2개의 나무 관과 함께 금으로 만든 관장식(冠裝飾), 자루에 용.봉황 무늬를 장식한 큰 칼, 안쪽에 만든 장인의 이름(多利)과 만든 경위가 새겨진 은팔찌 등 모두 108종 4,687점이라는 많은 양의 부장품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부장품들 중에 17점이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귀고리를 비롯한 금속 공예품의 정교한 제작기술에서 고구려.신라와 구분되는 백제 문화의 독창성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중국 도자기는 중국 남조 계통의 벽돌무덤 양식과 함께 무령왕이 중국과 활발한 교류를 통해 선진 문물을 수용했음을 말해주는 증거로, 백제의 국제적 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주박물관 자료>




                 무령왕릉 내부 <참고사진>



송산리 제1~4호분(松山里 第1~4號墳)






 송산리 제1~4호분(松山里 第1~4號墳)





■ 기타



 쉼터


 매표소


무령왕 소개 안내판



  


  


  


      <무령왕 소개 안내판>












       송산리 고분군(松山里 古墳群) / 공주(公州) 

                           (2018.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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