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강원도

삼척(척주동해비)

케인스 2007. 12. 24. 22:42

 

                             삼척(척주동해비) 

 

 

삼척(三陟) /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강원도 삼척시에 소재하며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38호인 척주동해비는 현종2년(1661) 삼척부사 허목(許穆)이 세운 것이다. 당시 삼척은 파도가 심하여 조수(潮水)가 읍내까지 올라오고 홍수 때에는 오십천(五十川)이 범람하여 피해가 극심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허목이 신비한 뜻이 담긴 동해송(東海訟)을 지어 독창적인 옛 전서체(篆書體)로 써서 정라진(汀羅津) 앞의 만리도(萬里島)에 동해비를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졌다고 한다. 그 후 비(碑)가 풍랑으로 파손되자 숙종36년(1710)에 이를 모사하여 현재의 육향산에 세웠다. 조수를 물리치는 신비한 힘을 가졌다고 하여 '퇴조비(退潮碑)'라고도 하는데, 이 비석은 전서체의 동방 제일인자라고 하는 허목의 기묘한 서체로도 유명하다.  <안내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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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육향산(六香山)  <자료사진>

 

삼척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육향산은 옛날에는 죽관도(竹串島)라 하였고, 지금은 육향대(六香臺)라고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수군(水軍)의 진영인 삼척포진(三陟浦鎭)이 있었고, 현재는 산 정상에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와 평수토찬비(平水土讚碑), 그리고 육향정(六香亭)이 있습니다.  

 

          

                                                      육향산의 돌비석

 

육향산(六香山) 입구 계단 옆에는 7개의 돌비석이 서있습니다. 단순한 추상적 문양들이 새겨져 있어 매우 흥미롭습니다.

 

          

                                                         7개의 돌비석

 

가운데 있는 것이 이곳 관찰사를 지낸 홍상국(洪相國)의 은혜를 기리기 위한 유혜비(遺蕙碑)입니다.

 

 

 

                       

                                                           돌비석머리

 

시골에서 쉽게 만날것 같은 돌비석 이지만 비석머리에 새겨진 무늬가 보여주는 추상미는 매우 흥미롭습니다. 마치 산이나 파도를 표현한 것 같이 율동감을 지니고 있으며, 가운데 동그라미들이 크고 작게 새겨져 있기도 합니다. 

 

                       

                                                    육향산 정상을 향해..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비각(碑閣)

 

척주(陟州)란 삼척(三陟)의 옛 이름으로 이 비석(碑石)을 세운 이는 조선조 후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였던 미수(眉叟) 허목[許穆: 선조28년(1595)∼숙종8년(1682)]입니다.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미수(許眉叟)는 향약(鄕約)을 만드는 등 백성을 교화하며 많은 치적을 쌓아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임무에 충실하였으며, 2년간의 짧은 부임 기간 중에서도 역사에 남을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를 건립하였습니다.

 

          

                            비각 전면(前面)의 "척주동해비각(陟州東海碑閣)"  현판 

 

          

                               비각 후면(後面)의 "동해비각(東海碑閣)"  현판

 

미수 허목이 삼척부사로 부임할 당시 삼척에는 격심한 해파와 조수가 읍내에까지 밀려들어 강(江)의 입구가 막히고 오십천(五十川)이 범람하여 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어버리는 재앙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지방의 수령으로 백성의 고통을 안타깝게 여긴 허미수(許眉叟)는 동해바다를 예찬하는 노래인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그의 독특한 전서체(篆書體)에 담아 비를 세우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입니다. 척주동해비를 세운 이후 신기하게도 아무리 심한 폭풍우에도 바닷물이 넘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여, 이후 사람들은 그 비석(碑石)과 비문(碑文)의 신비한 위력에 놀라 이 비를 바닷물을 물리친다 하여 퇴조비(退潮碑)로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원래는 퇴조비각(退潮碑閣)이라는 현판이 있었으며, 1966년에 이를 동해비각(東海碑閣)이라고 쓴 현판으로 바꾸어 달았다고 합니다.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비각(碑閣)

 

비문에 의하면 본래 미수 선생이 비석을 세운 곳은 정라진의 만리도(萬里島, 지금의 큰 방파제 끝부분)였습니다. 그런데 48년 뒤인 숙종34년(1708)에 비문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한편 김구용이 지은 『척주지』(1848년)에 의하면 1708년 비석이 파손되자 조수피해가 다시 일어나므로 당시 삼척부사 홍만기(洪萬紀)가 사방으로 비문(碑文)을 찾다가 허미수 선생의 문하생(門下生) 한숙(韓塾)의 처소에서 원문(原文)을 구하여 다시 새겼으며, 숙종36년(1710) 2월에 부사 박내정(朴乃貞)이 죽관도(竹串島) 동쪽 산록에 비각을 짓고 옮겨 세웠다고 전합니다. 그후 이 비석은 259년간 그 자리에 보존되어 오다가 비각의 위치가 음지라 훼손의 염려가 있어, 1969년 12월6일 지방 유지들이 햇볕과 바람이 잘 드는 현재의 삼척시 정상동 죽관도[현재의 육향산(六香山)] 산정으로 이전하였습니다.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앞면                                                       <자료사진>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의 규모는 높이 170cm, 높이 76cm, 두께 23cm이며, 동해바다를 찬양하고 바다가 미치는 덕화(德化)를 기리며, 자연과 사람의 조화와 합일을 추구하는 차원 높은 문장으로 지어진 동해송(東海頌)이 새겨져 있습니다.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뒷면

 

척주동해비의 비문에는 허목의 전서체와 후대에 덧붙인 서체가 함께 새겨져있다고 하며, 금석문 학자들에 의하면 허목선생의 전서체 가운데 척주동해비문의 글씨가 가장 잘 쓰여진 글씨라고 하며,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난 독창성과 품격있고 웅혼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척주동해비문의 글씨는 후대에 새긴 글씨체에서 선명한 붓의 터치가 보이는 것과 달리, 허목의 글씨는 붓이 아닌 칡뿌리로 썼다고 하니 대단히 독특하고 새롭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비문을 소장하면 모든 재액이 없어진다 하여 많은 사람들이 집에 소장하거나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동해송(東海頌)  

     

동해송(東海頌)의 원문 내용과 해석은 아래의 항목인 '참고자료' 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비는 동해바다를 예찬하고 조수(潮水)를 방비하기 위하여 세웠다고 하나 실은 그 비문의 내용이 동해신(東海神)에 대한 진혼비(鎭魂碑)로서 동해의 안전을 해신에게 기원한 뜻이 있다고 여깁니다.

 

                                                        우전각(禹篆閣)

 

평수토찬비(平水土讚碑)의  비각(碑閣)입니다. 중국 형산(衡山) 우제(禹帝)가 썼다는 전자비(篆子碑)에서 48자(字)를 모아 새겼기에 우전각(禹篆閣)이라 이름 붙인 것 같습니다.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讚碑)

 

평수토찬비 역시 현종 때 삼척부사로 와있던 허목이 중국 형산(衡山) 우제(禹帝)가 썼다는 전자비(篆子碑)에서 48자(字)를 모아 목판에 새겨 보관해 오던 것을, 광무8년(1904) 황명(皇命)으로 비석에 새겨서 세웠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척주동해비 바로 밑에 세워져 있다. <안내판 등에서>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讚碑)

 

중국 형산비(衡山碑)의 대우수전(大禹手篆)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으로,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입니다. 현종원년(1661) 목판에 새기어 삼척부에서 보관하여 오다가 240여년 후인 광무8년(1904) 칙사(勅使) 종2품 강홍대(康洪大)와 삼척군수 정운석(鄭雲晳) 등이 황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육향산]에 건립하였습니다. 삼척군청에서 보관하고 있던 비문의 목판은 일제시(1920) 경성제국대학에 이송 보관하였으며, 현재는 서울대학교 내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조선 효종6년(1655) 선조의 여러 왕자 중 인흥군(仁興君)의 장남인 낭선군(朗善君)이 중국 명(明)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형산신우비(衡山神禹碑) 77자의 비문 탁본을 얻었는데 그 글자의 형상이 마치 용이나 뱀이 꿈틀거리는 것 같고, 새나 짐승이 움직이는 것 같고, 또한 초목의 형상과도 같이 빛나고 황홀하여 무어라 형언키 어려웠다 합니다. 이 비문은 옛날 하후(夏候)씨가 이 글로써 치산치수를 함에 사람들이 안심하고 잘 살 수 있었다 합니다. 이 비문은 4천년 동안이나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묻혀 있다가 중국 명나라 때(1527) 비로소 발견된 것을 낭선군이 우리나라에 전해왔으며, 이것이 허목선생에게 전해진 것이라고 합니다.


[비문해설]


집을 떠난 지 오랫동안 임금의 뜻을 받들어서 / 온갖 지혜 다 짜내어 열심히 일하고 규범을 만들었더니 / 땅이 안정되고 물이 고요해져서 / 물에도 땅에도 어수(漁獸)가 제 모습을 나타내니 / 형통하게 되었고 비색함이 없어져 / 밝은 사회 이룩하여 영원토록 잘 살리라.

 

          

                                                  위에서 본 우전각(禹篆閣)

 

          

                                        삼척포진성지(三陟浦鎭城址) 표석

 

1898년까지만 해도 현 삼척시 정상동(汀上洞) 육향산(六香山) 밑에는 석성(石城)이 있었으니 이곳이 바로 동해를 지키기 위하여 설치한 조선시대(朝鮮時代)의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입니다. 그러나 유서 깊은 성곽은 1916년 삼척항 축조공사로 인해 헐어 없어지고 지금은 표석(標石)만이 육향산정(六香山頂)에 남아있습니다.

 

이 삼척포진성은 원래 삼척읍 오분리(梧粉里) 뒷산 즉 해변의 험준한 산성(山城)에 진영(鎭營)이 있었는데 지금도 토성(土城)을 쌓았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이는 고려시대 몽고(蒙古)의 침략을 막기 위한 이 고장의 근거지로서 요전산성(蓼田山城)이라고 불리어졌읍니다. 이곳에서 정라진(汀羅津) 육향산(六香山)으로 옮긴 것은 조선조 중종15년(1520)이었습니다. 

 

          

                                        삼척포진성지(三陟浦鎭城址) 표석

 

삼척포진성(三陟浦鎭城)은 외침을 막기 위해 조선시대 첨절제사(僉節制使) 겸 토포사(討捕使)를 두어 영동 9개군의 수군(水軍)을 관장하던 진영(鎭營)이다. 삼척포진은 고려 우왕(禑王)10년(1384)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요전산성(寥田山城)에다 진영을 설치한 것이 처음인데 그후 중종(中宗)15년(1520)에 죽관도[六香山] 북쪽에 옮겨 둘레 900척 높이8척의 석성(石城)을 쌓고 토포아문(討捕衙門), 진동루(鎭東樓), 둔전(屯田)을 설치하여 동해를 지키는 기지(基地)가 되었다. 이 진영은 1898년 폐지되고 성곽은 1916년에 삼척항 축조 공사로 인해 헐어 없어졌다. 유서깊은 호국의 터전이기에 진영남단(鎭營南端)인 육향산정(六香山頂)에 표석을 세워 후세에게 전한다. 

                                              서기1987년 6월12일 삼척시장.   

 

          

                                                         육향정(六香亭)

 

육향산(六香山) 정상에 육향정(六香亭)이란 정자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옆으로 척주동해비와 조금 아래로 平水土贊碑(평수토찬비)가 서 있습니다. 

 

                           

                                                          육향정 현판

 

육향정이란 현판의 글씨는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운동가이며 서예가였던 吳世昌(오세창)씨의 글씨입니다.

 

           

                                                     육향정기(六香亭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육향정은 1962년에 지어진 것 같습니다.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와 육향정(六香亭) 

 

                          

                                           육향산에서 내려다본 삼척 앞바다

 

                        

                                          정상에서 반대편으로 내려오는 계단

 

 

 

참고자료

  

미수(眉叟) 허목(許穆)

 

                              

                                           허목 영정

 

조선 중기 삼척부사를 역임했던 허목선생은 자는 문부 또는 화보, 호는 미수 또는 태령노인이라 했는데 선조 28년인 1595년 한양 창선방에서 현감 교의 맏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업에 전념하여 일찍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었는데 1626년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의 복상문제와 관련하여 과거를 볼 수 없는 정거의 벌을 받게 되고, 이로 인해 학문에만 전념하게 되었습니다.

 

재야의 지도자로 있던 허목선생이 중앙 정계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시작한 것은 효종임금이 돌아가시고 현종임금이 즉위한 1660년 사헌부 장령(정4품)으로 등용되면서부터입니다. 이 때 효종임금의 계모인 조대비가 몇 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는가 하는 복상문제로 송시열과 대립하게 되는데, 허목을 비롯한 남인들은 3년설을 주장하고 송시열을 필두로 한 서인들은 만 1년설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복상문제가 아니라 현종임금의 왕통의 정당성과 연관된 매우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현종은 효종의 둘째아들인데 형인 소현세자가 죽어 맏이 대신 왕위를 계승했기에 효종을 맏아들로 인정하면 조대비의 복상은 3년이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만 1년입니다. 그런데 결론은 당시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라 맏아들이든 둘째 이하이든 그 어머니는 모두 만 1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의 주장과 같은 결정이 내려지고, 이러한 복제논쟁 시비로 정계가 소란해지자 현종임금은 허목을 삼척부사로 임명(좌천)했던 것입니다.

 

삼척부사로 부임한 허목은 향약을 만들어 주민교화에 힘쓰는 한편 척주지 편찬, 척주동해비 건립 등 많은 치적을 남기게 됩니다. 그러다 1674년 효종왕비가 죽자 다시 조대비의 복상문제가 다시 제기되는데, 경국대전에는 맏며느리의 상일 경우 시어머니는 만1년 ,둘째며느리 이하는 9개월로 규정되었습니다. 이 때 조정의 중심을 이루던 송시열과 서인들은 효종왕비를 맏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9개월복을 주장했으나 현종임금은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되어 만1년복으로 고칩니다.

 

이로써 송시열과 서인들은 실각하고 남인들의 집권과 더불어 허목은 이조참판,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유일하게 정승에 올랐습니다. 우의정으로 재임시 유배 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과 대립하고, 이로 인해 남인은 양파로 갈라지게 되는데, 허적은 송시열의 처벌을 가볍게 하자는 탁남, 허목은 가혹한 처벌을 주장하는 청남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1678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고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념하다가 1682년 세상을 하직했습니다.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 1691년 그의 신위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이 마전군에 세워졌으며, 나주의 미천서원. 창원의 회원서원에도 제향되었습니다. 시호는 문정입니다.

 

허목선생은 그림과 글씨, 문장에 모두 뛰어났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작품으로는 척주동해비와 영상이원익비문. 이성중표문이 있고, 그림으로는 묵죽도가 전하며. 저서로는 [동사] [미수기언] 등이 있습니다.  <삼척시립박물관>

 

                               허목(許穆)이 쓴 수필원고본들 가운데 하나인 동해비첩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 동해송(東海頌) / 都護府使 陽川 許穆 先生의 碑文  

 

미수 허목의 척주동해비 동해송의 전체 글자수는 본래에 222글자였다. 그러나 아래에 번역된 비문의 글자 수는 192 글자로서 서른 글자가 빠져 있다. 빠져있는 30 글자들은 비문의 앞부분에 적혀있는 두서(頭序)로 척주의 위치를 표현한 21 글자와, 비문의 끝 부분에 허목의 관명과 아호를 적은 아홉 글자들로 도합 서른 글자들이다. 그 서른 글자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州古悉直氏之地, 在예墟, 南去京都七百里, 東臨大海

    (주고실직씨지지, 재예허, 남거경도칠백리, 동림대해) - 비문 앞에 적혀 있는 두서(頭書) 21자.
都護府使 孔巖 許穆 書

    (도호부사 공암 허목 서) - 비문 끝에 적은 관명과 아호등 9 글자.                                 

 

 

     瀛海漭瀁(영해망양) 百川朝宗(백천조종) 其大無窮(기대무궁)
     바다가 넓고 넓어 / 온갖 냇물 모여드니 / 그 큼이 끝이 없어라

 

     東北沙海(동북사해) 無潮無汐(무조무석) 號爲大澤(호위대택)
     동북은 사해여서 / 밀물 썰물이 없으므로 / 대택이라 이름했네

 

     積水稽天(적수계천) 渤潏汪濊(발휼왕예) 海動有曀(해동유애)

     파란 물 하늘에 닿아 / 출렁댐이 넓고도 아득하니 / 바다가 움직이고 음산하네


     明明暘谷(명명양곡) 太陽之門(태양지문) 羲伯司賓(희백사빈)

     환한 저 양곡은 / 해 뜨는 문이라서 / 희백이 공손히 해를 맞으니


     析木之次(석목지차) 牝牛之宮(빈우지궁) 日本無東(일본무동)
     석목의 위차요 / 빈우의 궁으로 / 해 돋는 동쪽의 끝이로다

 

     鮫人之珍(교인지진) 涵海百産(함해백산) 汗汗漫漫(한한만만)
     교인의 보배와 / 바다의 온갖 물산 / 많기도 하여라


     奇物譎詭(기물휼궤) 宛宛之祥(완완지상) 興德而章(흥적이장)

     신기한 물건이 조화를 부려 / 꿈틀거리는 그 상서는 / 덕을 일으켜 나타남이로다


     蚌之胎珠(방지태주) 與日盛衰(여일성쇠) 旁氣昇霏(방기승비)

     조개 속에 든 진주는 / 성쇠를 달과 함께 하며 / 기운을 토하여 김이 오르고

     天吳九首(천오구수) 怪夔一股(괴기일고) 颷回且雨(표회차우)
     머리 아홉인 천오와 / 외발 달린 기는 / 큰 바람을 일으키며 비를 뿌리네


     出日朝暾(출일조돈) 轇軋炫煌(교알현황) 紫赤滄滄(자적창창)
     아침에 돋는 햇살 / 찬란하고도 휘황하여 / 붉은 빛이 일렁거린다


     三五月盈(삼오월영) 水鏡圓靈(수경원영) 列宿韜光(열숙도광)

     보름달 둥근 달 / 하늘의 수경이 되니 / 별들이 빛을 감추네

     扶桑沙華(부상사화) 黑齒麻羅(흑치마라) 撮髻莆家(촬계보가)

     부상의 사화와 / 흑치의 마라와 / 보가의 상투와

 

     蜑蠻之蠔(연만지호) 爪蛙之猴(조와지후) 佛齊之牛(불제지우)
     연만의 굴과 조개 / 조와의 원숭이 / 불제의 소들은


     海外雜種(해외잡종) 絶黨殊俗(절당수속) 同囿咸育(동유함육)
     바다 저편 잡종으로 / 무리도 다르고 습속도 다른데 / 한곳에서 같이 자라네


     古聖遠德(고성원덕) 百蠻重譯(백만중역) 無遠不服(무원불복)
     옛 성왕의 원대한 덕화에 / 오랑캐들이 여러번 통역을 거쳐 / 모두 복종하네


     皇哉凞哉(황재희재) 大治廣博(대치광박) 遺風邈哉(유풍막재)

     아아, 빛나도다/ 거룩한 정치가 널리 미쳐 / 유풍이 끝없으리

 

(註)

 

沙海[사해:동해는 모래바다여서 비습(卑濕)한 기운이 없기 때문에 물이 쉽게 새서 조수가 일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된 말]
大澤[대택: 동해를 이름]
暘谷[양곡: 해 뜨는 곳]

羲伯[희백: 요 임금 때 천문(天文)와 역상(曆象)을 맡은 관원]

析木[석목: 동양 천문학에서 이십팔수(二十八宿)중에 정동쪽 인(寅)방에 있는 기(箕)수와 두(斗)

                  수의 두 별]

牝牛[빈우: 동양의 천문학에서 이십팔수중에 축(丑)방에 있는 기(箕), 미(尾) 두 별자리]
鮫人[교인: 전설상의 물 속에 사는 괴물 이름. 이 괴물이 쉬지 않고 비단을 짜는데 이 괴물이 울면

                  눈물이 모두 구슬로 변한다고 전해온다]

天吳[천오: 해신(海神)의 한 종류로 몸은 범과 같고, 얼굴은 사람과 같으며, 머리, 다리, 꼬리가 모

                  두 여덟이며 그 색깔이 청 황색이라고 전해오는 수백(水伯)]

[기: 유산(流山)에 살고 있다고 전해오는 짐승으로, 소의 형상에 몸이 푸르며 뿔이 없고 다리

            가 하나인 외발달린 짐승으로 이 짐승이 물에 드나들 때마다 세찬 비바람이 일어난다고

            하는 전설상의 짐승]

朝暾[조돈: 떠오르는 태양 또는 아침 햇빛]

轇軋[교알: 심원하고 광활함을 뛰어넘는 모양]

紫赤[자적: 임금이나 신선이 사는 곳의 색상]

韜光[도광: 빛을 감추어 밖으로 드러내지 않음]
扶桑[부상: 동해 가운데 있는 신목(神木)]

沙華[사화: 동해에 있는 나라]
黑齒[흑치: 남만에 있는 종족]

麻羅[마라: 남만에 있는 종족]
莆家[보가: 동남해에 있는 종족의 이름]

蜑蠻[단만: 종족의 이름]
爪蛙[조와: 원숭이가 많이 산다는 곳의 부족 이름]
佛齋[불재: 살아있는 소의 피를 마신다는 부족 이름]
重譯[중역: 여러 번 통역을 거쳐서 알아차리는 것]

廣博[광박: 심오한 학식과 드넓은 식견] 

 


[조용헌 살롱]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 2005.01.05

 

강원도 삼척시 정라동의 육향산(六香山)에는 영험한 비석이 하나 서 있다. 남인의 영수였던 미수(眉叟) 허목(許穆:1595~1682)이 삼척부사 재임 시절인 1661년에 세운 척주동해비가 그것이다. 높이 170㎝, 너비 76㎝에 검은색 오석(烏石)으로 되어 있다.

 

이 비를 세운 이유는 동해의 해일로 인한 바닷가 동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당시 삼척은 폭풍과 해일 피해가 잦아서 고기잡이배가 다 부서졌을 뿐만 아니라, 파도 때문에 바닷가에 나가지 못하여 어민들이 굶어죽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해일이 몰려올 때는 바닷가로부터 30리 가량 떨어진 거리에 있는 동헌마루에까지 바닷물이 밀려들 정도였다고 한다.

 

신임부사로 부임한 허목이 세운 해일 방지 대책은, 그 자신이 돌에다가 직접 글씨를 써서 바닷가에 세우는 일이었다. 비석을 세우자 그 이튿날 물이 평소의 3분의 1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에는 비석이 묻힌 주춧돌까지만 들어오는 게 아닌가.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바닷물의 침수피해를 입었던 곳까지도 백성들이 논밭을 만들어 농사를 지을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미수가 비석에 새긴 문장을 일컬어 동해송(東海頌)이라고 한다. 동해송은 사언고시(四言古詩) 192자로 되어 있다. 글씨체는 고풍스러운 전서(篆書)체이다. 미수는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고전(古篆)의 대가였는데, 동해송은 그 고전의 품격이 유감없이 발휘된 글씨이다. 그 내용은 육경(六經)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도가적이며 주술적인 비유들이 포함되어 있다. 미수는 유학자이기도 하였지만, 전국 수백 군데의 명산대천을 방랑하면서 도가(道家)의 인물들과도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이인(異人)으로서, 영적인 파워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미수가 삼척을 떠난 뒤에 후임으로 온 부사는 반대파인 노론계의 인물이었다. 이방으로부터 그 비석의 내력을 전해들은 신임부사는 허무맹랑하다고 여기고 비석을 깨트려 버렸다. 그러자 다시 풍랑과 해일이 몰려왔다. 당황한 신임부사는 다시 비석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고 전해진다. 미수가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또 하나의 비석을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척주비 탁본글씨로 만든 병풍은 인기가 높다.

 

2007.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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