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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北京) - 사직(社稷)/경관(景觀) 1

케인스 2014. 4. 4. 16:10

 

 

                               사직(社稷)

 

 

 

                          중국 북경(北京) / 사직(社稷)의 경관(景觀) 1

 

 

사직(社稷)의 건축물(建築物)

 

 

사직(社稷) 원래의 주요 건축물

 

 

                        사직(社稷) 원래의 주요 건축물 위치 <google자료사진>

 

사직(社稷) 내에있는 전체 건축물 중 원래의 고유 건축물은 내부 중심에 있는 사직단(社稷壇)과 주체건축인 배전(拜殿)과 부속건축인 극문(戟門), 신주(神廚), 신고(神庫), 재생정(宰牲亭), 정정(井亭)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사직단(社稷壇)

 

 

                                      사직단(社稷壇) 위치도 <자료사진>

 

                 사직단(社稷壇) <참고사진>

 

고대 중국에서는 하늘은 양(陽)을 의미하며 남쪽을 상징하며, 땅은 음(陰)으로 북쪽을 상징하므로 사(社)는 토지를 의미하기에 음에 속하므로, 사직단(社稷壇)내의 주요건축물의 격은 남쪽이 상(上)으로 조성되었습니다.

 

                   사직단(社稷壇) <참고사진>

 

배전(拜殿)의 남쪽에 위치한 사직단(社稷壇)은 고대의 제도를 엄격하게 따라 세웠습니다. 정방형 형태로 3층의 한백옥(漢白玉) 석대(石臺)를 쌓았는데, 상층의 변의 길이는 15m, 중간층은 약 16.8m, 하층은 17.8m에 이르며, 한백옥(漢白玉)의 4개의 계단이 각 변에 조성되어 있습니다.

 

                            <참고사진>

 

              정방형의 단(壇)은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짐) 설(說)의 땅이 네모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사직단(社稷壇) <참고사진>

 

0.96m 높이의 단상(壇上)에는 전국 각지에서 가져온 오색토(五色土)를 깔고 다져놓음으로 “普天之下,莫非王土 (천하의 토지는 모두 천자의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중국에는 황화유역의 황토와, 사천성 서쪽 지역의 붉은 흙, 동북지방의 검은 흙. 청색 흙이 나오는 북쪽지역, 백토가 나오는 동남지역이 있습니다.

 

                        

                    <참고사진>

 

매년 봄 가을 2번 새흙을 깐 후 제사를 지냈는데, 명(明) 홍치5년(1492) 단(壇)에 二寸四分을 깔던 것을 一寸만 까는 것으로 변경한 후 계속 이 제도를 따랐습니다. 

  

                                        

                                          <참고자료>

 

오색토(五色土)는 중황(中黄: 중앙은 황색), 동청(東青: 동쪽은 청색), 서백(西白: 서쪽은 백색), 남홍(南紅: 남쪽은 홍색), 북흑(北黑: 북쪽은 흑색) 색으로 깔았으며, 오색(五色)은 만물의 기본인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의 오행(五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참고자료>

 

고대 중국인들은 세계를 동, 서, 남, 북과 중앙의 다섯 방위 그리고 물(水) 나무(木) 불(火) 금(金) 흙(土)이 물질의 기본 구성인 오행(五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금속은 흰색이며, 나무는 옅은 녹색이며, 깊은 물은 검정색이며, 불은 붉은색이며, 흙은 황색으로 물질의 오행은 5가지 색깔과 일치한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흰색, 청색, 흙색, 붉은색. 녹색의 5가지 색깔과 금, 화, 수, 목, 토의 조화는 만물을 만드는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사주석(社主石) <참고사진>

 

오색토(五色土)를 깐 단(壇) 중앙에는 네모난 돌기둥을 놓았는데 이것을 “사주석(社柱石)” 또는 “강산석(江山石)”이라고 하며 이는 “강산영고(江山永固: 강산은 오래도록 단단하고 평온함)”를 상징합니다. 이 석주(石柱)의 반은 흙에 묻혀있었는데, 후에 머리부분만 제외하고 전부 묻히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원래 사신(社神)과 직신(稷神)을 대표하여 제(祭)를 받는 석주(石柱)와 목주(木柱)를 중앙의 황색 흙 가운데 세웠지만, 후에 사주석(社主石) 하나로 바꾸었습니다. 

               

                  단담(壇墻) <참고사진>

 

단의 사방에는 유(壝)라고 칭하는 청, 홍, 백, 흑 4색의 유리벽돌 담이 있습니다. 이 사직단(社稷壇) 담(墻)의 길이는 62m, 높이 1.7m이며, 4면의 중앙에는 각각 영성문(靈星門) 이라고 하는 한백옥(漢白玉) 문(門)이 1개씩 설치되어 있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영성문(靈星門)  <참고사진>

 

                  단담(壇墻)의 방위색 <참고사진>

 

단담(壇墻)은 4방위색인 동쪽의 청색, 서쪽의 백색, 남쪽의 홍색, 북쪽의 흑색 유리벽돌로 쌓아 단상(壇上)의 오색토(五色土)와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 배전(拜殿)

 

 

                                      배전(拜殿) 위치도 <자료사진>

 

                      배전(拜殿) <참고사진>

 

배전(拜殿)은 사직단(社稷壇)의 북쪽, 극문(戟門)의 남쪽에 위치하며 향전(享殿)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명대(明代)에 최초로 세워졌으며 정면 5칸, 측면3칸의 황유리기와지붕 건물로 단청은 금용채화(金龍彩畵)로 장식되어 있고 기단의 높이는 0.87m, 건축면적은 950.4㎡입니다.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참고사진>

 

배전(拜殿)은 제사를 지내는 날에 비와 바람이 있을 경우에 야외인 사직단(社稷壇)에서가 아니라 이곳 실내(室內)에서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 세웠습니다. 후에는 자연히 황제가 이곳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명대(明代) 이전의 역대 사직단(社稷壇)에는 배전(拜殿)을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이 나쁜 날씨로 인해 황제(皇帝)로서의 위엄(威嚴)을 갖추지 못할까봐 배전(拜殿)을 세우도록 하였습니다.

 

                 배전(拜殿) <참고사진>

 

『북경고건축(北京古建筑)』이란 사료(史料) 에는 "훼손되거나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북경에서 현존하는 명대(明代) 건축 중 최고로 오래된 것 중의 하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로 인해 「중점문물보호건축(重点文物保護建筑)」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배전(拜殿)/중산당(中山堂) <참고사진>

 

1925년 중산(中山) 손문(孫文)선생이 서거하였을 때 이곳에 잠시 시신을 안치하고 각계인사들이 추도하였는데 이후 그의 생전활동을 기념하는 취지에서1928년 배전(拜殿)을 중산당(中山堂)으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배전(拜殿)/중산당(中山堂) <참고사진>

 

1949년 중국이 수립되자 모택동(毛澤東), 류소기(劉少奇), 주은해(周恩來), 주덕(朱德), 등소평(鄧小平) 등의 신중국 영도자들이 이곳에서 큰 행사 활동을 벌렸던 곳이기도 합니다. 현재는 매년 3월12일과 11월12일 각계인사들이 참석하여 손문(孫文)선생 탄신 기념행사와 기일제사를 행하고 있습니다.

 

                                                       중산당(中山堂) 현판 <참고사진>

 

                                                   배전(拜殿)의 건물에 중산당(中山堂)의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배전(拜殿) 지붕 위의 잡상(雜像) <참고사진>

 

                         배전(拜殿) 내부 <참고사진>

 

                              실내에는 금용(金龍) 채화(彩畵)가 그려져 있으며, 실외에도 채화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중산당(中山堂) 내부 모습 <참고사진>

 

                          현재 중산당(中山堂) 내부에는 손문(孫文)선생의 상(像)과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배전(拜殿)의 뒷면과 극문(戟門) <참고사진>

 

                             배전(拜殿)의 전면과 극문(戟門)의 후면은 약 1m 높이의 기단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 극문(戟門)

 

 

                                               극문(戟門) 위치도 <자료사진>

 

                         극문(戟門) <참고사진>

 

사직단(社稷壇) 내 최북단에는 명대(明代)에 건설한 극문(戟門)이 위치하며, 정면5칸, 황유리기와지붕의 건물입니다. 원래는 중앙에 3문(門) 형식을 따랐으며, 세개의 문에는 각각 크고 작은 철극(鐵戟) 24자루씩 모두 72기의 도금된 철극(鐵戟)이 목가(木架)에 안치되어있었는데, 머리부분은 금빛으로, 자루부분은 은빛으로 칠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청(淸) 광서26년(1900) 8국 연합군이 입경할 때 전부 탈취되어 없어졌습니다.

 

                    

                 극문(戟門)의 북쪽면 <참고사진>

 

극문(戟門)은 1916년에 3문(門)은 5문(門)으로 개수되었습니다. 실내의 주(主) 기둥에는 금색의 용(龍)그림과 여러 채색된 그림으로 장식되어있습니다.

 

                             <참고사진>

 

1942년 극문(戟門)을 전영장(前營將)으로 고치고, 후에는 혁명도서관으로, 지금은 전국정치협상회의(全國政治協商會議: 정협) 회의청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 신주(神廚)와 신고(神庫)

 

                      

                                              신주(神廚)와 신고(神庫) 위치도 <자료사진>

 

                  신고(神庫)와 신주(神廚) <참고사진>

 

사직단, 향전, 극문을 제외하고 사직단(社稷壇)의 담장 내에는 신주(神廚)와 신고(神庫)가 동향(東向)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각 5칸의 건물이 0.36m의 기단 위에 남북으로 병렬로 위치하고 있습니다. 남쪽에 있는 건물이 신고(神庫), 북쪽의 건물이 신주(神廚)이며 황유리기와지붕 건물입니다. 두 건물 사이에는 복도가 조성되어있습니다.

 

                    

                 신고(神庫)와 신주(神廚) <참고사진>

 

신고(神庫)는 태사(太社), 태직(太稷) 신(神)의 위패(位牌)와 위패를 안치하는 신감(神龕) 그리고 제기(祭器) 등의 제사에 관련되는 물품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제사 때가 되면 위패, 제기, 안탁(案卓) 등을 내어 오색토단(五色土壇) 위에 진설하고 제사가 끝나면 원래의 자리에 보관합니다. 신주(神廚)는 제사 음식을 만드는 곳이며, 음식을 만드는데 필요한 부엌용구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 재생정(宰牲亭)과 고정(古井)

 

 

                                               재생정(宰牲亭)과 고정(古井) 위치도 <자료사진>

 

                                 재생정(宰牲亭) <참고사진>

 

재생정(宰牲亭)은 명(明) 영락18년(1420)에 세웠으며, 제사를 지낼 때 희생(犧牲)을 도살하는 곳으로 타생정(打牲亭)이라고도 불렀습니다. 건축면적은 143.7㎡이며 2중처마 황유리기와 방형(方形)의 사각지붕 건물로 매변은 3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재생정(宰牲亭)과 북쪽 담장의 문(門) <참고사진>

 

명청(明淸)시기 재생정(宰牲亭)은사직단(社稷壇)의 내담(內墻)과 연접해 있었지만 북쪽, 서쪽, 남쪽에는 낮은 담장이 있었으며, 현재는 북쪽 담장의 문(門)만 남아있습니다.

 

                    

                  재생정(宰牲亭) <참고사진>

 

재생정(宰牲亭)  남쪽에는 봉사서(奉祀署)에서 이용하는 방(房)이 있었는데, 동쪽과 서쪽에는 각3칸의 방이 있었는데 재생정(宰牲亭) 주위 담과 봉사서(奉祀署) 방은 1914년 공원이 들어서며 없어졌습니다.

 

                  

                재생정(宰牲亭)의 고정(古井) <참고사진>

 

동남쪽에는 명(明) 영락18년(1420)에 만들어진  6방형(六方形)의 고정(古井: 우물)이 1구(口)가 있습니다. 현재 우물에는 그 터와 청백석(靑白石) 덮개가 있는 우물 입구만 남아 있습니다.  원래는 제사를 지낼 때 제수(祭需)를 청결하게 씻고 장만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공문(門) 위치도 <자료사진>

 

서쪽 담장에 공문(門)이 하나 있습니다. 이 문을 통해서 내담(內墻) 내의 신고(神庫), 신주(神廚)와 내담(內墻) 밖의 재생정(宰牲亭)을 서로 오갈 수 있었습니다.

 

                     재생정(宰牲亭)과 사직단 내부와 통하는 내담(內墻)의 공문(門) <참고사진>

 

 

● 사직(社稷)의 문(門)

 

 

                    

                  사직(社稷)의 문(門) <google자료사진>

 

원래는 사직(社稷)에 세개의 문만 있었으며, 이것은 태묘의 세개의 문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세개의 문은 첫째 천안문(天安門)과 단문(端門) 사이에 있는 사직가문(社稷街門)으로 이 문이 사직(社稷)의 정문(正門)입니다. 그리고 단문(端門)과 오문(午門) 사이에 있는 사직좌문(社稷左門)과 오문(午門) 서쪽의 궐우문(闕右門) 뒤에 있는 동북각문(東北角門)이 그것입니다.

 

 

사직가문(社稷街門)

 

 

                 사직가문(社稷街門) <참고사진>

 

사직가문(社稷街門)은 천안문(天安門)과 단문(端門) 사이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정면5칸, 측면3칸의 황유리기와 지붕의 동향(東向) 건물입니다.

 

                  사직가문(社稷街門) 뒷면 <참고사진>

 

사직가문(社稷街門)은 황제(皇帝)가 사직(社稷)의 제사를 위해 입장하는 사직(社稷)의 정문(正門) 입니다.

 

 

사직좌문(社稷左門)

 

 

                 사직좌문(社稷左門) <참고사진>

 

사직좌문(社稷左門)은 단문(端門)과 오문(午門) 사이에 위치하는 정면3칸, 측면1칸의 황유리기와지붕 건물입니다.

 

                 사직좌문(社稷左門) 뒷면 <참고사진>

 

 

서북각문(西北角門)

 

 

                  서북각문(西北角門) <참고사진>

 

오문(午門) 서쪽의 궐우문(闕右門) 뒤에 있는 사직(社稷)의 서북각문(西北角門)은 원래 황유리기와지붕의 3좌문 형태였으나 개건하면서 원래의 모습을 잃었습니다.

 

 

● 사직단(社稷壇) 내담(內墻)의 문(門)

 

 

                       

                    사직단(社稷壇) 내담(內墻) <google자료사진>

 

                                                <자료사진>

 

사직(社稷)의 중심이 되는 주체건축물은 사직단(社稷壇)으로 사방에는 이중의 담장이 있습니다. 사직단의 내담은 남북 길이가 266.8m, 동서 폭은 205.6m로 홍색의 담에 황유리기와를 얹었습니다. 4면의 벽 중앙에 문을 내었는데, 북쪽의 문인 북단문(北壇門)이 주문(主門)입니다. 고대에 하늘은 양(陽)을 의미하며 남쪽을 상징하고, 땅은 음(陰)을 의미하여 북쪽을 상징하므로 사(社)는 토지(土地)이기에 음에 속하여 사직단(社稷壇)의 주문(主門)이 남쪽이 아닌 북쪽에 위치합니다.

 

 

북단문(北壇門)

 

 

                    북단문(北壇門) <참고사진>

 

사직단(社稷壇)의 주문(主門)인 북단문(北壇門)은 전석(塼石)으로 이루어진 삼좌문(三座門) 형태입니다. 황유리기와 팔작지붕으로 면의 길이 20m, 폭 7m 입니다.

 

                 북단문(北壇門) <참고사진>

 

 

단문(東壇門)

 

 

                  동단문(東壇門) <참고사진>

 

동단문(東壇門)은 황유리기와 팔작지붕의 건물로 면의 길이 12m, 폭 7m 입니다.

 

 

서단문(西壇門)

 

 

                  서단문(西壇門) <참고사진>

 

단문(西壇門)은 황유리기와 팔작지붕의 건물로 면의 길이 12m, 폭 7m 입니다.

 

 

남단문(南壇門)

 

 

                  남단문(南壇門) <참고사진>

 

남단문(南壇門)은 황유리기와 팔작지붕의 건물로 면의 길이 12m, 폭 7m 입니다. 남단문(南壇門) 앞에 놓인 한 쌍의 돌사자는 원래는 이곳에 없었으며, 송나라의 유물로 대명현(大明縣: 하북성에 있음)의 한 고찰에서 발굴되어 이곳으로 온 것입니다.

 

                   

                   남단문(南壇門) 앞에 놓인 한 쌍의 석사(石獅) <참고사진>

 

 

● 황제의 동선(動線)

 

 

 

황제(皇帝)가 사직(社稷)의 제사를 위해 사직단(社稷壇)으로 가는 공식적인 길은 궁을 출발하여 오문(午門)을 통과한 후 남쪽의 단문(端門)을 지나 사직(社稷)의 정문(正門) 사직가문(社稷街門)에 이르게 됩니다. 사직가문(社稷街門)으로 사직(社稷)에 입장한 후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려 북쪽으로 진행합니다. 긴 도로를 지나 최종적으로 서북각문(西北角門) 내의 저개문(這個門)에 이르게 됩니다. 저개문(這個門)을 지나 최종적으로 사직단(社稷壇)의 주문(主門)인 북단문(北端門)에 도착하여 사직단(社稷壇) 내로 들어가 제사를 지내게 됩니다.

 

 

 서북각문(西北角門) 입구의 월호문(月壺門)

   

 

                      월호문(月壺門) <참고사진>

 

                                           월호문(月壺門) 위치도 <자료사진>

 

 

 

                    중국 북경(北京) / 사직(社稷)의 경관(景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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