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와 여행(국내)/전라남도

진도(용장산성)

케인스 2007. 5. 2. 01:57

 

                                                     진도(용장산성)

 

용장산성(龍藏山城)/사적 제126호

 

용장산성은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 용장리에 위치하며, 고려의 삼별초가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고자 고려 원종11년(1270) 8월부터 9개월 동안 항몽의 근거지로 삼았던 곳입니다.

 

1225년 고려에 왔던 몽고 사신이 귀환하다 피살되자 몽고는 고종18년(1231) 고려를 침입하였고, 고려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 몽고군을 상대로 40년 동안 맞서 싸웠습니다. 당시 집권세력이던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원종11년(1270) 고려정부가 마침내 몽고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몽고의 강요에 의해 강화도에서 다시 수도 개경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에 배중손(裵仲孫) 이하 삼별초의 군사들은 반기를 들어 대몽항쟁의 굳은 결의를 다짐하고, 원종의 6촌인 왕족 승화후(承和候) 온(溫)을 추대하여 왕으로 삼아 강화도에서 항쟁하였습니다. 그러나 강화도가 개경과 너무 가까워 앞으로 우려되는 개경 정부의 공격과 장기간 항전에 어려움이 있어, 천여 척의 배와 병력, 가족, 물자를 싣고 남천하여, 진도 용장으로 옮겨와 대몽항쟁의 근거지로 삼았는데 이때 쌓은 성이 용장성(龍藏城)입니다.

 

 

                                           용장산성(龍山城) 전도(全圖)

 

결연한 항몽의지가 실려있는 용장산성은 삼별초가 후세에 남긴 자취뿐만 아니라, 강력한 세력에 맞서 지키고자 하였던 자주국가의 정신을 우리들에게 소중한 유산으로 남겨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삼별초를 떠나서는 용장산성을 이야기할 수 없고, 용장산성을 떠나서는 삼별초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삼별초 (三別抄)란 고려 무신정권(武臣政權) 때의 특수군대를 말합니다. 1219년(고종6) 최충헌(崔忠獻)의 정권을 계승한 최우(崔瑀)가 나라의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夜別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別抄)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 이라는 뜻입니다. 그 뒤 야별초가 확대 재편되며 이를 좌별초, 우별초로 나누고 몽고에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사람들로 구성된 신의군(神義軍)을 조직하여 이를 좌, 우별초와 합하여 삼별초의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승화후(承和候) 온(溫)을 새왕으로 받들고 관부를 구성하여 관리를 임명한 새 정권은 강화를 떠나 항해 74일 만인 원종11년(1270) 8월19일 진도 벽파진에 닻을 내리고 용장성에 터를 잡은 후, 산성을 개축하고 성안의 용장사(龍藏寺)를 궁궐로 삼고 여러 건물을 지었으며 왕을 황제로 칭하였습니다. 또한 오랑(五狼)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고, 왜(倭)에 국서(國書)를 보내 자신들이 유일한 정통 고려 정부임을 표명하기도 하였습니다.  

 

                                           

                                                     삼별초의 이동                (사진자료:야후)

 

이들이 진도로 온 것은 해전에 약한 몽고군과 맞서 싸우는데 지리적으로 적합하고, 인접해 있는 육지에서 수시로 대몽항쟁을 할 수 있으며, 땅이 넓고 기름져서 비옥한 농지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또한 명량해협은 경상도와 전라도의 세곡을 실은 조운선이 개경으로 가는 길목이기에 이곳을 차단해 경제적인 타격을 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고려 정부는 몽고와 함께 진도를 몇차례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고려 원종12년(1271) 5월15일 고려 장수 김방경과 몽고 장수 홍다구가 이끄는 여몽연합군은 한달여에 걸친 치밀한 준비 끝에 병선 4백여척에 만명이 넘는 군사를 동원 3군으로 나누어 협공작전으로 진도를 공격하였습니다. 10여일동안 벌어진 격렬한 싸움에서 용장성을 버리고 후퇴한 삼별초 배중손은 남도진(南桃鎭)으로 향하였고, 김통정은 왕을 호위하며 금갑진(金甲鎭)으로 향했다. 하지만 도중에 왕은 죽음을 맞았고, 김통정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제주도로 건너가게되며, 남도진으로 후퇴했던 배중손 부대는 전멸하게 되었다.

 

이 후 제주에 들어온 삼별초는 항파두리성을 쌓고 다시 해상활동을 전개하며, 몽고군이 주둔하고 있던 경상도 연해까지 출몰하여 몽고군에게 타격을 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개경정부는 삼별초가 제주에 온지 3년만인 원종15년(1274) 4월28일에 만2천여명의 여몽연합군과 160여척의 병선으로 북쪽 해안인 명월포와 함덕포로 진격하여 항파두리성을 함락시킵니다. 김통정은 남은 군사와 함께 한라산 자락으로 후퇴하여 결국 자결하고 맙니다. 삼별초의 흔적이 역사에서 사라지는 순간 이었습니다.

  

삼별초는 여몽연합군에게 패하였지만 그 항쟁의 정신은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해오고 있으며, 삼별초의 항몽이 끝난 후 고려는 약 100여년간 몽고의 지배를 받아야 했습니다.

 

                 

                                                           용장산성               (자료사진:투어가이드)

 

진도 동북쪽의 벽파진으로 들어온 삼별초는 그 가까이에 도성을 정하고 성을 쌓았는데 이 성이 용장산성입니다. 성 주위에는 아직도 옛날 사용하였던 성돌이 군데군데 남아있습니다. 지난 84년 지표조사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된 용장산성은 그 길이가 12.85km이며 제일 높은 곳은 4m 정도 되며, 둘레는 고려의 도성인 개경에는 조금 못미치지만 강화보다는 규모가 크다고 합니다.

 

1989년 용장산성의 시굴 조사결과 성벽과 그에 부속된 성문, 건물지, 치 등 다양한 유구가 분포하고 있었으며, 특히 명문기와류와 동전류 등 절대 연대자료를 비롯한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출토된 명문기와, 자기류, 동전류 등의 유물과 문헌기록을 참고할 때, 용장산성은 1270년(원종 11) 8월 삼별초가 진도에 들어오기 이전에 이미 축조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어지며, 대략 1234년(고종 30)경에 용장산성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용장산성은 삼별초 대몽항쟁의 대표적인 유적지이며, 고려왕실에 대립되는 궁궐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습니다. 

 

                          

                                                     용장산성 내의 궁궐터                          (사진자료: 야후)

 

258만평에 달한는 산성 안에는 궁궐터를 산비탈을 깍아서 계단식으로 조성하였는데, 모두 9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궁궐터의 면적은 7천여평, 건물은 17개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궁궐과 관아가 함께 있었을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산과 계곡에 둘러쌓인 지형에 산비탈을 깍아서 계단식으로 조성한 개성의 고려궁인 만월대와 공통적인 특징을 나타내어 고려국을 계승하고 있다는 의미를 표현하였다 하겠습니다. 이러한 용장산성은 위엄있고 웅장하여 도성으로서도 손색없는 모습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궁궐터 각각의 기단은 석축으로 만들었는데 산의 기울기에 따라 돌담을 쌓아 비탈진 지형을 보강하였으며, 석축 바로 위에 땅을 고른 뒤 건물을 앉혔습니다. 왕이 기거했던 정전의 터는 맨 윗쪽에 있는 건물지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89년 발굴조사 때 수습된 기와와 청자 등의 유물로 볼때, 사전 준비없이 진도에 들어온 삼별초는 이미 이곳에 존재하였던 '용장사'라는 사찰을 확대하여 궁궐로 삼았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궁궐의 뒷산에도 다시 봄은 찾아 왔고, 삼별초의 항쟁정신도 또다시 우리 앞에 찾아왔습니다.

 

 

계단식 축대를 오르려면 간이 나무계단을 이용하게 되는데, 이는 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계단을 쉽게 제거할 수 있도록 함이었다고 합니다.

 

 

작은 정자 형태의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보입니다.

 

                                                        궁궐 터의 석축

 

                         

                        발굴 과정에서 나온 궁궐의 석재들 (사진자료:한성대 역사문화학부)

 

 

어디에 썼던 돌일까요?

 

 

                                                              우물

 

삼별초의 무사들이 마셨다는 우물물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껏 마르지 않은 것과 같이, 아직도 삼별초의 꿈은 진도에서 사라지지 않고 허상무씨의 해설에 녹아서 남아 있는것 같았습니다.

 

산성내의 궁궐터에는 우물이 2개 있었는데 왕이 마셨다는 우물은 찾기 어렵고 궁궐터 입구의 우물은 아직도 마을 주민들이 즐겨 마신다고 합니다.  

 

 

                                                          용장산성의 봄

 

 

2007.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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