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악산/인왕산-서울성곽(10.12.12)
▶ 말바위안내소~창의문안내소 : 2.2km (1시간30분 소요)
북악산/서울성곽(말바위안내소~창의문안내소) 코스
서울성곽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으로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문화재청>
▶ 말바위안내소 가는 길
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 출구 바로 앞에서 지선(초록)버스 종로02번 환승 성균관대후문/와룡공원입구 정거장 하차 후 와룡공원에서 서울성곽 따라 약 20분 걸으면 말바위 안내소. 이곳에서 신청서 작성하고 신분증명서 대조 후 탐방 패찰을 주면 목에 걸고 탐방 후 창의문 안내소에 반납한다.
▶ 참고사진
성균관대후문/와룡공원입구 정거장 하차 후 와룡공원 가는 길 / 09:24
진행 방향(와룡공원에서 성곽따라) / 09:26
개방시간 참고하시고 신분증 필히 지참하여야 합니다.
와룡공원 쪽으로 이어지는 성곽 / 09:29
말바위 안내소(쉼터) 오르는 길 / 09:30
성곽따라 말바위 안내소로../ 09:34
09:37
09:38
眺望 '성북동 주택단지' / 09:41
眺望 북악스카이웨이의 ‘북악팔각정’ 과 아래쪽의 삼청각/ 09:42
왼쪽으로.. / 09:42
09:43
와룡공원에서 100m지점 / 09:44
말바위 안내소(동절기 10시 개방) / 09:49
말바위 <참고 사진>
조선시대에 말을 이용한 문무백관이 시를 읊고 녹음을 만끽하며 가장 많이 쉬던 자리라 하여 말(馬)바위라 불리기도 하고, 백악(북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末)바위라는 설도 있다.
당겨서 본 ‘북악팔각정’ 과 '보현봉' / 0957
말바위 안내소에 이르는 성곽 / 09:58
'북악산 서울성곽 탐방' 출입 신청서 및 부여 받은 표찰 <참고 사진>
숙정문(肅靖門) / 10:28
숙정문은 서울 성곽의 북대문(北大門)으로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예를 숭상함)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태조5년(1396) 처음 서울 성곽을 쌓을 때는 지금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으나 연산군10년(1504)에 성곽을 보수하면서 옮겨졌다고 한다. 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서울성곽 동서남북에 4대문의 격식을 갖추기 위하여, 그리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평소에는 닫아 두었기 때문에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 길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는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아 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태종16년(1416)에 기우절목(祈雨節目:기우제 시행규칙)을 만들면서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이라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처럼 숙정문 지역은 풍수지리적으로 음기가 강한 곳이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홍석모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災厄)을 면할 수 있다"는 풍속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라는 저서에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 여자들이 음란해지므로 항시 문을 닫아두게 했다."는 다른 속설을 전하고 있다. 숙정문은 오랫동안 문루가 없어 월단(月團:무지개 모양의 석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북악산 일대 서울 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문화재청>
1. 숙정문(북대문). 2. 혜화문. 3. 흥인지문(동대문). 4. 광희문. 5. 숭례문(남대문).
6. 소의문. 7. 돈의문(서대문). 8. 창의문. 9. 경복궁. 10. 경희궁. 11. 창덕궁.
12. 창경궁.
숙정문(肅靖門) 은 서울성곽을 이루는 사대문(四大門) 가운데 하나로, 도성의 북쪽 대문이다. 1396년(태조 5) 9월 도성의 나머지 삼대문과 사소문(四小門)이 준공될 때 함께 세워졌다. 원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으로 도성 북쪽에 있는 대문이라 하여 북대문, 북문 등으로도 부른다. 16세기 초반 지금의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숙정문 옆 성곽
홍예문 외부
홍예문 내부
성 안쪽에서 보는 숙정문
아치 형태의 홍예문 위에 있는 목조 누각 건물은 소실되었던 것을 고증을 거쳐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1968년 1·21사태 이후 청와대 경비를 위해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다가, 2006년 4월부터 서쪽 성곽 0.5㎞, 북쪽의 진입로 0.6㎞ 구간과 함께 다시 일반에 개방하였다. 1963년 1월21일 서울성곽에 포함되어 사적 제10호로 지정되었다.
숙정문 누각(樓閣) / 10:31
뒤 돌아본 숙정문 / 10:32
촛대바위 / 10:37
청운대 쪽에서 바라보면 촛대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하며, 높이는 약 13M이다.
촛대바위
오래된 성곽 / 10:38
眺望 남산(목멱산)과 서울 시내 / 10:42
眺望 북악산과 인왕산 / 10:42
10:43
북한산 비봉능선 / 10:44
정교하게 짜여진 성벽 / 10:46
왼쪽은 숙종 오른쪽의 성벽은 태조 때 쌓은것으로 보인다. / 10:49
성곽의 시대별 축조 기법
청운대(靑雲臺:293m) 표지석 / 10:50
'푸른 구름이 머무는 곳'이라는 뜻의 청운대는 북한산의 백운대와 서로 상응토록 이름지어 졌다 한다.
眺望 서울 시내 / 10:52
당겨 본 경복궁 일대 / 10:52
성벽에 새겨진 글자 / 10:53
공사 실명제
성벽에 새겨진 글자들은 공사 구역 표시, 공사 담당 군현, 공사 일자,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이라고 한다. ‘嘉慶 九年 甲子 十月 日 牌將 吳再敏 監官 李東翰 邊首 龍聖輝(가경 9년(1804) 갑자 10월 일 패장 오재민 감관 이동한 변수 용성휘)’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패장은 일 전체를 책임지는 관리이고, 감관은 감독관이며 변수는 기술자이다.
1.21사태 소나무 / 10:55
1.21사태 소나무
백악산(白岳山:342m) 표지석 / 10:59
북악산은 서울의 주산(主山)으로 일명 백악(白岳), 면악(面岳), 공극산(拱極山)이라고도 했으며, 경복궁 뒤쪽에 위치하고 남산과 대칭하여 북쪽에 있다하여 북악이라고 한다. 모습이 탐스럽고 날씬하여 죽순같이 솟아오른 산 또한 벌어지기 직전의 모란꽃 봉우리로 비유되기도 하였다.
북악산 복원 표지석
眺望 부암동 방향 / 11:00
眺望 서울 시내 / 11:01
眺望 인왕산 / 11:01
眺望 보현봉, 문수봉, 나한봉 / 11:01
창의문안내소 방향으로 하산 / 11:04
眺望 비봉능선 / 11:08
창의문(彰義門) / 11:30
서울 성곽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四大門), 그 사이에 4소문(四小門)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북소문(北小門)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 는 뜻이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이며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창의문(彰義門)을 속칭 자하문(紫霞門)이라 했는데 이는 창의문이 자핫골(지금의 청운동)에 있으므로 해서 생긴 속칭이라 한다. 청운동 일대는 골이 깊으며 수석이 맑고 아름다워서 개성의 자하동과 같다고 하여 자핫골이라 하였다.
태종13년(1413)에는 풍수학자 최양선(崔揚善)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 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건의 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시켰다고 한다.
세종4년(1422)에는 군인들의 출입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9년(1617)에는 궁궐 보수 작업 때 석재의 운반을 위하여 열어주도록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던 것 같다.
창의문 밑의 박석
수백 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창의문이 서울 성곽의 문루로서 제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영조17년(1741) 이곳을 수축할 때였다. 당시 훈련대장 구성임(具星任)이 "창의문은 인조반정(1623년) 때 의군(義軍)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 것" 이라고 건의 한 것이 받아들여져 비로소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66년 창의문 보수공사 때 천정 부재에서 묵서로 된 기록으로 확인 되었다.
문루 바깥쪽에 설치된 한 쌍의 누혈(漏穴) 장식
빗물이 잘 흘러 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으로 설치된 한 쌍의 누혈(漏穴) 장식은 연잎 모양으로 맵시있게 조각되어 있다.
<참고사진>
성문의 무지개 모양 월단(월단:아치모양) 맨 위에는 봉황 한 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그린 것으로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참고사진>
성문 천장 위의 그림에도 위와 마찬가지의 의미를 느끼게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창의문 문루(門樓)
창의문 문루 내부
창의문 문루 내부에는 인조반정 때 공신들의 이름을 새겨놓은 현판이 걸려있다.
▶ 창의문안내소~인왕산~창의문안내소 : 약 2.5km (1시간 25분 소요)
▶ 참고사진
인왕산 가는 길의 윤동주 시인의 언덕 / 11:41
윤동주 시인의 언덕 / 11:42
윤동주 시비(詩碑) / 11:42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11.20 尹 東 株
윤동주 시인의 언덕 아래 서시정(序詩亭) / 11:42
11:43
창의문 300m 지점 / 11:43
인왕산 등산로 입구 / 11:47
철문 안으로.. / 11:47
인왕산을 오르며 바라본 북악산 / 11:55
11:55
眺望 인왕산 정상 / 12:04
眺望 북한산 보현봉 / 12:06
眺望 북악산 일대 / 12:15
眺望 안산(鞍山)과 홍제동 / 12:17
眺望 서울 시내 / 12:21
眺望 경복궁 일대 / 12:21
하산 / 12:32
기차바위 / 12:40
다시 창의문으로 되돌아 옴 / 12:55
2010.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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